배신자의 탑에 피어난 장미

2화: 닫힌 봉인의 안쪽
리아는 장미 뿌리 밑에서 나온 종이 조각을 두 장으로 복사했다. 원본은 마른 천 사이에 끼워 보관했고, 사본 하나는 감찰 기록과 함께 탑의 금고에 넣었다. 다른 사본은 자신이 지니기로 했다. 카엘은 종이를 만지지 않았지만 문장을 오래 읽었다.
“네 오빠 이름이 적혀 있다.”
“그가 이 탑에 있었다는 증거예요.”
“그는 7년 전 사라졌다.”
“왕실 기록에는 연구 중 사고사라고 적혀 있어요.”
“그 기록이 틀렸다는 뜻인가?”
“아직은 몰라요. 이 종이가 언제 쓰였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리아는 잉크와 종이의 섬유를 살폈다. 잉크는 탑의 철분 잉크였고, 종이는 7년 전 연구 일지와 비슷했다. 하지만 종이만으로 작성 날짜를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분석 결과를 ‘가능성 높음’으로 적었다.
봉인이 닫힌 뒤 탑의 온도는 계속 내려갔다. 오린은 온실의 화로를 정리하며 장미 잎을 살폈다. 검은 봉오리는 다른 꽃보다 낮게 피었고, 줄기에는 물기가 없었다. 오린은 꽃을 따지 말라고 했다. 봉오리가 수맥의 압력을 받아 생긴 것이면, 건드릴 때 물길이 더 막힐 수 있었다.
“이 꽃을 몇 년 동안 봤나요?” 리아가 물었다.
“처음은 아니오. 예전에도 탑이 봉인되면 이런 꽃이 피었지.”
“왜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보고했소. 왕실은 병충해라고 답했지.”
오린은 오래된 정원 일지를 꺼냈다. 7년 전 리아의 오빠가 사라진 주에도 검은 꽃봉오리가 피었다. 그 직후 탑의 수로가 임시 폐쇄됐고, 연구 일지 일부가 반출됐다. 기록에는 왕실 사절의 서명이 있었지만 봉인 해제 승인란은 비어 있었다.
리아는 날짜를 대조했다. 오빠의 사고사 보고는 수로 폐쇄보다 하루 늦게 작성됐다. 사고를 받고 폐쇄한 게 아니라 먼저 수로를 막고 나중에 사망 기록을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죠?” 리아가 카엘에게 물었다.
“탑에 있었다. 하지만 수로를 조작한 혐의로 심문을 받느라 연구동에 들어갈 수 없었어.”
“오빠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을 아나요?”
“그의 연구 조수였던 네린.”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죠?”
“왕실 수도에 있다고 들었다.”
카엘은 정보의 출처를 설명하지 않았다. 리아는 ‘카엘의 진술, 출처 확인 필요’라고 적었다. 감시 대상이라는 이유로 의심을 지우지 않을 생각이었다.
탑의 봉인 장부는 입구 홀의 유리함에 보관돼 있었다. 기록에는 봉인을 닫은 날짜와 결계 방향만 적혀 있었다. 결계를 작동시킨 마법사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카엘은 장부가 원래 그런 방식으로 작성됐다고 했다. 리아는 장부 가장자리에 최근 종이를 떼어낸 흔적을 찾았다.
“이 이름란이 잘려 나갔습니다.”
“누가 한 일인지 모른다.”
오린은 옛 구조도에서 북쪽 온실 아래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았다. 끝에는 수맥 압력을 측정하던 계기가 있었다. 탑이 봉인되기 전 기록을 바깥으로 보내는 전달관도 남아 있었다. 지금은 결계에 눌려 닫혔지만, 내부 압력을 낮추면 한 번 정도 열 수 있었다.
카엘은 전달관을 여는 일에 반대했다. “바깥에서 신호를 받으면 왕실이 우리가 수로를 건드린 걸 안다.”
“이미 탑은 봉인됐어요. 숨겨도 조사 대상입니다.”
“그들은 너를 반역자로 기록할 수 있다.”
“그럼 기록이 그렇게 바뀌기 전에 원본을 보내야 해요.”
리아는 감찰관이 증거를 독립 보관소로 전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보여 줬다. 카엘은 봉인을 열 때 생길 위험을 설명했다. 압력이 급격히 떨어지면 장미 뿌리가 말라 죽고, 수맥이 탑으로 터질 수 있었다.
그들은 시간과 수압을 재기로 했다. 리아는 매분 계기 눈금을 적고, 오린은 온실의 물길을 조절했다. 카엘은 마법을 쓰지 않고 수동 밸브를 열었다. 그가 손을 밸브에 댈 때마다 화상 자국이 붉어졌다. 리아가 중단을 제안하자 그는 계속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정해 둔 3분이 지나기 전에 밸브를 닫았다.
“아직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계약에 적은 시간은 넘길 수 없어요.”
카엘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 단계는 더 작은 압력으로 나누기로 했다. 수맥 계기 뒤에 숨겨진 금속함이 발견됐다. 함 안에는 왕실 결계사의 점검표가 있었다. 탑을 봉인한 명령은 왕실에서 내려왔지만, 서명자는 카엘이 아니었다. 결계사는 탑 아래 수맥을 왕실 저수지로 돌리라는 추가 지시를 받았다고 적었다.
“물이 빠져나가고 있었어요.” 리아가 말했다. “카엘이 수로를 바꾼 게 아니라, 왕실이 수맥을 가져가려 한 거예요.”
“그 명령을 받은 결계사는 이미 수도로 돌아갔다.” 카엘이 말했다.
“증언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가 왕실에 반대할 수 있을까?”
“요청과 강요는 달라요.”
리아는 결계사의 이름을 기록하고 왕실로 공식 질의서를 작성했다. 봉인 시각, 추가 수로 명령의 출처, 사라진 기록의 보관 위치를 물었다. 답변 기한도 적었다.
질의서는 전달관으로 보낼 수 없었다. 봉인이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들은 탑 문양에 짧은 신호를 보냈다. 신호는 바깥에 닿았지만 답신은 오지 않았다.
저녁에 장미의 검은 봉오리가 열렸다. 안에는 말라붙은 씨앗과 작은 금속 고리가 들어 있었다. 오린은 그 고리가 리아의 오빠가 쓰던 실험복 단추라고 알아봤다. 리아는 단추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잠시 말을 잃었다.
“그가 죽지 않았다는 뜻일까요?”
“단추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카엘이 말했다.
“알아요. 그래도 찾아야 해요.”
그녀는 단추를 증거 봉투에 넣었다. 오린의 일지에는 장미가 피는 시기마다 탑의 수맥 압력이 바뀐다고 적혀 있었다. 검은 꽃은 매년 피지 않았고 왕실이 수로를 바꾸려 한 해에만 나타났다.
다음 날 아침 봉인 문양이 다시 빛났다. 바깥에서 왕실 서신함이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리아는 공문을 꺼내 봉인을 확인했다. 내용은 짧았다. ‘왕실은 탑의 기록을 보유하지 않는다. 감찰관은 조사를 중단하고 봉인 해제를 기다리라.’
공문 아래쪽에는 결계사의 개인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는 공식 답변을 보냈지만 왕실의 서명을 받지 않았다.
“이 답변은 왕실의 것이 아니에요.”
카엘은 전달관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했다. 리아는 결계사에게 직접 증언 의사를 묻겠다고 답했다. 그 순간 북쪽 창문이 열렸다. 바깥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이 날아 들어왔다. ‘카엘은 반역자가 아니다. 탑의 봉인은 수로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서명은 에드윈이었다. 그는 증인이 될 수 있었지만, 아직 공개 증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리아는 단추를 손바닥에서 굴렸다. 금속에 새겨진 숫자는 17이 아니라 19였다. 그녀의 오빠는 연구 일지를 19번까지 썼다가 마지막 권을 제출하지 않았다. 왕실은 그가 사고로 죽었다고 통보했지만, 시신은 가족에게 돌려보내지 않았다. 리아는 그때 어머니가 항의하던 모습과, 창문 앞에서 아버지가 편지를 접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카엘이 물었다.
“저는 어렸어요. 어른들이 사망했다고 말했고, 장례를 치르지 않았지만 더 묻지 말라고 했어요.”
“그게 너를 탑에 오게 했군.”
“네. 하지만 당신을 믿으러 온 건 아니에요.”
“그럴 필요도 없다.”
그의 대답은 차갑지 않았지만, 리아에게는 벽처럼 들렸다. 그녀는 자기가 원한 건 믿음이 아니라 설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카엘은 수로 밸브를 닫은 날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수맥이 급격히 약해지고, 온실의 식물들이 한꺼번에 시들었다. 그는 왕실 결계사에게 경고했지만, 답신은 오지 않았다. 다엘은 밸브를 잠그면 탑의 물은 지킬 수 있지만, 북부 저수지의 압력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반대했습니까?”
“아니. 다만 주민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대체 수로를 찾을 시간을 달라고 했다.”
“당신은 그 말을 들었나요?”
“들었다. 하지만 밸브를 먼저 잠갔다.”
카엘은 판단을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탑과 수맥을 지키려 서둘렀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리아는 그 사실을 기록하되, 다엘이 같은 결정을 지지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카엘은 다엘의 마지막 서명이 있는 페이지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린은 정원 일지를 더 가져왔다. 한 장에는 다엘의 필체로 “검은 장미가 피면 탑은 숨을 막고 있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오린의 오래된 메모가 있었다. 꽃을 옮겨 심으면 수맥의 압력이 한쪽으로 쏠릴 수 있다는 경고였다. 리아는 검은 봉오리를 옮기는 대신, 주변 흙과 물을 채취했다.
분석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장미 주변의 흙에는 철 가루가 섞여 있었고, 탑 바깥의 북쪽 수로에는 같은 철 성분이 없었다. 누군가 수로 장치를 식물 뿌리 아래 숨겼다면 탑의 열과 수분을 이용해 작동시킬 수 있었다. 장미는 마법의 원천이 아니라 장치의 변화를 알려 주는 살아 있는 흔적이었다.
“이 꽃이 살아 있는 동안 장치를 건드릴 수 없겠군요.” 리아가 말했다.
“그렇다. 꽃을 죽이면 수맥도 막힐 수 있어.”
“그런데 왕실은 봉인을 닫았어요. 꽃이 먼저 시들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아는 처음으로 그가 화를 참는 것을 보았다. 그는 탁자 가장자리를 세게 쥐었다가 손을 풀었다. 손등의 화상이 붉어졌다.
“수로를 바꾼 사람은 내가 아니야. 하지만 네가 그 사실을 믿지 않아도 된다.”
“믿을 게 아니라 증거를 찾을 거예요.”
“그게 네 일이지.”
리아는 그의 말이 자신을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감찰관으로만 남으려 했다. 하지만 눈앞의 사람은 오빠의 마지막 시간을 아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엘과의 마지막 대화를 정확히 기억하는지 물었다. 카엘은 기억이 끊긴 부분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다엘이 “기록은 꽃 아래에 남는다”고 했다고만 기억했다.
오린은 그 말이 온실의 장미를 가리키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세 사람은 여러 꽃의 뿌리 주변을 확인했다. 마지막 줄의 장미 아래에서 작은 금속 상자 모서리가 드러났다. 상자를 꺼내려면 꽃 한 송이의 뿌리를 잘라야 했다. 오린은 그 뿌리를 자르면 오래된 장미 한 그루가 죽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리아는 칼을 들었다가 멈췄다. “다엘의 기록을 찾는 게 이 꽃을 죽일 이유가 되나요?”
카엘은 그녀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 “네가 선택해야 한다.”
오린은 다른 방법을 찾으려면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봉인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보다 짧을 수 있었다. 리아는 뿌리를 자르는 대신 금속 상자 주변의 흙을 조금씩 걷어 내기로 했다. 손톱 밑에 흙이 들어가고 손끝에서 피가 났지만, 장미 뿌리는 온전히 남았다.
상자가 반쯤 드러났을 때 탑의 봉인 문양이 갑자기 켜졌다. 온실의 물길이 역류하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카엘이 압력을 붙잡았고, 오린은 화로를 끄러 달려갔다. 리아는 흙 속의 금속 상자를 잡고 있었지만, 물이 밀려와 손이 미끄러졌다. 카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손을 잡았다. 상자를 놓칠 위험이 사라지자마자 손을 뗐다. 리아는 그 짧은 접촉이 남긴 열을 느꼈다. 그는 상자를 열어 보지 않고, 먼저 수맥의 압력을 안정시켰다.
물이 빠진 뒤 상자 안에는 다엘의 필사 노트가 있었다. 첫 장에는 카엘의 서명이 없었다. 대신 밸브를 잠그기로 결정한 날짜와, 그날 회의에 참석한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이름은 왕실 결계사 에드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