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신들의 종탑지기

1화: 이름이 비어 있는 종
새벽 종이 울리지 않았다.
종탑지기 연우는 손에 쥔 밧줄을 놓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다. 매일 해가 뜨기 직전, 가장 낮은 종은 도시의 문턱을 지키는 신 아녜의 이름을 불렀다. 그 종이 울리면 잠든 집의 문이 저절로 닫히고, 밤길을 걷던 사람은 안전한 계단을 찾았다.
오늘은 밧줄이 흔들렸는데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고리가 끊어졌나?”
연우는 종탑의 좁은 계단을 내려가 첫 번째 방으로 향했다. 청동 종은 제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몸체에는 이름을 새기는 얕은 홈이 있었지만, 홈은 텅 비어 있었다. 전날까지 있던 ‘아녜’라는 글자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종을 손으로 밀었다. 종은 움직였으나 울리지 않았다. 안쪽의 추도, 표면의 금도 멀쩡했다. 이름만 사라지면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말은 옛 신앙으로 치부되었다. 연우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종이 침묵하고 있었다.
“아녜님?”
아무 대답도 없었다.
종탑의 문이 삐걱 열렸다. 작은 체구의 노파가 들어왔다. 청동빛 피부와 갈라진 손, 푸른 앞치마는 종탑에 사는 문턱 신 아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흐릿해 보였다. 눈썹과 입술의 경계가 안개에 젖은 그림처럼 흔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내 이름을 누가 불렀니?” 아녜가 물었다.
“저요. 방금.”
“아니, 그전에는.”
연우는 장부를 꺼냈다. 이름 장부에는 종탑에 사는 작은 신들의 이름과 맡은 역할, 사람들과 맺은 약속이 적혀 있었다. 아녜의 이름은 어제까지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오늘 펼친 페이지에는 잉크가 번진 자국만 남아 있었다.
“장부에서도 사라졌어요.”
아녜는 종의 빈 홈을 쓰다듬었다. “누군가 나를 잊었구나.”
“신은 기도를 받아야 사는 거 아니에요?”
“큰 신들은 그렇겠지. 나는 문턱을 넘는 사람들에게 작은 약속을 받아. 집에 돌아오면 불을 끄고, 떠날 때는 문을 잠그고,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약속.”
“그럼 사람들이 그런 약속을 잊어서 이름이 사라졌어요?”
“약속만으로는 아니야. 이름을 기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해.”
연우는 아녜의 흐릿한 손을 바라봤다. “그럼 이름을 다시 새기면 되잖아요.”
“새긴다고 기억이 돌아오지는 않아. 이름은 문이고, 문 너머에는 누군가의 삶이 있어.”
아녜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그림자가 조금씩 옅어졌다. 연우는 장부를 품에 넣고 종탑의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에는 도시의 집과 길을 돌보는 작은 신들이 살았다. 빵 냄새를 지키는 구움이, 물건이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되돌이, 골목의 가로등을 켜는 반딧불이. 그들은 평소처럼 다투고 있었지만, 각자의 종에는 금이 가거나 글자가 흐려져 있었다.
“구움이 이름이 뭐였지?” 되돌이가 물었다.
“나도 기억이 안 나.”
“그럼 너는?”
되돌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몸은 작은 주머니 모양이었고, 안에서 구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이름을 부를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연우는 각자의 종을 확인하고 장부에 상태를 적었다. 이름이 흐려지는 순서는 무작위가 아니었다. 성문 바깥의 우물 신, 북쪽 시장의 등불 신, 오래된 골목의 문턱 신. 사람들의 기억이 적은 장소부터 약해졌다.
그때 종탑 아래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수선공 단비가 공구 가방을 든 채 올라왔다. 짧은 검은 머리에는 빗물이 맺혀 있었다.
“아침 종이 멈췄다는 소문을 듣고 왔어요. 기계가 고장 난 거예요?”
“기계는 멀쩡해요.”
“그럼 신이 일을 안 하는 거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단비는 빈 종을 살펴보았다. “홈이 깨끗해. 글자를 갈아낸 흔적도 없어. 누가 이름을 가져갔나?”
연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장부의 빈 페이지에는 아주 작은 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종이에 대고 귀를 가까이 댔다. 얇은 울림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름이 어디로 갔는지 들려요.”
단비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
연우는 페이지를 넘겼다. 울림은 종탑 바깥, 동쪽 성벽 아래로 향했다. 그 길은 오래전부터 폐쇄된 골목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그 골목을 ‘빈자리’라 불렀다. 주소도, 가게 이름도, 주민 명부도 없는 곳이었다.
“거기서 누군가 사라졌어요.”
“사람이야, 신이야?”
“아직 몰라요.”
연우는 종탑의 열쇠 꾸러미를 챙겼다. 아녜가 문 앞에 서서 그를 바라봤다.
“이름을 찾으러 가는 거니?”
“네.”
“너 자신의 이름도 잊을 수 있어.”
연우는 걸음을 멈췄다. “잊어도 다시 찾으면 되죠.”
아녜는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찾는 동안 네가 누구였는지 기억해 줄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해.”
단비가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그럼 내가 같이 가면 되겠네. 혼자 가면 장비를 망가뜨릴 것 같으니까.”
연우는 작은 웃음을 지었다. “종탑 일은요?”
“종은 내가 고쳐 볼게. 이름이 필요한지, 추만 필요하면 알려 주지.”
둘은 동쪽 성벽 아래의 골목으로 향했다. 폐쇄된 문에는 오래된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종탑의 열쇠는 맞지 않았다. 연우가 장부의 울림을 따라 손잡이를 잡자 잠금쇠가 스스로 풀렸다.
골목 안에는 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어느 문에도 이름표가 없었다. 바닥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수백 개나 남아 있었지만, 바깥으로 이어지는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단비는 가까운 집의 창틀을 두드렸다. 나무가 오래되어 속이 비어 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공구 가방에서 얇은 철심을 꺼내 창문 틈으로 밀어 넣었다. 잠금쇠가 안쪽에서 걸려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 같아.”
“불이 꺼져 있는데도요?”
“먼지를 봐. 창틀은 오래됐어도 손잡이는 자주 닦였어. 누군가 안에서 살았거나, 살고 있다고 믿었을 거야.”
연우는 문 아래의 먼지를 살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간 발자국은 많은데, 밖으로 나온 발자국은 없었다. 골목 끝의 벽에는 작은 우편함이 붙어 있었다. 우편함의 이름표는 떼어졌지만 나사 자국이 네 개 남아 있었다. 단비는 자국 사이 거리를 재어 종이 조각에 옮겼다.
“이름표는 나무가 아니라 금속이었어. 누군가 떼어냈지.”
“이름만 지우면 집도 사라지는 건가요?”
“집은 그대로 있잖아.” 단비가 어두운 지붕을 가리켰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찾지 못하게 되는 거야.”
골목 안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둘은 동시에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발자국은 벽 앞에서 끝났고, 벽에는 손바닥만 한 종이 조각이 붙어 있었다. 연우가 조각을 떼자 장부의 울림이 강해졌다. 거기에는 먹으로 적은 글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문을 열어 두세요. 제가 돌아옵니다.’
단비가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그 순간 골목의 닫힌 문들 중 하나가 아주 조금 열렸다. 문틈 사이로 따뜻한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
“사람들만 잊은 게 아니야.” 연우가 말했다. “이곳의 신들도 약속을 기억하고 있어.”
“그럼 여기서 신을 찾으면, 집에 누가 살았는지도 알 수 있겠네.”
“하지만 이름이 없으면 그 신도 오래 버티지 못해요.”
연우는 첫 번째 문턱에 손을 댔다. 차가운 나무 아래에서 아주 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녜… 우리 집 문을 지켜 줘.”
그 목소리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연우는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장부에 적고, 단비에게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연우. 종탑지기 연우.”
단비가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문턱 아래의 목소리가 조금 또렷해졌다.
그 순간 골목 가장 안쪽 집의 문이 열렸다. 안쪽에 아무도 없는데도, 어둠 속에서 종이 한 번 울렸다.
연우는 귀를 막으려다 손을 멈췄다. 울림은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장부를 든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머리 안쪽에 닿았다. 종소리가 지나간 뒤 그는 잠깐 자신이 종탑에 오기 전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눈과 입의 모양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연우, 네 이름을 말해.” 단비가 다급하게 물었다.
“연우. 종탑지기 연우.”
“한 번 더.”
“연우. 이 골목에서 아녜의 이름을 찾으러 온 사람.”
그는 말할수록 기억의 빈자리가 조금씩 채워지는 듯했다. 단비는 장부 한쪽에 그의 이름을 적고, 날짜와 장소도 함께 기록했다. 이름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은 대가를 요구했다. 연우는 자신이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이제 그 종소리를 다시 듣지 마.” 단비가 말했다.
“안 들으면 이름을 찾을 수 없어요.”
“그러다 네가 누구인지 잊으면 누구를 찾을지도 잊겠지.”
연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장부를 더 꽉 쥐었다. 골목 끝에서 열린 문틈으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 불빛은 사람이 사는 집처럼 따뜻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종소리에는 지워진 이름이 섞여 있었다.
연우는 장부에 골목의 위치와 들은 문장을 기록했다. 아직 이름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처음으로 잊힌 집의 약속을 확인했다. 문은 한 번 더 삐걱였고, 안쪽의 불빛이 두 사람을 기다리듯 오래 남아 있었다.
골목 밖으로 나올 때 연우는 뒤를 돌아봤다. 문턱은 다시 닫혀 있었지만, 손잡이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온기까지 기록하려 하자 장부의 종이가 천천히 떨렸다. 그는 문을 억지로 열지 않고, 다음에 그 집을 기억하는 사람을 먼저 찾기로 했다.
단비는 골목 입구에 이름 없는 표식을 남겼다. 이곳이 비어 있다고 착각하지 않도록, 누군가 다시 찾을 자리를 표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