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4층 이웃은 발소리로 올라온다

2화: 도면에 없는 지하 4층
백다은은 문을 열지 않고, 먼저 관리실에서 건물 도면을 꺼내 왔다. 건축 연도는 1989년. 도면에는 지하 3층 펌프실과 집수정, 외부 하수관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 펌프실 안에는 도면에 없는 돌계단이 있었다.
임현수는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 문은 건물주가 막으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열 수 없어요.”
“그럼 왜 열쇠가 필요하죠?”
“문 옆의 배관함을 잠가야 해서요.”
“배관함은 문 밖에 있잖아요.”
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유라는 계단 위에서 둘을 지켜봤다.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지만 녹음 앱은 꺼져 있었다.
“이 건물에 4층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유라가 물었다.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 문을 막으라고 했죠?”
“벽돌이 올라온 게 보였으니까요.”
다은은 벽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소리는 단단하게 울렸지만, 문틀 주변은 낮은 공명을 냈다. 안쪽에 공간이 있는 소리였다. 그녀는 수분계를 벽 아래에 붙였다. 측정값이 움직였다. 벽 안쪽에 물이 고여 있었다.
“폭우가 오면 이 물이 어디로 가죠?”
“집수정으로 내려갑니다.”
“배수관은 반대쪽에 있어요. 이쪽 벽에 물이 고이면 넘쳐서 계단으로 올라옵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다은은 외부 하수관과 연결된 압력계를 열었다. 바늘이 위험 구간 가까이 있었다. 비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수위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현수에게 양수 펌프의 전원을 끄지 말라고 지시하고, 유라에게 지상으로 올라가 주민들에게 경사로를 비워 달라고 부탁했다.
“주민들을 깨우라고요?”
“아직 대피는 아니야. 물건을 계단 앞에 두지 말라고만 해.”
유라는 휴대전화를 들고 올라갔다. 현수는 짧게 웃었다. “괜히 겁을 주는 거예요.”
“압력계가 말해 주는 거예요.”
“그 기계가 정확하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작년 침수 때도 이 수치에서 물이 들어왔어요.”
“그때랑 여기가 같다는 보장은요?”
다은은 압력계를 닫았다. “없어요. 그래서 확인하는 겁니다.”
그녀는 작업등을 펌프실 벽에 걸고, 문틈에 손전등을 비췄다. 돌계단은 다섯 칸 아래에서 꺾였다. 첫 번째 발자국은 계단 중간에 있었고, 그다음은 물기가 없는 벽면에 찍혀 있었다. 맨발 모양은 아래에서 위로 향했다.
“소리가 들리면 알려 주세요.”
현수는 문에서 물러났다. “저는 들은 적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요.”
다은은 로프를 허리에 묶었다. 다른 끝은 계단 난간에 걸었다. 물이 갑자기 차오르거나 문이 닫히면 밖에서 당길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현수는 로프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혼자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유라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장갑과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네가 들어오면 안 돼.”
“저는 이 건물에 살아요. 발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아야 해요.”
“네가 할 일은 위에서 문을 지켜보는 거야.”
“또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리라는 거네요.”
다은은 유라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
“네.”
“그럼 더더욱 네가 결정해. 여기 남을지, 올라갈지.”
유라는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문 앞에 있을게요. 안으로는 안 들어가요.”
“좋아. 이상하면 로프를 세 번 당겨.”
다은은 돌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도면보다 길었다. 다섯 칸을 내려가 꺾였고, 그 뒤로 또 열한 칸이 이어졌다. 벽에는 흰 칠이 덧발라져 있었고, 그 아래서 오래된 물자국이 보였다. 맨 아래에는 좁은 철문이 있었다. 손잡이에는 녹이 슬어 있었고, 문틈에는 검은 흙이 끼었다.
그녀가 철문을 살짝 밀자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의 발자국이 하나 더 생겼다.
“유라, 로프 당기지 마.” 다은이 말했다.
“제가 안 당겼어요.” 유라의 목소리가 위에서 떨렸다.
철문 안쪽에서는 누군가 세 번 두드렸다. 물이 차오르는 소리와는 달랐다. 손바닥으로 나무를 치는 소리였다.
다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잡이를 돌리지 않고 문 아래에 수분계를 댔다. 물기는 문 안쪽에만 있었다. 도면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철문을 열면 물이 펌프실로 쏟아질 수 있었다.
“백 기사님.” 현수가 계단 위에서 불렀다. “벽 뒤에 들어가지 마세요.”
“안에 뭐가 있어요?”
“모릅니다.”
“그럼 왜 막았죠?”
“건물주가 시켰습니다.”
다은은 현수에게 물었다. “주민들은 알아요?”
“아무도 모릅니다.”
“경자 어르신은 알아요.”
현수는 잠시 침묵했다. “그분은 예전부터 여기 있었으니까요.”
다은은 그 말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배수구 뚜껑을 열고 펌프 작동음을 확인했다. 모터는 정상적으로 돌았지만 흡입이 약했다. 흡입구를 막는 게 있다. 그녀는 손전등을 철문 아래로 비췄다. 문틈으로 갈색 물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역류가 시작됐어요.”
다은은 위쪽에 있는 현수에게 펌프 호스를 집수정 반대쪽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 사이에 유라는 주민들에게 계단 앞 물건을 치우도록 알렸다. 경자는 노란 장화를 신고 나타나 라디오를 들고 있었다.
“문을 열 거니?” 경자가 물었다.
“아직은요. 물이 어디서 오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문 뒤에 우물이 있어.”
현수가 바로 끼어들었다. “그런 우물은 없습니다.”
“내 남편이 그 우물에서 일했어.”
“이제 그만하세요.”
경자는 라디오를 철문 앞에 놓았다. 잡음이 커졌다가 잦아들었다. 다은은 소리를 듣고 라디오를 옮겼다. 문 오른쪽으로 두 걸음 가자 잡음이 사라졌다. 바닥 아래에 빈 공간이 이어져 있었다.
“우물의 입구가 여기서 꺾였어요.” 다은은 바닥을 가리켰다. “벽 안쪽에 수직관이 있을 거예요.”
“그럼 물이 역류하는 곳도 거기겠네요.” 유라가 말했다.
“가능성은 있어.”
다은은 집수정 쪽으로 돌아가 흡입망을 꺼냈다. 검은 천 조각과 흙, 긴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다. 배수구를 막을 만큼 큰 물건은 아니었지만, 펌프가 물을 끌어올리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었다. 그녀는 망을 비우고 펌프를 다시 돌렸다. 모터 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수위가 내려가요?” 유라가 물었다.
“아직.”
계기판의 숫자가 조금씩 올라갔다. 물은 빠지는 게 아니라 더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다은은 벽의 수직관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한쪽은 차가웠고, 다른 쪽은 미지근했다. 온도 차이가 있는 지점에서 파이프가 갈라져 있었다.
“여기서 새고 있어요. 벽 안의 수직관이 외부 하수관과 연결된 것 같아요.”
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물의 배수관일 수 있습니다.”
“우물이 있으면 물을 빼는 배관이 있겠죠. 그런데 이 관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벽 안에서 끝납니다.”
“그럼 어디로 가는데요?” 유라가 물었다.
다은은 돌계단 아래를 바라봤다. “도면에 없는 쪽으로요.”
경자는 라디오를 안고 벽에 기대앉았다. “남편은 마지막에 물을 막으러 갔어. 그때도 건물주가 우물을 메우라고 했지.”
“언제요?” 현수가 물었다.
“이 빌라 지을 때.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남편이 안 돌아왔어. 사람들은 사고라고 했지만 시신은 못 찾았지.”
“그 얘기 처음 듣습니다.”
“네가 여기 오기 전 일이니까.”
다은은 경자의 라디오를 다시 봤다. 전원은 꺼져 있었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나온 뒤에도 잡음이 이어졌다. “남편분이 우물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경자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그날 남편이 내려갈 때 네 발자국 소리도 들었다고 했어.”
“저를 아세요?” 다은이 물었다.
“아니. 네가 어릴 적 물에 빠진 집 아이였다고만 들었지.”
현수가 경자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하세요. 기사님을 겁주지 말고요.”
“나는 물을 겁내는 사람이 아니야. 물이 사람을 데려가고도 집에 남는다는 걸 알아.”
다은은 그 말을 듣고 수분계를 내려다봤다. 계기판 수치는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펌프가 막힌 것이 아니라, 유입관 쪽의 밸브가 닫혔다. 누군가 물이 들어오는 방향을 바꿨다.
“밸브를 건드린 사람 있어요?”
현수는 답하지 않았다. 열쇠 꾸러미에 달린 긴 황동 열쇠를 손으로 가렸다.
그 순간 벽 안쪽에서 무언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물이 흐르는 소리보다 무거웠다. 문 아래로 물이 쏟아져 나왔고, 집수정의 수위가 한 번에 올라갔다. 다은은 펌프 전원을 확인하고, 모두에게 계단 위로 물러나라고 외쳤다.
갑자기 조명이 꺼졌다. 비상등이 켜지기 전까지 계단은 어둠에 잠겼다. 그 틈에서 발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나, 둘, 셋. 이번에는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현수가 누군가를 막으려 몸을 세웠다. “경자 어르신, 위로 올라가요!”
“내가 이 우물에서 남편을 보냈어.” 경자가 말했다. “이번엔 내가 내려가 볼 거야.”
다은은 손전등을 켰다. 계단 아래에 젖은 발자국이 하나 더 생겨 있었다. 발끝은 철문이 아니라 경자를 향하고 있었다.
“어르신, 그만.”
경자는 멈췄지만, 라디오 소리는 계속 커졌다. 낡은 스피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경자야, 이번엔 혼자 오지 마.”
경자의 얼굴이 무너졌다. 다은은 손전등을 라디오에서 떼어 철문에 비췄다. 문 안쪽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물 위로 올라왔다.
그 그림자는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맨 위 계단에는 물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