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건축가의 빈집 수리법

3화: 돌려줄 수 없는 원고
건우는 공사 시작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왔다. 벽을 열기 전 최종 구조 점검을 하고, 절개 범위를 다시 표시했다. 문식의 법률대리인 통지서가 도착한 이상, 상자의 소유권을 확인하지 않고 진행할 수 없었다. 건우는 절차상 멈춰야 할 작업과 집주인의 동의로 가능한 보수 범위를 구분했다.
“벽판을 열지 않고 외부 균열만 보수할 수 있습니다.”
“그럼 상자는 계속 남겠죠.” 노을이 말했다.
“소유권을 확인할 때까지는요.”
“편지는 보낼 수 있니?”
“주소를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어요. 상대가 연락을 원하지 않으면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노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식은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변호사가 전화로 공사 전면 중단을 요구했다. 건우는 계약에 적힌 긴급 보수만 계속하고 벽 개봉은 보류하겠다고 답했다. 그 말은 노을의 뜻을 따르면서도 분쟁을 키우지 않는 선택이었다.
이담은 서류를 다시 읽었다. 상자에 든 번역 원고가 문식의 이름으로 저작권 등록된 기록은 있었다. 하지만 등록이 곧 소유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사자가 원고를 맡겼는지, 문식이 대신 등록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오래된 문서에는 수신인으로 ‘김서정’이 적혀 있었다. 집의 이전 거주자 명부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정식 조회가 필요했다.
“신청서를 넣으면 얼마나 걸리죠?” 노을이 물었다.
“보통 일주일 이상이요. 급한 절차가 아니라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기다렸겠지.”
“누구를요?”
“내가 편지를 보내기를.”
이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을은 그때의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과거를 다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맡긴 원고를 돌려받을지 말지 스스로 고를 기회를 주는 일이었다.
건우는 집의 도면을 새로 그렸다. 벽을 열지 않은 상태에서 통풍을 개선하고, 문제가 있던 창틀을 보강했다. 이 작업은 매매 일정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끝낼 수 있었지만, 건물 조카는 추가 비용을 부담하지 않겠다고 했다. 건우는 원래 견적에 없는 일을 무상으로 맡을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조카는 벽을 열지 않은 이유가 노을의 감정 때문이라며 계약 해지를 언급했다.
“계약을 해지한다면 정산 기준에 따르겠습니다. 다만 안전 점검 결과와 동의 기록은 모두 전달하겠습니다.”
조카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전화를 끊었다. 건우는 손바닥으로 도면을 눌렀다.
“이 일을 계속 맡고 싶으세요?” 이담이 물었다.
“맡고 싶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이 아닌 사람의 요구를 따라가면서까지는 아닙니다.”
“처음에는 노을 선생님 동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네. 그분의 조카와 계약을 했으니 조카가 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의 범위를 더 확인했어야 했어요.”
건우가 자기 판단을 인정하자 이담은 조금 안도했다. 그는 서류를 다시 검토하고, 조카가 가진 대리 권한과 노을의 의사를 확인했다. 노을에게 판단 능력이 부족하다는 근거는 없었다. 법적 대리권을 가진 사람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문식의 통지서는 권리 주장을 담았지만 법원 결정은 아니었다.
사흘 뒤, 보존 자료 담당자에게 답변이 왔다. 김서정은 현재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고, 연락처 전달에 동의했다. 이담은 편지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과거 맡긴 원고를 돌려받을 의향이 있는지 묻는 연락을 보냈다. 답장은 하루가 지나서 왔다.
원고를 돌려받고 싶습니다. 다만 강문식 씨를 통해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원고가 제 것이라는 확인 자료를 먼저 보고 싶습니다.
노을은 답장을 읽고 한참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이 아직 내 편지를 기억할까?”
“편지 얘기는 꺼내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원고를 돌려주는 일부터 처리해도 될까요?”
“그래. 그건 그 사람의 권리니까.”
이담은 문식에게도 사실을 알렸다. 그는 원고를 돌려주면 자신에게 손해가 생긴다며 반대했다. 원고가 자신을 위해 번역된 자료이고, 누나의 집에 보관하도록 허락했다고 주장했다. 이담은 법률대리인과 함께 소유권 자료를 확인하자고 제안했다. 문식은 만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며칠 뒤 과거 우편 목록과 원고 작업료 영수증을 보냈다. 영수증에는 의뢰인이 김서정으로 적혀 있었고, 비용은 노을이 대신 지불했다. 원고의 소유권을 문식에게 넘긴다는 내용은 없었다.
“왜 자기 것이라고 했을까요?” 건우가 물었다.
“그 사람이 누나를 대신해 보호하려 했던 것 같아요.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살아서, 지금도 자기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그렇다고 권리가 생기지는 않지만요.”
“맞아요.”
문식은 공식 서류를 확인한 뒤 소유권 분쟁을 철회했다. 다만 누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고 했다. 노을은 그 선택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아꼈지만, 오래된 보호 방식이 관계를 망가뜨린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벽을 여는 작업은 김서정의 동의를 확인한 뒤 진행됐다. 노을은 현장에 함께 있었고, 건우는 절개 전에 구조를 다시 설명했다. 나무판을 떼자 작은 납작한 상자가 나왔다. 안에는 원고 뭉치와 낡은 실이 감긴 책갈피, 그리고 봉투 하나가 있었다. 이담은 먼저 물었다.
“봉투도 열까요?”
노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편지야. 태우지는 말고, 내게 줘.”
이담은 봉투를 노을에게 건넸다. 노을은 겉면의 글씨를 오래 바라본 뒤 자기 가방에 넣었다. 김서정에게는 원고만 돌려주기로 했다. 건우는 원고의 상태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보존 상자에 넣었다. 복원 목재는 원래 벽판과 구분되게 표시해 다음 사람이 수리 흔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그 주말, 이담은 김서정에게 원고를 전달했다. 두 사람은 카페에서 만났지만, 노을은 오지 않았다. 서정은 페이지 수를 세고, 일부에 자신의 필체가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원고는 오랫동안 습기를 먹어 모서리가 상했지만, 글은 대부분 읽을 수 있었다.
“노을 씨가 편지를 썼나요?” 서정이 물었다.
이담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분은 편지를 돌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원하시면 직접 전달할 수도 있고, 우편으로 보내 드릴 수도 있어요.”
“그 편지를 받고 싶다고 하면, 그분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건 제가 대신 답할 수 없습니다.”
서정은 원고를 가방에 넣었다. “편지는 지금 받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노을 씨에게 전해 주세요. 제 번역을 잘 보관해 줘서 고맙다고.”
그 말만 전달하겠다고 이담은 약속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건우에게 만남의 결과를 설명했다. 건우는 원고가 온전했는지 물었고, 이담은 대부분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수리 작업은 새 목재를 끼워 벽을 복원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건우는 벽의 한 구석을 약간 다르게 마감해 나중에 보수한 자리가 드러나도록 했다. 조카는 매매 일정을 이유로 처음엔 반대했지만, 구조 보고서와 작업 비용을 확인한 뒤 동의했다. 집은 팔릴 예정이었고, 노을은 요양원으로 옮겼다. 집이 누구에게 넘어가든 벽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록은 남았다.
떠나는 날, 노을은 이담에게 편지를 건넸다. “이건 보내지 않을 거야. 내가 쓴 말이니까 내가 가지고 있을래.”
이담은 봉투를 받아 들지 않았다. “선생님이 보관하시면 됩니다.”
“네가 기록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록을 남기는 것과 제가 가져가는 건 달라요.”
노을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건우가 대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담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집 수리와 무관한 약속이라고 덧붙였다. 이담은 좋다고 답했다. 마음을 확인하려 서두르지는 않았다. 둘은 집을 떠나며 벽의 보수 사진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수리된 벽에는 새 목재의 색이 보였다. 감춰 둔 것을 모두 드러내지 않고도, 집은 다음 사람에게 넘어갈 준비를 마쳤다.
그날 저녁 이담에게 서정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원고 끝에 노을 씨에게 쓴 답장 초안이 있었습니다. 보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가 직접 연락해도 되는지 물어봐 주세요.
이담은 노을에게 전달하기 전, 그 질문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노을은 답장을 쓰지 않았다. 잠시 뒤 그녀는 이담에게 말했다.
“연락처를 전해 줘. 답은 내가 직접 할게.”
이담은 두 사람의 번호를 서로 허락받아 전달했다. 몇 분 뒤 벽 너머처럼 조심스러운 문자 한 통이 오갔다. 서정은 이름을 불렀고, 노을은 늦었지만 안부를 물었다. 다음 이야기는 그들이 정할 몫으로 남았다.
공사가 끝난 뒤 건우는 벽 수리 기록을 집의 보수 장부에 넣었다. 자른 목재의 위치, 사용한 재료, 복원 사진을 남겨 새 주인이 추후 벽을 다시 열 때 이유와 절차를 알 수 있게 했다. 이담은 편지와 원고의 기록을 별도 보관했다. 한 문서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봉투마다 열람 권한을 표시했다.
건우는 “기록을 남기면 언젠가 누군가 또 열어 보려 하겠죠”라고 걱정했다.
“그래서 권한과 이유를 같이 적었어요. 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열기 전에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를 남긴 거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에서 오래된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노을은 집을 떠났고, 집은 새 주인을 기다렸다. 이담은 그 집이 다시 비어 있는 동안에도 아무도 허락 없이 벽을 열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