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교수님의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어서

7화: 기억이 가리킨 파장
닫힌 문 너머의 발소리
문밖에서 멈췄던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바닥을 스치던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연구실에는 숨소리조차 돌지 않았다. 마렐은 문틈을 살피던 시선을 거두며 낮게 속삭였다.
“……갔어. 기록실의 회색 조끼 조교야.”
마렐은 보온 상자를 닫으며 반납표 모서리를 가리켰다.
“새벽 다섯 시 십팔 분. 제3공명연구실. 일반 대여표에는 이런 붉은 칸이 없어. 부학장실이 장비 출납을 감시할 때 찍는 번호야.”
에르반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바엘의 예비 감사가 깨졌다. 부학장실이 손을 놓을 리 없지.”
“그렇다고 제 친구의 대여표에 손을 대는 건 부당합니다.”
리에트가 차분하게 반박했다.
“마렐은 정규 절차로 빌려왔습니다. 붉은 표식이 붙었다는 건 재료실과 기록실이 이미 세드릭 측에 장악됐다는 뜻이에요.”
“장악 여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에르반이 탁자 위의 측정 기록지들을 정리했다.
“여덟 시가 되면 마도학부 정기 점검반이 돈다. 바엘의 실패 보고서가 부학장 책상에 오른 이상 규정을 앞세울 거다. 비인가 장비 연결 의혹을 핑계로 공명핵을 임시 봉인하겠지.”
공명핵 봉인. 그 말이 떨어지자 서늘한 긴장감이 연구실을 짓눌렀다. 공명핵이 묶이면 어떤 재현 실험도 할 수 없었다.
“원자료 사본 세 부를 즉시 분산해야 합니다.”
리에트가 기록지들을 나누었다. 마렐이 한 부를 집어 들었다.
“내 건 보온 상자 이중 바닥에 숨길게. 지금 기록실로 가서 원본 대여표부터 수습할게. 서명이 꼬투리 잡히기 전에 정리해야 해.”
“조심해. 누가 물으면 영점 교정 재확인이라고 둘러대.”
“내가 알아서 해.”
마렐은 사본과 클램프를 챙겨 복도로 나갔다. 리에트는 두 번째 사본을 가죽 장부 내피에 숨겼다. 겉면을 덮자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에르반은 세 번째 사본을 벽면 금고에 넣고 잠갔다.
벽시계의 분침은 일곱 시 십이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점검반이 오기까지 사십 분 남았다.”
에르반이 중앙 작업대로 돌아섰다.
“그전에 주 공명대 결합 실험을 끝낸다.”
동심원의 결합
리에트는 에르반의 앞을 막아섰다.
“결합 실험이라니요? 방금 마렐과 확인한 건 단독 고리의 열 변위였습니다. 주 공명대와 세 고리를 연계하는 건 전혀 다른 실험입니다.”
“단독 고리의 자료만으로는 표준식을 뒤집지 못해. 주 공명핵의 출력선에서 세 고리가 공진할 때 생기는 위상 꼬임을 증명해야 반박 논문이 성립한다.”
에르반의 눈에는 서늘한 집중력이 번뜩였다.
“앞서 꺼낸 보정 계수를 적용하면 1단계 공진의 편차를 완충선으로 유도할 수 있다.”
“검증되지 않은 봉인 수식을 주 공명핵에 바로 올리는 건 너무 위험해요.”
“그래서 네가 필요하다.”
에르반이 리에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네 감각은 계측 침보다 빠르다. 편차가 완충 한계를 넘는 순간을 짚어내라. 즉시 차단하겠다.”
리에트는 입술을 다물었다. 물러선다면 연구실은 봉쇄당하고 조작된 실패 보고서만 남게 된다.
“조건이 있습니다.”
리에트가 가죽 장부를 펼쳤다.
“첫째. 기저 공명 1단계와 증폭 공명 2단계까지만 진행합니다. 최대 출력은 절대 불가합니다.”
“좋다.”
“둘째. 위상 편차 누적이 0.06마크를 넘거나 제가 차단을 요구하면 이유를 묻지 않고 2초 안에 차단석을 내립니다. 어제 바엘 선임연구원의 단자가 터질 때 보셨잖습니까. 서명하십시오.”
에르반은 깃펜을 들어 장부 아래에 서명했다.
‘에르반 루센. 비상 차단 조건 동의.’
에르반이 작업대 중앙의 두꺼운 벨벳 천을 걷어냈다. 원형 판 위에 세 동심원 궤도가 새겨진 주 공명대였다.
에르반이 차폐함에서 청색 수정핵을 꺼내 거치대에 물렸다. 정규 2등급 공명핵이었다. 맑은 마력 파동이 은빛 궤도를 타고 번져 나갔다.
“고리 장착해.”
리에트는 세 개의 은합금 고리를 동심원 궤도에 결합했다. 네 번째 단자마다 저온 계측선이 물렸다.
“접지선 연결 완료. 완충 회로에 보정 계수 1.03 설정.”
에르반이 주 전원 레버를 잡았다.
“1단계 기저 공명 펄스 인가한다.”
철컥.
수정핵이 빛을 뿜으며 회전했다. 푸른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낮고 일정한 구동음과 함께 제1고리와 제2고리가 공명했다. 계측기 바늘이 0.012마크 부근에 얌전하게 멈췄다.
“고리 간 위상차 0.012마크. 정상 범위입니다.”
보정 계수 1.03이 작동하며 잉여 편차가 완충 공간으로 분산되는 듯했다.
에르반의 입가에 옅은 만족감이 스쳤다.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리에트의 손가락은 장부 위에서 굳었다.
귓가에 미세한 마찰음이 걸려들었다. 겉보기 파형은 안정적이었지만 고리 안쪽에서 마력 입자들이 서로를 밀어내며 맴돌았다.
편차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보정 회로 안에 억지로 갇힌 채 압축되고 있었다.
“교수님. 뭔가 이상합니다.”
“수치는 안정적이다. 초기 노이즈일 뿐이야.”
“편차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안쪽으로 말려들고 있어요.”
관자놀이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번졌다. 그러나 에르반은 이미 2단계 레버로 손을 뻗었다.
“완충 한계를 확인한다.”
“기다리십시오!”
철컥. 레버가 두 번째 단에 꽂히는 순간 수정핵이 섬뜩한 빛을 뿜었다.
뼛속을 파고든 진동
폐부를 짓누르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1초도 지나지 않아 침묵은 고막을 찢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키이에에엑!
청색 빛이 순식간에 탁한 백청색으로 뒤틀렸다. 세 고리가 요동치며 차폐벽에 불꽃을 튀겼다. 계측기 바늘이 한계선을 뚫고 0.12마크로 치솟았다.
“위상 간섭 역류! 보정 회로가 포화됐다!”
에르반이 레버를 당기려 했지만 역류한 마력장에 흡착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차단 레버가 고착됐다!”
에르반의 외침은 리에트의 귀에 닿지 않았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뇌를 강타하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코끝에서 피 냄새가 번졌다.
하지만 통증보다 리에트를 집어삼킨 것은 온몸의 뼈마디를 얼어붙게 만드는 기괴한 진동이었다.
쿠구구구궁.
피부의 솜털이 곤두서고 심장 박동이 마력 파동에 강제로 묶였다.
차가웠다. 뼛속까지 시려 오는 메마르고 파괴적인 파장.
기억이었다.
십 년 전의 그날. 어머니의 연구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어린 리에트의 전신을 관통했던 바로 그 진동이었다.
유리 파편 사이로 흩날리던 백색 먼지. 어머니의 늘어진 손끝 너머에서 울부짖던 핵심석.
어머니의 숨을 멎게 만들었던 그 저주스러운 공명의 감각이 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눈앞에서 똑같이 울리고 있었다.
사람의 마력 회로를 안쪽에서부터 비틀어 찢는 잔혹한 역류였다.
“리에트! 엎드려!”
은합금 고리들이 하얗게 달아오르며 차폐벽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갈라졌다. 3초면 연구실 전체가 날아간다.
‘도망쳐. 저건 손을 대면 안 돼.’
어린 날의 기억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리에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입술을 짓씹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지만 지금은 연구자였다.
“도망치지 않아……!”
리에트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감각을 곤두세우자 역류하는 마력의 흐름 속에서 가장 취약한 접점이 보였다. 공명대 하부의 2차 비상 접지선이었다.
그녀는 작업대 아래로 몸을 던졌다. 달아오른 파편이 뺨을 스쳤지만 붉은색 비상선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안전 중단! 차단선 뽑습니다!”
온 체중을 실어 비상선을 거칠게 뽑아냈다.
콰드득! 구리 접점이 뜯겨 나가며 파란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에르반이 바닥의 비상 차단석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정지해라!”
콰아아앙! 마지막 폭음이 터져 나갔다.
차단석의 무게
백청색 빛이 사그라들었다.
모든 소리가 멎었다. 연구실 안에는 가쁜 숨소리만 헐떡였다.
냉각수 증기가 작업대를 채웠고 오존 냄새와 탄내가 코를 찔렀다.
리에트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손바닥은 그을렸고 손끝은 떨렸다. 인중을 타고 흐른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야가 돌았지만 코피를 훔쳐내고 가죽 장부에 깃펜을 눌러썼다.
‘07시 48분. 2단계 증폭 공명 중 위상 역류 발생. 긴급 비상 차단선 분리 및 주 차단석 강제 작동으로 정지.’
기록을 마친 리에트가 고개를 들었다.
공명대 맞은편에 에르반이 주저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은발과 찢겨 나간 소매보다 리에트의 숨을 멎게 한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오만하던 교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셔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눈동자는 바닥에 뒹구는 공명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술적 분노가 아니었다.
원초적인 공포. 그리고 지독한 죄책감.
과거의 참상을 눈앞에서 다시 목격한 사람처럼 에르반은 입술을 떨고 있었다.
“……위상 붕괴…….”
청색 수정핵은 빛을 잃었다. 표면에는 가느다란 검은 균열선이 세 줄기 새겨져 있었다. 내부 마력이 뒤틀려 깨진 비가역적 파손이었다.
리에트는 벽을 짚고 일어섰다. 뼛속에 남은 진동의 잔향을 억누르며 에르반의 앞에 섰다.
“교수님.”
에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르반 루센 교수님.”
그제야 에르반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리에트를 향했다. 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 공명식은 대체 뭡니까?”
리에트의 서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단순한 다중 공명이 아닙니다. 보정 계수를 넣었는데도 위상이 안쪽으로 꼬이며 제어계를 통째로 먹어 치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파장. 이 차갑고 메마른 진동. 교수님은 알고 계셨죠.”
에르반의 숨이 턱 멎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제 감각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이 파장은 사람이 견딜 수 있는 마력의 흐름이 아닙니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리에트의 눈동자는 에르반의 흔들리는 눈빛을 똑바로 꿰뚫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폭주가 어떤 참극을 부르는지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에르반은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일어났다. 그는 리에트의 시선을 피하며 벨벳 천으로 깨진 공명핵을 거칠게 감쌌다.
“실험은 끝났다. 지금 당장 계측기를 끄고 잔해를 치워라.”
“교수님!”
“질문하지 마!”
에르반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목에 핏대가 선 목소리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자의 비명 같았다.
“데이터는 봉인한다. 누구에게도 이 실험에 대해 발설해서는 안 된다.”
그는 공명핵을 품에 안고 암호 금고로 향했다.
그때 복도 멀리서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침 여덟 시 정기 점검반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쏠렸다.
에르반은 금고 문을 닫더니 출입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손이 육중한 철제 빗장을 낚아챘다.
철컥.
무거운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연구실에 울렸다.
다가오는 점검반의 발소리를 등진 채 에르반은 낮게 읊조렸다.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는다.”
그것은 감사를 막기 위한 방어가 아니었다.
자신이 마주한 과거의 망령을 문밖으로 내쫓기 위해 연구실 전체를 틀어막는 자의 처절한 봉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