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천재 교수님의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어서5화

천재 교수님의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어서

천재 교수님의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어서

AD
스폰서 광고

5화: 새벽 실험의 첫 번째 규칙

자정에 시작하는 노동

리에트는 연구실 문을 닫자마자 두꺼운 가죽 장부를 펼쳤다.

창밖 복도에는 아직 학생들의 발소리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제3공명연구실 안쪽은 밤의 색으로 가라앉았다. 작업대 위 수정등 세 개만이 푸른빛을 뿜었다.

그녀는 첫 줄에 날짜와 시각을 적었다.

‘23시 52분. 제3공명연구실 입실.’

에르반이 계산 노트에서 눈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자정부터라고 했다.”

“준비 시간도 연구 노동입니다.”

리에트는 장부를 그에게 돌려 보였다. 시각 아래에는 항목을 세 칸으로 나누어 적었다.

‘실험 준비. 계측. 자료 정리.’

“오늘은 같은 조건을 세 번 확인한다. 공명대 청소와 창고에서 예비 고리를 가져오는 일도 네가 해.”

“청소는 연구실 관리 항목입니다. 예비 고리 운반은 장비 준비 항목으로 기록하겠습니다. 다만 지시자와 사용 목적을 적어 주세요.”

에르반의 손끝이 계산지 위에서 멈췄다.

“너는 장부를 쓰러 온 건가?”

“연구를 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연구했는지 남기려는 겁니다.”

“결과만 남으면 충분하다.”

“결과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면 재현할 수 없습니다. 재현할 수 없는 결과는 교수님의 명성도 지켜 주지 못합니다.”

리에트는 낡은 천을 집어 들었다. 공명대 외곽을 닦자 은빛 가루가 묻어 나왔다. 낮에 터진 고리의 잔해였다. 그녀는 가루가 묻은 천을 별도 접시에 올리고 무게를 적었다.

‘23시 58분. 기존 잔해 제거. 잔해량 0.7그램.’

“그것까지 적나?”

“오염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쓸데없이 꼼꼼하군.”

“쓸데없는 일인지 확인하는 데 필요한 기록입니다.”

에르반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봉인된 서랍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작업대 위에 놓았다.

“창고 세 번째 선반. 은합금 고리 두 개와 저온계 하나.”

리에트는 열쇠를 집기 전에 장부의 지시자 칸을 가리켰다.

“교수님 지시. 장비 준비. 12분 예상.”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가 아니라 확인 서명입니다.”

에르반의 푸른 눈이 장부와 리에트 사이를 오갔다. 그는 한참 뒤에야 작은 서명을 남겼다.

리에트는 그 아래에 정확히 시각을 적었다.

‘00시 01분. 장비 수령 시작.’

누구도 이 연구실에서 밤의 시간을 세지 않았다. 리에트는 그 규칙을 처음부터 바꾸기로 했다.

두 번째 펄스의 안쪽

자정이 지나자 에르반은 공명대 중앙에 새 은합금 고리를 고정했다. 고리의 네 단자는 낮에 폭발한 것과 같은 위치에 놓였다.

리에트는 저온계를 접합부 옆에 세우고 유리판에 기준값을 적었다.

“고리 표면 온도는 18.2도. 접지선의 초기 위상은 기준선과 0.01마크 차이입니다.”

“그 정도는 오차 범위다.”

“그래서 분리해 기록합니다.”

그녀는 계측기 눈금과 자신의 관찰값을 나란히 적었다. 에르반은 보정 나사를 돌려 계측 침을 영점에 맞췄다.

“첫 번째 펄스.”

푸른 빛이 고리 안쪽을 한 바퀴 돌았다. 낮의 폭발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계측기 침도 안정적으로 흔들렸다.

리에트는 손가락을 고리 가까이에 가져갔다. 피부 아래로 가는 진동이 스며들었다. 편차 감응이 일어났다. 표면은 평온했지만 고리 안쪽 깊은 곳에 얇은 이질감이 남아 있었다.

“잔류 편차 0.04마크.”

“계측기는 0.01이다.”

“표면값과 내부 잔류값은 다릅니다. 지금은 추정치로 적겠습니다.”

“추정치를 데이터로 만들 수 있나?”

“두 번째 펄스 뒤에도 같은 방향으로 남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에르반은 마력 제어간에 손을 올렸다. 그의 눈길이 리에트의 장부로 향했다.

“계속해.”

두 번째 펄스가 들어갔다. 이번에는 고리 안쪽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계측기 바늘은 한계선 아래에서 떨었지만 저온계의 숫자는 빠르게 올라갔다.

리에트의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얇은 선 하나가 고리 안쪽에서 접지선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것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네 번째 단자 뒤에 고였다.

“중단하십시오.”

에르반의 손이 세 번째 레버 위에서 멈췄다.

“아직 세 번째 펄스가 남았다.”

“두 번째 펄스 뒤 접지선 온도가 허용선의 92퍼센트에 도달했습니다. 세 번째 펄스를 넣으면 낮의 파손 조건을 재현하게 됩니다.”

“그게 목적이다.”

“아닙니다. 지금은 기준값이 어긋난 고리입니다. 이 상태에서 폭발시키면 표준식의 결함과 장비 오염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에르반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폭발을 겁내는 연구자는 결론을 얻지 못한다.”

“오염된 결론을 거부하는 연구자는 다음 결론을 얻습니다.”

리에트는 장부에 손을 얹었다. 손끝은 떨렸지만 글씨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00시 47분. 2차 펄스 후 안전 중단. 접지선 온도 허용치 92퍼센트. 0.04마크 잔류 편차 반복 확인.’

“중단 권한은 실험 담당자에게 있습니다. 공동 연구 제안서에 적혀 있습니다.”

에르반은 제안서를 펼쳤다. 잉크가 번진 문장 아래에 두 사람의 서명이 나란히 남아 있었다.

“문장을 외웠군.”

“기록할 권리를 지키려면 계약도 읽어야 합니다.”

에르반은 레버에서 손을 뗐다. 리에트는 즉시 차단석을 눌렀다.

폭발은 없었다. 대신 두 번째 펄스 뒤에 남은 수치가 장부와 측정지에 고스란히 남았다.

에르반은 계측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표면 온도와 리에트가 적은 관찰값을 번갈아 보았다.

“내부 잔류값을 어떻게 알았지?”

“첫 번째 실험에서 열이 퍼지는 방향을 계산했습니다. 두 번째에는 그 계산을 확인한 겁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도 아니었다.

에르반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계측지 한쪽에 짧은 숫자를 추가했다.

‘반복 필요. 동일 조건 세 번.’

두 번째 고리에서는 1차 펄스 뒤에도 0.04마크에 가까운 잔류가 남았다. 2차 펄스 뒤에는 0.08마크에 해당하는 누적량이 관찰값으로 기록되었다. 세 번째 고리에서도 같은 방향의 잔류가 확인되자 에르반은 이번에도 세 번째 레버에 손을 대지 않았다.

“폭발하지 않았군요.”

“중단했으니까.”

“그것도 결과인가?”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보여 주는 결과입니다.”

에르반은 측정지 모서리에 확인 서명을 남겼다. 리에트는 그 옆에 자신의 서명을 적었다.

봉인된 숫자

새 고리를 꺼내기 전까지 두 사람은 십 분 동안 말없이 장비를 식혔다. 리에트는 중단 시각과 냉각 시간을 적고 첫 측정지 뒷면에 고리의 방향을 그렸다.

에르반은 봉인된 서랍 앞에 섰다.

“보정값이 필요하다.”

“어떤 보정값입니까?”

“초기 공명핵의 위상 지연값.”

“봉인 자료에 있습니까?”

“있을 수도 있다.”

그는 열쇠를 꽂았다. 리에트는 서랍 앞에 기록지를 펼쳤다.

“자료 제목과 열람 시각을 먼저 적겠습니다. 수치를 바꾸려면 수정선을 남겨 주세요.”

“내 서랍을 열 때도 허가를 받아야 하나?”

“허가가 아니라 흔적입니다. 원자료를 본 사람이 누구인지 남기는 절차입니다.”

에르반은 잠금 장치를 풀었다. 서랍 안에는 검은 천으로 감싼 노트 세 권과 은빛 봉인판이 놓여 있었다. 리에트는 제목만 확인했다.

‘다중 공명 초기 실험 기록.’

첫 단어를 읽는 순간 어머니의 기록장에서 보았던 낯선 기호가 떠올랐다. 하지만 표지는 닫혀 있었고 에르반의 손이 그 위를 덮었다.

“그건 제외한다.”

“제목만 기록하겠습니다.”

“내용을 묻지 않는군.”

“지금은 공개된 자료만으로 데이터셋을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하는 중입니다.”

리에트는 봉인 노트의 번호와 열람자를 적었다. 에르반은 얇은 계산지 한 장에 위상 지연 0.02와 보정 계수 1.03을 옮겼다. 나머지는 그의 손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수치를 기준값으로 사용하실 겁니까?”

“네가 기록한 값과 비교한다.”

“계산지 사본을 남겨 주세요.”

“원본을 보면 됐지.”

“공동 연구의 원자료는 양쪽이 열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르반은 얇은 계산지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리에트는 사본을 만들고 원본의 위치를 적었다. 봉인판은 다시 제자리에 놓였다.

두 번째 고리의 측정값에 보정 계수를 적용해도 잔류 방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 번째 고리까지 같은 경향을 보이자 에르반도 표준식의 결함이 단순한 장비 오차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명으로 남은 새벽

새벽 네 시가 지나자 연구실 바닥에는 식힌 고리 세 개와 기록지 아홉 장이 놓였다. 에르반은 마지막으로 장비를 정리하라는 듯 턱짓했다.

“세척하고 전사해.”

“몇 시까지입니까?”

“끝날 때까지.”

“그렇게는 기록할 수 없습니다.”

리에트는 장부를 펼쳐 네 개의 항목을 나누었다.

‘실험 00시 18분부터 01시 02분.’

‘냉각 및 오염 확인 01시 02분부터 01시 29분.’

‘반복 계측 01시 29분부터 03시 46분.’

‘원자료 정리 및 장비 세척 03시 46분부터 현재.’

“세척은 연구가 아니다.”

“세척하지 않은 고리는 다음 실험의 오염원이 됩니다. 측정지를 날짜와 장비 번호별로 묶는 일도 재현에 필요합니다.”

“너는 모든 일을 연구라고 부르는군.”

“연구에 필요한 일과 필요하지 않은 일을 구분해서 적는 겁니다.”

에르반은 장부를 빼앗지 않았다. 그는 고리 표면을 닦던 리에트의 손을 바라보았다. 잉크가 번진 손가락 끝에 금속 가루가 달라붙어 있었다.

“오늘 확보한 자료로 학회에 제출할 수 있나?”

“재현 전 단계의 데이터셋으로는 가능합니다. 다만 독립 계측이 필요합니다.”

“마렐 오르티스에게 맡겨.”

“제가 먼저 요청하겠습니다.”

리에트는 마지막 세척 시간을 적은 뒤 에르반에게 장부를 내밀었다.

“확인 서명해 주세요.”

“내가 네 출퇴근을 증명할 이유는 없다.”

“출퇴근표가 아닙니다. 공동 연구 기여도 기록입니다. 교수님이 서명하지 않으시면 오늘 밤의 계측도 제가 혼자 수행한 것으로 남깁니다.”

“협박인가?”

“분류입니다.”

긴 침묵 끝에 에르반이 펜을 들었다. 그는 각 항목의 시작과 끝을 확인한 뒤 가장 아래에 서명했다.

‘에르반 루센. 기록 확인.’

짧은 한 줄이었다. 리에트에게는 폭발한 고리보다 무거운 증거였다.

그녀는 장부를 닫고 별도의 쪽지에 필요한 물품을 적었다.

‘저온 계측 클램프 한 개. 보온 상자 한 개. 새벽까지 버틸 식사.’

수신인은 마렐 오르티스로 정했다. 리에트는 아침 수업에 가는 기록실 조교에게 쪽지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할 문장을 덧붙였다.

에르반이 쪽지를 흘끗 보았다.

“식사도 연구 장비인가?”

“연구자를 움직이는 장비입니다.”

“다음에는 졸지 마라.”

“다음에는 교수님도 세 번째 펄스를 함부로 넣지 마십시오.”

새벽 다섯 시 십 분. 리에트는 장부 마지막 줄에 퇴실 예정 시각을 적었다. 폭발하지 않은 실험도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연구실의 밤을 견디는 첫 번째 규칙은 오래 깨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남기는 일이었다.

문을 나서기 전 리에트는 에르반의 서명 아래 자신의 이름을 한 번 더 적었다.

이번에는 그 누구의 조교라는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