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교수님의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어서

4화: 오류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불청객의 감사장
문이 열리는 순간 복도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낯선 구두 소리가 연구실 안으로 밀려들었다.
앞장선 이는 세미나실 구석에서 차가운 눈으로 사본을 챙겨 갔던 기록실의 회색 조끼 조교였다. 하지만 그의 뒤를 따라 들어선 인물은 조교가 아니었다. 짙은 남색 예복 깃에 선임연구원 금장을 단 사내와 철제 모서리가 덧대어진 서류함을 든 조수가 연구실 바닥을 짓밟듯 걸어 들어왔다.
“에르반 루센 교수님. 그리고 리에트 벨로아 조교.”
선임연구원이 턱을 치켜들며 걸음을 멈췄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문양은 마도학부 부학장실 직속 연구진의 표식이었다.
리에트는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까 세미나실 맨 앞줄에서 0.04마크의 편차는 단순한 재료 오차일 뿐이라며 헛기침을 뱉어 내던 인물, 바엘 선임연구원이었다.
“학부 기록실과 부학장실의 합동 통지다. 아침 세미나에서 보고된 3중 공명식 관련 초고의 원자료 일체와 실험 장치를 즉시 보존 조치하겠다.”
바엘이 손짓하자 조수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서류함을 열었다. 안쪽에는 붉은 압류 딱지와 금박 인장이 찍힌 양식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에르반은 여전히 봉인된 서랍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사본은 이미 기록실에 남겼다. 원자료는 정식 심사 전까지 작성자의 동의 없이 반출할 수 없다.”
“규정을 오해하시는군요, 에르반 교수님.”
바엘이 입꼬리를 비틀며 서류 한 장을 빼들었다.
“이건 단순한 열람 요청이 아닙니다. 학부의 사전 승인도 없이 독단적으로 위험한 공명 실험을 강행하고 학부 표준 공명식의 결함을 주장하며 학내 질서를 어지럽힌 혐의에 대한 예비 감사 통지서입니다.”
그는 시선을 리에트에게 돌렸다. 장학생 출신의 신임 조교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배어 있었다.
“에르반 교수 밑에 새로 들어온 조교가 겁도 없이 날뛴다더니 바로 너였군. 세드릭 부학장님께서 수년간 정립하신 표준 접지식에 따르면 0.05마크 미만의 미세 편차는 자연 방전으로 해소된다. 제3고리가 깨진 건 네 녀석이 마력 주입 속도를 제어하지 못해 벌어진 조작 미숙일 뿐이야.”
학술적 반론이 아니었다. 리에트의 초고를 규정 위반의 증거로 둔갑시켜 자료를 통째로 빼앗고 입을 틀어막으려는 정치적 압박이었다.
리에트는 에르반의 뒤에 숨지 않았다. 그녀는 작업대 위에 놓여 있던 두꺼운 마도학부 연구 윤리 규정집을 짚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도학부 연구윤리규정 제14조 2항을 확인하셨습니까?”
바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예비 감사 및 원자료 보존 조치는 학부 위원회의 정식 소집 의결서가 첨부되어야 효력이 발생합니다. 선임연구원님이 들고 계신 통지서에는 부학장실 직인만 찍혀 있군요. 학부 위원장인 학장 서명이 빠진 통지서는 행정 권한이 없는 권고문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임의 압류는 연구 방해 행위에 해당합니다.”
리에트의 음성은 떨림 없이 평온했다. 밤을 새우며 조교 계약서의 독소 조항을 파헤치던 손길로 학부 규정집까지 모조리 훑어 둔 덕분이었다.
회색 조끼 조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바엘의 미간에도 깊은 주름이 잡혔다.
“조교 주제에 감히 감사 권한을 따져?”
“조교이기 전에 연구의 작성자입니다. 규정에 없는 절차에 응할 의무는 없습니다.”
표준이라는 오만
바엘은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가 손에 쥔 서류를 구겨 쥐며 조소를 터뜨렸다.
“규정 뒤로 숨으면 네 오만이 감춰질 줄 아나? 0.04마크의 누락 때문에 장치가 부서졌다고 세미나실에서 큰소리를 쳤으면서 막상 원자료를 내놓으라니 꼬리를 내리는군. 네가 쓴 건 논문이 아니라 망상이야.”
“망상인지 사실인지는 규정집이 아니라 실험대 위에서 결정됩니다.”
리에트가 작업대 중앙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오전의 세미나를 위해 분리해 두었던 보조 공명대와 예비 은합금 고리가 놓여 있었다.
“선임연구원님께서 세드릭 부학장님의 표준 접지식이 완벽하다고 확신하신다면 지금 여기서 직접 증명해 보이시죠.”
연구실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바엘이 헛웃음을 쳤다.
“여기서 증명하라고? 내가?”
“그렇습니다. 제 초고가 억지라면 부학장님의 표준식대로 3중 펄스를 인가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0.05마크 미만의 편차는 자연 방전으로 완전히 사라질 테니까요.”
리에트는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만약 선임연구원님의 말씀대로 세 번째 펄스까지 고리가 온전하다면 제 초고를 즉시 폐기하고 학부에 공식 사과문을 내겠습니다. 실험 노트도 전부 넘겨드리죠.”
바엘의 눈동자에 탐욕과 오만이 동시에 스쳤다. 학회에 알려지기 전에 위험한 불씨를 제 손으로 끄고 반박 초고까지 합법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다.
“좋다. 건방진 장학생 하나 바로잡는 일에 긴 시간도 필요 없지. 하지만 네 예측이 빗나갔을 때는 사과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조교 자격을 영구 박탈할 테니 각오해라.”
“동의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리에트는 참관 조교를 응시했다.
“기록실 조교님은 측정 일지를 펴십시오. 인가 전압과 단계별 계측 침의 위치 그리고 실패 여부를 공문서로 기록하고 양측의 서명을 남겨야 합니다. 표준 모델의 한계가 드러날 경우 들고 오신 예비 감사 통지서는 즉시 파기합니다.”
참관 조교가 마른침을 삼키며 바엘의 눈치를 살폈다. 바엘은 턱을 까딱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적어라. 결과는 뻔할 테니.”
에르반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리에트를 말리는 대신 조용히 걸어가 실험대 둘레의 방호 결계석을 작동시켰다. 웅성거리는 마력의 진동과 함께 투명한 마도 차폐벽이 실험대를 둘러쌌다.
에르반이 차가운 눈길로 바엘을 바라보며 짧게 쏘아붙였다.
“연구실 장비를 부수면 수리비는 부학장실로 청구한다.”
네 번째 단자의 불꽃
실험대 위에 예비 은합금 고리가 고정되었다. 바엘은 흠잡을 데 없는 손놀림으로 학부 표준 교재에 실린 접지선을 배선했다. 완충 회로나 경계 보정 회로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방전 구조였다.
바엘이 마력 제어간을 잡으며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잘 봐라. 진정한 마도학이란 이론의 사소한 흠집을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니라 표준의 거대한 안정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가 첫 번째 제어 레버를 밀어 올렸다.
위잉.
공명대 중심의 수정핵이 푸른 빛을 발산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1차 펄스가 은합금 고리를 타고 흘렀다. 표면에 미세한 마력 파문이 일었지만 장치는 조용했다.
바엘이 계측기를 가리켰다.
“접지 전위 제로. 편차는 전혀 축적되지 않는다.”
“1차 펄스는 통과했습니다.”
리에트는 계측기 바늘을 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은합금 고리의 내벽과 배선 접합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가느다란 마력의 선들이 수식처럼 얽혀 들어갔다. 편차 감응이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마력의 미세한 마찰음이 귓가를 긁는 듯했고 관자놀이가 희미하게 욱신거렸다.
표준 계측기의 바늘은 0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고리 내부의 위상은 어긋나고 있었다. 0.04마크. 버려진 소수점의 잉여 마력이 접지선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고리 외곽의 절연 피복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내벽 온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2차 펄스를 넣으면 접지선이 포화될 겁니다.”
“헛소리 마라. 바늘은 미동도 없다.”
바엘이 두 번째 레버를 내렸다.
파앗!
고리가 날카로운 고음을 내며 흔들렸다. 계측 침이 살짝 떨렸지만 여전히 안전 한계선 아래에 머물렀다. 바엘의 얼굴에 확신에 찬 미소가 번졌다.
“봤느냐? 약간의 진동은 다중 위상의 자연스러운 공진 현상이다. 이제 마지막 펄스를 넣으면 이 장치는 완벽한 평형을 이룬다.”
그가 마지막 3차 레버에 손을 얹었다.
리에트의 감각 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2차 펄스가 남긴 잔류 마력이 접지선 용량을 초과해 네 번째 단자 방향으로 맹렬하게 역류하고 있었다. 대기 중으로 방전되지 못한 마력 파편들이 임계점을 향해 압축되는 감각이 피부를 찔렀다.
“손 떼십시오!”
리에트가 차폐벽 너머로 외쳤다.
“지금 3차 펄스를 넣으면 3초 안에 4번 단자의 절연이 파괴됩니다!”
“끝까지 궤변을 늘어놓는구나!”
바엘은 그녀의 경고를 비웃으며 3차 레버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증명 끝이다!”
그 순간 공기의 흐름이 멈췄다.
계측기의 바늘이 순식간에 붉은색 한계선을 넘어 오른쪽 끝에 처박혔다.
치지지직!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4번 단자 접속부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어……?”
바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초. 단자 접속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2초. 절연재가 새까맣게 타들어가며 유독한 연기가 솟구쳤다.
3초.
콰아아앙!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4번 단자가 폭발했다.
청백색의 아크 방전이 번개처럼 차폐벽을 때렸고 은합금 고리의 외곽 접지선이 비명을 지르듯 터져 나갔다.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방호벽 안쪽을 어지럽게 긁어댔다.
바엘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그의 고급 예복 소매는 그을음으로 얼룩졌고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칼은 폭압에 헝클어져 볼품없이 흩날렸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실험대 위에는 반으로 쪼개진 채 시커멓게 타버린 은합금 고리와 녹아내린 션트 단자만이 뒹굴고 있었다.
새벽의 조건
환풍기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자 연구실의 매캐한 연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던 바엘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부서진 실험대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이 검게 그을려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리에트는 방호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긴 철제 집게로 두 동강 난 예비 고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침 세미나에서 가져왔던 제3고리 파편 옆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금속이 갈라진 각도와 외곽 접지선의 단열 흔적이 쌍둥이처럼 정확하게 일치했다.
“균열의 위치와 파단 형태가 아침의 실험체와 동일합니다. 그리고 4번 단자의 용융까지.”
차분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리에트는 겁에 질려 구석에 굳어 있던 참관 조교를 돌아보았다.
“기록하셨습니까?”
“아, 예…….”
“학부 표준 접지식에 따른 3중 펄스 인가 결과. 2차 펄스 후 경계 편차 누적에 의한 4번 단자 절연 파괴 및 은합금 고리 파단. 실험 집행자, 바엘 선임연구원. 빠짐없이 적으셨다면 서명하십시오.”
참관 조교는 바엘의 눈치를 살필 여유도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물리적 참상을 조작했다가는 폭발 사고 은폐 혐의로 자신이 먼저 책임을 뒤집어쓸 판이었다. 조교는 떨리는 손으로 실패 일지에 도장을 찍었다.
“이, 예비 감사는…… 철회된 것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조교는 서류함을 챙겨 들고 도망치듯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엘 역시 조수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세드릭 부학장님의 수식이 틀렸을 리가…….”
바엘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패배자의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리에트는 문을 열어 주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수리비 청구서는 부학장실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선임연구원님.”
바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그는 연구실 밖으로 쫓겨나듯 복도로 사라졌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참나무 문이 닫혔다.
소란이 멎자 연구실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에르반은 작업대 위에 놓인 부서진 고리를 집어 들었다. 매끄러운 은빛 단면을 살피는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 바늘이 튀기 전에 단자가 터질 걸 알았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확신이 담긴 어조였다.
리에트는 등 뒤로 찌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긴장감을 억누르며 태연하게 답했다.
“1차 펄스와 2차 펄스 사이의 열 변위를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외곽 접지선의 허용 전류 밀도를 역산하면 3차 펄스를 버틸 수 없다는 답이 나옵니다. 말씀드렸듯 감상이 아니라 수치입니다.”
편차 감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얹지 않았다. 능력을 드러내는 순간 또 다른 변수가 되어 연구실에 묶일 뿐이었다.
에르반은 그녀의 대답을 캐묻지 않았다. 대신 고리를 툭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
“바엘을 쫓아냈다고 끝난 게 아니다. 세드릭은 이 실패를 덮기 위해서라도 더 큰 압박을 가해 올 거다. 학부 위원회가 소집되기 전에 완전한 재현 데이터셋을 완성해야 해.”
“그렇다면 원자료를 더 정밀하게 측정해야 합니다.”
“낮에는 불가능하다.”
에르반이 시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낮에는 연구실 문밖마다 쥐새끼들이 돌아다닌다. 계측기를 켤 때마다 방해 전파를 쏘거나 감사를 핑계로 문을 두드릴 테지.”
그가 구겨진 연구 가운 주머니에서 낡은 열쇠 꾸러미를 꺼내 작업대 위에 던졌다.
“자정부터 새벽까지다. 감시가 끊기는 시간에만 3중 공명의 정밀 재현 실험을 진행한다. 이것이 내 공동 연구실에 남기 위한 조건이다.”
새벽 실험. 선배 조교들이 왜 이곳을 ‘무덤’이라 부르고 한 달 만에 눈 밑이 보라색이 되어 나갔는지 그 이유가 비로소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연구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라 포장했지만 본질은 가혹한 야근이었다.
하지만 리에트는 겁을 집어먹거나 한숨을 내쉬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새로 장만한 두꺼운 가죽 장부를 꺼냈다. 깃펜에 잉크를 듬뿍 묻힌 뒤 첫 페이지 상단에 정갈한 필체로 제목을 적었다.
‘업무 시간 및 연구 기여도 기록부.’
에르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건 뭐지?”
“자정부터 시작되는 모든 연구 노동을 기록할 장부입니다. 실험 준비, 계측, 수식 검토, 장비 정리에 들어간 시간을 분 단위로 적겠습니다.”
“연구자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착취당하는 연구자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다가 사라집니다. 교수님의 새벽 실험 요구에 동의하겠습니다. 다만 이 기록부에 서명된 시간만이 제 공식 연구 기여로 인정됩니다. 허드렛일이나 출처 없는 밤샘 노동은 단 1분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물렸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리에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에르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기이한 흥미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새벽에 졸기만 해 봐.”
그는 돌아앉아 자신의 계산 노트를 펼쳤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곧 찾아올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진짜 연구가 시작될 터였다.
리에트는 장부 첫 칸에 오늘의 날짜와 출근 시간을 적어 넣었다. 연구실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방패가 단단하게 세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