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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교수님의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어서3화

천재 교수님의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어서

천재 교수님의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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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반박문에 이름을 올리는 법

서명보다 먼저 필요한 것

세미나 시작까지 삼십 분도 남지 않았는데 에르반은 리에트의 원고 첫 장에 붉은 선을 그었다.

“이 문단을 지워.”

“왜요?”

“감상이다.”

리에트는 그가 지운 문장을 내려다보았다. 제3고리가 세 번의 펄스를 견디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며 ‘계산식의 아름다움이 안전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적은 부분이었다.

“감상이 아니라 결론의 전제입니다. 교수님이 편차를 지운 이유를 밝히지 않으면 독자는 단순한 계산 실수로 이해할 겁니다.”

“내 의도를 추측했군.”

“수식에서 확인한 사실을 적었습니다.”

에르반은 붉은 펜을 내려놓고 그녀가 정리한 자료를 펼쳤다. 세 번의 실험 시각과 입력 파장 그리고 세 번째 고리의 균열 위치가 한 표에 들어 있었다. 그 옆에는 리에트가 작성한 기여 기록표가 붙어 있었다.

계산 검토와 실험 설계는 리에트. 장치 조율과 최종 승인은 에르반.

저자 순서만 비어 있었다.

“세미나 자료는 기록실에 제출해야 한다. 배포용 사본도 만들어야 하고.”

“그럼 지금 저자란을 비워 둔 채 내시겠다는 겁니까?”

“결과가 확정되지 않았다.”

“제 이름은 이미 원고에 들어가 있습니다. 작성자를 인정하면서 저자를 미루는 건 같은 문제를 다른 종이에 옮기는 일입니다.”

에르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여전히 서명하지 않은 조교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계약을 믿지 못하나?”

“믿음은 기록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기록을 직접 만들어. 오늘 세미나에서 네 계산을 증명해. 공동 연구가 성립한다고 판단되면 저자란을 다시 쓰겠다.”

“판단 기준이 교수님 혼자라면 계약과 다를 게 없습니다.”

“질문을 통과하면 된다.”

그 말은 불친절했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세미나실에서 리에트의 이름을 지켜 줄 사람은 에르반이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랬다.

리에트는 붉은 선이 그어진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문장 아래에 실험 번호와 기록 위치를 덧붙였다.

“감상이 아니라 증거로 보이게 만들겠습니다.”

에르반은 균열 난 세 번째 고리를 새 보호판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세미나에서 실제 파손 흔적을 보여 주려는 행동이었다.

“그것도 가져가십니까?”

“반박하려면 반박할 대상을 보여 줘야지.”

리에트는 보호판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원고와 함께 깨진 고리를 들고 연구실을 나섰다.

질문하는 쪽으로

마도학부 세미나실은 이미 절반 이상 차 있었다. 앞줄에는 공명 이론을 연구하는 선배들이 앉았고 뒤쪽에는 다른 연구실의 조교들이 서류를 들고 서 있었다.

리에트가 칠판 앞에 서자 작은 웃음이 번졌다.

“새 조교가 발표한다고?”

“에르반 교수의 계산을 고치겠다는 건가 보군.”

에르반은 발표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는 리에트를 소개하지도 변호하지도 않았다.

리에트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그리고 칠판 첫 줄에 제목을 썼다.

‘3중 공명식의 위상 편차와 경계치 누락에 관한 비판적 고찰.’

“이 연구는 세 번의 실험에서 반복된 0.04마크의 누락을 다룹니다. 저는 이것을 단순한 필산 오류로 보지 않습니다. 실제 장치에 잉여 마력이 이동하는 경계가 설계에서 빠졌기 때문입니다.”

선배 연구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조교가 교수의 계산을 비판하려면 먼저 장치 자체의 오차부터 제외해야 하지 않나? 은합금 고리의 순도가 일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래서 세 실험의 고리 성분표를 비교했습니다.”

리에트는 표를 칠판에 붙였다. 세 고리의 합금 비율은 조금씩 달랐지만 균열은 모두 같은 외곽 접지선에서 시작됐다.

“재료 차이가 원인이라면 균열 위치와 발생 시점이 일치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 번 모두 마지막 입력 뒤 같은 지점에서 열이 올랐습니다.”

“그 자료를 믿을 수 있나? 네가 작성한 기록이잖아.”

“원자료는 에르반 교수의 실험 노트와 대조했습니다. 표의 오른쪽에 장과 줄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리에트는 노트를 들어 보였다. 종이가 넘어가는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 빠르게 필기했다.

“그럼 네 주장은 0.04마크를 계산에 넣으면 장치가 안정된다는 건가?”

“아닙니다.”

리에트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현재 장치에 0.04마크를 억지로 넣으면 오히려 공명식이 붕괴합니다. 제가 주장하는 건 그 편차를 없던 것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완충 회로를 추가하거나 출력 순서를 바꿔야 합니다. 그 전까지는 세 번째 펄스를 보내지 않는 것이 유일한 안전 기준입니다.”

“실험을 끝까지 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군.”

“세 번째 펄스를 보내지 않은 것은 결론이 아니라 중단 기록입니다.”

“겁이 나서 멈춘 걸 수도 있지.”

리에트의 손가락이 분필을 세게 눌렀다.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멈췄습니다. 겁이 나지 않는 연구자는 장치를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겁니다. 연구에서 필요한 건 용감한 표정이 아니라 중단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뒤쪽의 웃음이 사라졌다. 에르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시선은 리에트의 손이 아닌 칠판에 머물렀다.

원자료의 벽

발표가 끝나자 가장 나이가 많은 선배 연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논리의 방향은 흥미롭군. 그러나 학회에 제출할 반박문이라면 원자료의 보존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실험 노트 세 권만으로는 독립 재현이 불가능해.”

“원자료는 연구실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측정기 교정표와 합금 검사 기록도 있나?”

리에트는 입을 다물었다. 교정표는 첫 번째 노트에 첨부되어 있지 않았다. 합금 성분표도 장치 보관함에 흩어져 있었다. 에르반의 계산 초안에는 봉인 표시가 있는 장도 있었다.

“현재는 전부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논문이 아니라 잘 쓴 문제 제기야.”

정확한 지적이었다. 리에트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찾아낸 빈칸은 장치의 것만이 아니었다. 연구를 공적인 결과로 만들 자료의 빈칸도 있었다.

“맞습니다.”

리에트는 초고의 제목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

‘본 연구는 재현 실험 전 단계의 반박 가설이며 원자료 보완을 전제로 한다.’

“오늘 이 자리에서 결함이 완전히 입증됐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어떤 자료를 확보해야 같은 실험을 다시 할 수 있는지 제출하겠습니다.”

선배 연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라면 심사받을 자격은 있겠군.”

그때 회색 조끼를 입은 참관 조교가 앞으로 나왔다. 가슴에는 학부 기록실 표식이 달려 있었다.

“발표 자료 사본을 기록실에 보관하겠습니다. 원자료 제출 예정일도 적어 주시죠.”

“제출 예정일은 재현 조건을 확인한 뒤 정하겠습니다.”

“학부 감사가 시작되면 연구실 자료를 먼저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친절한 말투였지만 압박이었다. 리에트는 그가 초고의 저자란과 기여표를 오래 바라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확인 절차는 규정에 따라 진행해 주십시오. 자료를 먼저 가져가지는 마시고요.”

참관 조교의 미소가 굳었다.

에르반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본은 기록실에 남겨라. 원자료는 작성자의 입회 없이 반출하지 않는다.”

참관 조교는 잠깐 침묵하다가 서류를 챙겼다. 에르반의 말은 보호라기보다 연구실의 규칙을 공개적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공동저자라는 조건

연구실로 돌아오자 에르반은 작업대 위에 새 문서를 펼쳐 놓았다.

“수정본을 내일 정오까지 작성해.”

문서의 첫 줄에는 ‘공동 연구 참여 제안서’라고 적혀 있었다. 실험 설계와 편차 분석은 리에트 벨로아의 담당. 장치 조율과 이론 모델 보완은 에르반 루센의 담당이었다. 모든 원자료는 양측이 열람할 수 있고 안전 중단 기준은 실험 담당자의 판단으로 발동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저자란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혔다. 순서는 비어 있었다.

“공동저자 제안입니까?”

“네가 요구한 것의 초안이다.”

“초안에는 효력이 없죠.”

“서명하면 효력이 생긴다.”

리에트는 문서 아래쪽을 읽었다. 업무 시간과 성과물 귀속 조항은 아직 조교 계약서와 연결되어 있었다. 공동 연구가 끝난 뒤의 연구비와 후속 특허에 관한 말도 없었다.

“저자 순서와 후속 성과물 조항이 빠졌습니다.”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럼 이것은 공동저자 초대가 아니라 공동저자 후보 등록입니다.”

“정확하다.”

“후보로는 참여하겠습니다. 제 계산과 실험 설계가 논문에 반영되면 저자 순서를 다시 협의해야 합니다.”

에르반은 잠시 침묵하다가 문서 여백에 문장을 추가했다.

‘각 연구자의 기여도는 실험 노트와 수정 이력으로 산정하며 저자 순서는 해당 기록을 근거로 양측이 합의한다.’

“이제 네 차례다.”

리에트는 자신의 이름 아래에 서명했다. 조교 계약서에는 아직 서명하지 않았지만 이 문서에는 서명했다. 하나는 노동을 묶는 종이였고 다른 하나는 연구의 책임을 나누는 종이였다.

“공동 연구 후보로 참여하겠습니다. 원자료 사본을 오늘 안에 확인하게 해 주세요.”

“봉인된 계산 자료는 제외한다.”

“왜죠?”

“아직 공개할 수 없다.”

리에트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채울 때가 아니었다. 대신 노트의 첫 장에 봉인 자료의 존재와 열람 제한을 적었다.

그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리에트 벨로아 조교. 세미나 자료 확인 때문에 잠깐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아까의 참관 조교였다. 목소리 뒤로 낯선 구두 소리가 두 개 더 겹쳤다.

리에트는 방금 서명한 문서를 노트 안쪽에 넣었다. 에르반은 봉인된 서랍 앞을 가로막았다.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리에트는 새 수정본의 첫 줄에 제목을 적었다.

이번에는 혼자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았다.

반박은 시작됐고 이름은 아직 협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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