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세계에서 생필품을 독점함

5화: 교환의 단위
골판지 표면은 거칠었다.
서도윤은 계산대 위에 빳빳한 종이상자 판지를 올려놓았다. 유성 매직 뚜껑을 열자 휘발성 냄새가 번졌다.
매장 안의 시선들이 계산대로 쏠렸다.
일곱 명.
접이식 의자에 기댄 이건우와 최민석, 팔에 천을 감은 박정호, 구석에 등을 대고 앉은 윤수민, 묶인 오태구, 그리고 방패를 세우고 선 강해나까지.
좁은 편의점 안에서 가쁜 숨소리가 엉켜 있었다.
“도윤 씨.”
수민이 창고 쪽에서 걸어왔다. 그녀의 품에는 무너진 선반 잔해에서 꺼내 온 작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통로를 치우다가 바닥에서 모았습니다. 포장이 온전해요.”
수민이 계산대 위에 물건을 내려놓았다. 납작한 통조림 네 캔과 밀봉된 압박붕대 한 롤이었다.
황도 통조림 두 캔과 닭가슴살 통조림 두 캔. 찌그러진 캔 표면 위로 비상등 불빛이 반사되었다.
“통조림이잖아?”
박정호가 상체를 불쑥 내밀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먹을 게 더 있었네요. 여기 사람들 전부 물 한 모금 못 마셨어요. 인원수대로 똑같이 나누죠. 그러면 허기는 면하잖습니까.”
구석에 웅크린 오태구가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거봐라. 물건을 숨겨 두고 있었으면서 사람 목숨줄 가지고 장난질이나 쳤군. 편의점 점장이 아주 왕이라도 된 줄 아나 봐?”
도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계산대 아래 물자들을 꺼내 선반 위에 늘어놓았다.
마개가 따이지 않은 생수 여섯 병과 오태구에게 주고 남은 반 병.
즉석식 세 개.
통조림 네 캔.
그리고 건전지 두 묶음.
라이트코너 편의점이 가진 총자산의 전부였다.
“정호 씨.” 도윤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물과 식량을 똑같이 나누면 어떻게 되는지 계산해 보셨습니까?”
정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거야…… 나눠 먹으면 다 같이 버티는 거지.”
“생수는 인당 한 병도 안 돌아갑니다. 즉석식과 통조림을 합쳐도 일곱 개뿐입니다. 한 사람이 캔 하나를 비우고 나면 내일부터 이 매장에는 씹을 것이 단 한 점도 남지 않습니다.”
도윤의 손가락이 계산대 상판을 두드렸다.
“식량이 바닥나면 누가 철문을 지킵니까? 누가 깨진 유리벽을 보강하고 밖의 괴수를 정찰합니까? 배를 채운 사람들은 바닥에 누워 다음 보급만 기다릴 겁니다. 그러다 문이 부서지면 다 같이 굶주린 채 뜯어먹히는 겁니다.”
매장 안이 가라앉았다.
“원칙 없는 균등 배분은 구원이 아닙니다. 다 같이 손잡고 이틀 뒤에 죽자는 자살 합의일 뿐입니다.”
정호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오태구 역시 시선을 피했다.
도윤은 매직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살아남고 싶다면 내놓아야 합니다. 지금부터 이 매장의 물건에는 명확한 교환 단위가 붙습니다.”
도윤은 골판지 맨 위에 굵은 획으로 적었다.
[임시 물자 교환 기준표]
검은 글씨가 골판지 결을 따라 선명하게 번졌다.
“돈은 받지 않습니다. 바깥 도로가 찢어지고 전산망이 죽은 순간 종이돈과 카드 잔고는 휴지가 되었습니다. 이 매장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세 가지입니다.”
도윤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노동, 정보, 그리고 도구.”
그는 골판지 위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 생수 0.5병
- 1등급 위험 노동 2시간
- 2등급 일반 노동 4시간
- 3등급 보조 노동 6시간
- 즉석식 1개 또는 통조림 1캔
- 1등급 위험 노동 2시간
- 2등급 일반 노동 4시간
- 미확인 괴수 이동 경로 및 생존자 거점 정보 1건
- 건전지 1묶음
- 금속제 무기 또는 수색 공구 1점
- 던전 통로 내부 안전 구역 정보 1건
글씨를 확인한 이건우가 물었다.
“도윤 씨. 노동의 등급은 어떤 기준입니까?”
“위험성과 체력 소모입니다.”
도윤은 항목 옆에 설명을 덧붙였다.
“1등급은 침입로 경비, 방어선 사수, 외부 수색처럼 목숨을 거는 작업입니다. 2등급은 바리케이드 보강, 물자 운반, 시설 수리 같은 육체노동입니다. 3등급은 매장 내부 감시, 환자 보조, 잔해 선별, 기록 보조 같은 경노동입니다.”
박정호가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돼! 내 팔을 봐요! 뼈가 부러진 것 같아서 굽히지도 못하는데 2등급 노동을 어떻게 합니까? 그럼 나 같은 부상자는 3등급 일만 하다가 목말라 죽으라는 소립니까?”
최민석도 손가락 두 개가 굳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도윤은 정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정호 씨. 한 손이 다쳤지만 다른 한 손은 멀쩡합니다. 눈도 보이고 발도 움직입니다. 3등급 노동으로 창고 통로를 감시할 수 있고 성한 손으로 바리케이드 틈에 쐐기를 밀어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로 언제 6시간을 채워서 물을 마셔요!”
“그래서 예외 조항을 둡니다.”
도윤은 골판지 아래에 별도 조항을 적었다.
[신용 선지급(외상) 계약]
- 부상 또는 탈진 상태인 자는 24시간 이내의 노동 이행을 담보로 생수 0.5병 또는 식량 1회를 선지급받을 수 있다.
- 기한 내 노동을 거부하거나 계약을 위반할 경우 즉시 매장 밖으로 퇴거 조치한다.
정호의 입이 다물어졌다.
“부상자라고 해서 거저 주는 건 없습니다. 다만 일할 기회는 먼저 빌려 드립니다. 정호 씨가 진 빚은 나중에 노동으로 갚으면 됩니다.”
도윤의 목소리에는 사사로운 감정이 없었다.
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군요. 잉여 취급을 받으며 눈치 보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감시로 값을 치르는 편이 낫습니다.”
민석 역시 동의했다.
“저도 부품 선별이나 비상등 관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도윤은 묶여 있는 오태구를 돌아보았다.
“오태구 씨. 당신은 아까 마신 물 반 병의 대가로 4시간의 방어 복무 빚이 있습니다. 그 빚을 갚기 전까지는 추가 지급이 없습니다.”
오태구는 이를 갈았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이미 매장 안의 분위기는 도윤이 세운 규칙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도윤은 완성된 골판지 가격표를 계산대 뒤쪽 진열장 프레임에 단단히 걸었다.
누구든 고개를 들면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 순간이었다.
쿵!
매장 정문 통유리창이 크게 흔들렸다. 진열대로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 틈새에서 쇳가루가 튀었다.
“크르르르…….”
유리창 너머 어둠 속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새어 들어왔다.
회색빛 가죽에 긴 앞다리를 지닌 괴수였다. 셔터 틈새로 흘러나오는 체온을 감지했는지 녀석은 앞발로 유리창을 거칠게 긁어댔다.
끼기기긱!
신경을 긁는 굉음에 정호가 귀를 틀어막았다.
“괴물이다! 또 왔어!”
유리창에 덧댄 진열대가 괴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쇠기둥이 뒤틀리는 삐걱거림이 울렸다.
“해나 씨!” 도윤이 외쳤다.
강해나는 이미 방패를 쥐고 앞으로 튀어 나가고 있었다.
“정문 중앙 프레임이 밀려요! 지지대가 버티지 못합니다!”
도윤은 계산대를 박차고 나가며 소리쳤다.
“긴급 노동을 발령합니다!”
도윤의 시선이 정호와 오태구를 향했다.
“해나 씨는 중앙 방패 방어, 1등급 노동입니다! 정호 씨, 성한 왼손으로 철제 의자를 끌고 와요! 진열대 다리 밑에 쐐기로 박아 넣으십시오. 2등급 보강 노동으로 인정합니다!”
정호가 겁에 질려 주저했다.
“저 괴물이 유리를 깨면 난 죽어요!”
“안 막으면 다 같이 죽습니다! 물의 절반을 당장 정산해 주겠습니다. 움직여요!”
도윤의 고함에 정호가 악을 쓰며 바닥을 기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성한 팔로 무거운 쇠의자를 끌어당겼다.
“오태구!”
도윤이 묶인 줄을 풀어헤쳤다.
“살고 싶으면 진열대 오른쪽 모서리를 어깨로 밀어붙여! 1시간을 버티면 빚에서 1시간을 깎아 준다!”
오태구는 도윤의 쇠파이프와 흔들리는 진열대를 번갈아 보았다. 진열대가 무너지면 자신이 가장 먼저 물어뜯길 판이었다.
“빌어먹을! 깎아 주는 거 확실하지?”
오태구가 바닥을 차고 달려들어 진열대 철제 기둥에 온몸을 던졌다.
쿵!
해나가 방패로 중앙 기둥을 받쳐 든 상태에서 오른쪽에서는 오태구가 어깨로 밀어붙였고 밑바닥에서는 정호가 쇠의자 다리를 틈새에 틀어박았다.
도윤은 셔터 조작봉을 진열대 틈새로 깊숙이 찔러 넣어 바닥에 고정했다.
콰앙!
괴수가 유리창을 향해 다시 한번 몸통을 내던졌다.
거대한 충격이 전신을 타고 전해졌다. 어깨가 빠질 듯한 통증에 오태구가 비명을 질렀고 해나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진열대는 더 이상 밀리지 않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 타일을 파고들며 굳건한 쐐기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민석 씨, 비상등 비춰요! 틈새로 불빛을 쏘세요!”
민석이 접이식 의자 위에서 비상등 각도를 비틀었다. 강렬한 백색광이 깨진 셔터 틈을 통해 괴수의 눈동자로 쏟아졌다.
캬아아악!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괴수가 눈이 먼 듯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녀석은 앞발로 얼굴을 감싸 쥐며 뒤로 물러섰다.
마침 동쪽 도로 끝에서 푸르스름한 여명이 번져 오고 있었다.
새벽빛이 주차장 바닥을 비추자 괴수는 빛을 꺼리는 듯 신경질적인 울음소리를 내며 골목길 어둠 속으로 꼬리를 감추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매장 안에는 거칠게 헐떡이는 사람들의 숨소리만 남았다.
정호가 힘이 풀린 다리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굴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이전과 다른 빛이 돌고 있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괴수의 침입을 막아냈다는 감각. 공포에 질려 빌붙어 있던 기생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태구도 주저앉아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물렀다.
도윤은 계산대로 걸어가 장부를 펼쳤다.
“정산하겠습니다.”
도윤의 목소리가 조용한 매장에 울려 퍼졌다.
“강해나 씨. 정문 방어선 사수 1등급 노동 1시간 이행. 다음 식사 배급 시 1등급에 준하는 정산권을 적립합니다.”
해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미소를 띠었다.
“알겠어요.”
“박정호 씨.”
도윤이 정호를 불렀다.
“진열대 보강 및 쐐기 고정, 2등급 긴급 노동 1시간 완료. 약속대로 생수 4분의 1병을 지급합니다.”
도윤은 눈금이 표시된 투명 플라스틱 계량컵에 생수를 정확히 따라 정호에게 내밀었다.
정호는 떨리는 손으로 컵을 받아 들었다. 구걸해서 얻은 물이 아니었다.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온몸을 던져 얻어낸 정당한 몫이었다.
꿀컥, 꿀컥.
물을 들이켜는 정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빈 컵을 내려놓은 정호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살 것 같네요. 진짜로 주는군요.”
“약속된 대가는 반드시 지급합니다.”
도윤은 장부에 줄을 긋고 오태구를 보았다.
“오태구 씨. 진열대 유지 노동 1시간 인정합니다. 기존 부채 4시간에서 1시간을 차감하여 현재 남은 채무는 3시간입니다.”
오태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장부에 서명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약속대로 빚이 깎여 나가는 것을 보자 눈빛에 안도감이 스쳤다. 규칙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오태구가 서명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는 순간.
도윤의 눈앞에 푸르스름한 반투명 활자들이 떠올랐다.
[교환의 단위가 확정되었습니다.]
[매장 내 거래 규칙이 정식으로 공표되었습니다.]
[관리자의 장부에 새로운 품목군(보존식/통조림)의 등록 조건이 갱신됩니다.]
[현재 거점 신용 기록이 정상적으로 누적 중입니다.]
문구가 조용히 반짝이다 허공으로 흩어졌다.
도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재고창 시스템은 단순한 온정이나 맹목적인 무력에 반응하지 않는다. 상호 합의된 계약과 측정 가능한 교환의 단위가 거점에 정착될 때 비로소 진정한 기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벽면에 걸린 골판지 가격표는 이제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종말이 찾아온 이 작은 편의점 안에서 사람들을 묶어 주는 유일한 법률이었다.
해나가 셔터 틈새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동이 트면서 드러난 주차장 풍경을 살피던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도윤 씨. 잠깐 이리 와 봐요.”
도윤이 조작봉을 쥐고 해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저길 봐요.”
해나가 가리킨 곳은 주차장 한가운데 열려 있는 검은 문 주변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아침 햇살 아래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 위로 무언가를 끌고 간 자국과 함께 검은 문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원을 그리며 파인 발자국들이 흩어져 있었다. 마치 영역을 표시하듯 쓰레기통과 폐차 잔해들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단순히 배회하는 게 아니에요.” 해나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문 주변을 요새화하고 있어요. 놈들이 거점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매장 입구가 완전히 포위당해요.”
도윤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차장의 검은 문을 응시했다.
문을 둘러싼 괴수들의 둥지화.
앉아서 자정의 보충만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끝났다.
도윤은 계산대 뒤편 벽에 걸린 골판지 가격표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다음 계약은 정해졌군요.”
도윤의 시선이 해나를 향했다.
“외부 순찰 계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