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세계에서 생필품을 독점함

2화: 첫 번째 가격표
새 생수 한 병은 선반의 빈자리를 너무 깨끗하게 메우고 있었다.
서도윤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기존에 있던 생수 병들은 전부 조금씩 눌린 자국이 있었다. 새 병만 공장에서 막 나온 것처럼 반듯했다.
“그걸 마시면 안 됩니까?”
박정호가 계산대 쪽에서 물었다. 팔에 감은 천은 이미 붉게 젖어 있었다.
“안 된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
“그럼 줘요.”
정호가 몸을 일으키자 강해나가 방패를 세웠다.
“앉아. 피가 더 나.”
“저 사람은 물을 숨기고 있잖아요.”
도윤은 선반 앞에 서서 생수 한 병과 남은 재고를 번갈아 보았다. 생수는 여덟 병이었다. 새 병까지 세면 아홉 병이지만 그중 하나는 숫자 옆에 물음표가 붙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끝으로 새 병을 건드렸다.
[등록 가능한 상품인지 확인합니다.]
도윤은 눈을 깜빡였다. 문구는 병 표면이 아니라 시야 한가운데 떠 있었다.
“뭐가 보였어요?” 해나가 물었다.
“상품 확인 문구입니다.”
“당신만 봤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보입니다.”
해나는 도윤의 손보다 얼굴을 먼저 살폈다. 도윤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순간부터 매장은 거짓말을 믿는 곳이 된다.
“정호 씨.” 도윤이 말했다. “이 물은 그냥 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다쳤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건을 말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이 매장 안에서 물건을 가져가려면 대가를 남겨야 합니다. 정보든 노동이든 물건이든 당사자가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호가 비웃었다. “편의점에서 무슨 계약을 해요?”
“현금이 안 되니까요.”
도윤은 계산대 위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종이 맨 위에 굵게 적었다.
생수 1병 = 확인 가능한 대가 1건.
해나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대가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가져갑니다.”
“부상자도요?”
“부상자는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하는 사람이 계속 물을 마셔야 합니다.”
말이 떨어지자 매장 안이 조용해졌다. 수민은 정호의 팔을 묶은 천을 살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수민이 말했다. “창고 안에 박스가 쓰러졌습니다. 통로를 막고 있어요. 치우겠습니다.”
정호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네가 왜 일까지 해?”
“물을 마셨으니까요.”
도윤은 수민을 보았다. 첫 거래의 장부에는 열쇠와 외부 정보만 적혀 있었다. 수민이 지금 내놓는 것은 그 거래의 일부가 아니라 새로운 약속이었다.
“좋습니다. 다만 정호 씨가 마실 물은 수민 씨 몫이 아닙니다.”
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아.”
정호가 다시 선반으로 손을 뻗었다. 해나가 손목을 잡아 아래로 눌렀다.
“다음부터는 손이 아니라 입으로 말해.”
“밖에 괴물이 있는데 지금 노동 타령이나 할 겁니까?”
“밖에 괴물이 있으니까 더 해야 해.”
그때 주차장 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라이트코너…… 안에 사람 있습니까?”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검은 문 너머에서 울린 목소리였다. 가까운 것 같았지만 소리는 벽과 바닥을 몇 번이나 튕겨 나온 뒤 도착했다.
해나가 손을 들어 정호의 입을 막았다.
“대답하지 마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사람이어도 문 안쪽이면 위험합니다.”
“그럼 확인만 하겠습니다.”
도윤은 창고 문 근처까지 갔다. 주차장으로 통하는 문은 닫혀 있었지만 문틈 아래로 검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손전등을 켜지 않았다.
“몇 명입니까?”
잠시 뒤 목소리가 돌아왔다.
“둘입니다. 한 명은 걷지 못합니다.”
“이름은요?”
“이건우입니다. 옆에는 동료가 있습니다.”
“동료 이름은?”
긴 침묵이 있었다.
“지금은 대답을 못 합니다.”
해나가 도윤의 팔을 잡았다. “거짓말일 수도 있어요.”
“거짓말인지 확인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도윤은 문을 열지 않은 채 물었다.
“대가로 내놓을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철제 열쇠 하나와 길을 압니다. 문 안쪽 바닥에 은색 표식이 있습니다. 그 표식이 이어지는 곳은 발이 빠지지 않습니다.”
“문을 닫는 방법은요?”
“모릅니다.”
해나가 낮게 욕했다. “안전한 길을 안다는 사람치고는 중요한 건 모르네요.”
“문이 생긴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건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희는 안쪽 통로에 갇혔고 괴수들이 표식 바깥에서 돌아다닙니다. 물이 없으면 둘 다 못 나갑니다.”
도윤은 새 생수 병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다시 병에 닿자 문구가 바뀌었다.
[거래 조건을 입력하십시오.]
그는 숨을 삼켰다. 문구는 해나와 수민에게 보이지 않는 듯했다. 입력할 수 있는 칸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는 떠올랐다.
“열쇠를 먼저 문 아래로 밀어 주세요.”
“물을 먼저 주시면 안 됩니까?”
“서로 확인할 수 없는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
건우가 한숨을 쉬었다. 금속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문 아래 어둠 속으로 작은 열쇠가 미끄러져 나왔다.
도윤은 문을 열지 않고 긴 집게로 열쇠를 끌어당겼다. 해나가 열쇠를 살폈다. 낡은 철제 열쇠였고 붉은 페인트가 조금 묻어 있었다.
“이걸로 뭘 열 수 있죠?”
“안쪽 보관실 문입니다. 문고리에 숫자 세 개가 새겨져 있습니다.”
도윤은 열쇠 모양과 건우의 설명을 장부에 적었다.
“표식의 간격도 말해 주세요.”
“한 걸음 반마다 하나입니다. 은색 선이 끊기면 멈춰야 합니다.”
도윤은 수민에게 종이를 건넸다. “그대로 받아 적어 주세요.”
수민이 종이를 받자 건우가 다시 물었다.
“물은요?”
“문 안으로 던지지 않겠습니다. 문턱에서 가져가세요. 저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도윤은 새 생수를 바닥에 놓고 발끝으로 문 쪽에 밀었다. 병이 문 앞에 닿는 순간 주차장 반대편에서 금속 긁는 소리가 터졌다.
긁, 긁.
해나가 몸을 낮췄다. “괴수가 왔어요.”
유리벽 너머로 끊어진 몸통이 나타났다. 괴수는 어둠 속에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앞의 생수 병이 희미한 비상등을 받아 반짝였다.
건우가 숨을 들이켰다. “지금 가져가야 합니다.”
“조용히 움직여요.” 해나가 주차장 쪽을 향해 말했다. “발을 표식 위에만 놓고 병을 끌어당겨요.”
“표식이 안 보입니다.”
“발밑을 만져요.”
도윤은 해나를 바라보았다. “그쪽까지 나가겠다는 겁니까?”
“내가 문턱까지만 갑니다. 당신은 안쪽에서 병을 밀었고 거래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해나는 비상 출입구의 잠금쇠를 확인했다. 나갈 필요는 없었다. 창고 문을 손바닥만큼 열고 팔만 내밀면 됐다. 그러나 그 틈으로 괴수가 달려들 가능성은 충분했다.
도윤은 셔터 조작봉을 집어 창고 문 옆에 세웠다. “문이 열리면 이걸로 닫겠습니다.”
“두 번 두드리면 닫아요.”
해나는 문을 열었다. 한 손을 바닥에 뻗자 검은 주차장 바닥에서 은색 선이 반짝였다. 그녀는 선 위로 손을 뻗어 병을 끌어당겼다.
괴수의 머리가 움직였다. 해나는 즉시 멈췄다.
도윤은 반대편 진열대에서 빈 캔을 집어 창고 바깥쪽으로 굴렸다. 캔이 벽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괴수가 고개를 돌리는 사이 해나는 병을 잡아 문턱 안으로 당겼다.
“하나.”
건우가 낮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직 거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윤이 대꾸했다. “약속한 표식을 확인했고 열쇠를 받았다는 내용에 동의합니까?”
“동의합니다.”
도윤은 장부에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그 순간 시야에 흰 글자가 번졌다.
[대가 이행을 확인했습니다.]
[거래가 기록되었습니다.]
도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물 한 병이 사라진 자리에 무언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가 아주 잠깐 생겼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선반으로 달려들었다. 해나가 몸으로 막았지만 정호는 팔꿈치로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 선반이 흔들리고 생수 두 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호 씨!” 수민이 외쳤다.
도윤은 재빨리 병을 잡았다. 한 병은 뚜껑이 깨졌고 다른 한 병은 굴러 계산대 아래로 들어갔다.
“멈추세요.”
“저 사람한테는 줬잖아요!”
“저 사람은 열쇠와 정보를 줬습니다.”
“문밖 사람까지 챙기면서 나는 못 챙겨요?”
“당신은 아직 조건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호는 이를 드러냈다. 바깥에서 괴수가 유리벽을 긁었다. 해나는 정호를 밀어내며 진열대를 다시 세웠다.
“부상자 상태를 기록하고 빈 병과 박스를 치우세요.” 도윤이 말했다. “그 일을 끝내면 물 반 병을 드리겠습니다.”
“반 병?”
“아까 깨진 병의 절반은 이미 바닥에 버려졌습니다.”
정호는 욕을 삼키고 붕대를 받아 들었다. 수민이 먼저 바닥에 엎드려 굴러간 병을 꺼냈다.
“제가 같이 하겠습니다.”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창고 통로를 치우기로 했습니다. 약속을 바꾸지 마세요.”
수민은 잠시 도윤을 보다가 박스 쪽으로 향했다. 해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정호에게 붕대를 건넸다.
“상처 상태부터 적어. 네가 숨긴 걸 나중에 남 탓하지 않게.”
정호는 붕대를 받아 들었다. 그 얼굴에는 분노가 남아 있었지만 더는 손을 뻗지 않았다.
도윤은 문에서 받은 열쇠를 창고 안쪽 철문에 대 보았다. 찰칵.
잠금장치가 돌아갔다.
철문 너머에서 무언가가 바닥을 긁었다. 안쪽은 칠흑 같았고 냉장고가 놓인 좁은 통로만 이어져 있었다. 철문 옆 벽에는 작은 은색 줄이 그어져 있었다.
해나가 옆으로 다가왔다. “건우 말이 맞네요.”
“문 안쪽 표식과 이 철문이 이어져 있습니다.”
“그럼 열어 볼까요?”
도윤은 철문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오늘은 안 됩니다. 매장 안 사람을 두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문 너머에 사람이 더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물 하나 들고 가서 길을 잃으면 구조가 아니라 실종입니다.”
해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철문 안쪽을 오래 바라보았다.
도윤은 계산대 앞에 새 종이를 펼쳤다. 생수 재고를 다시 적었다. 남은 병은 일곱 병이었다. 깨진 병의 물이 바닥에 흘러 숫자 하나가 줄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눌렀다.
“오늘 보충을 한 번 더 요청합니다.”
[하루 보충은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보충까지 남은 시간: 23시간 58분.]
도윤의 입안이 말랐다. 거래가 성립되어도 당장 보충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생수 한 병을 얻는 대가로 다른 생수 한 병을 내놓은 셈이었다.
해나가 문구를 볼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살폈다. “결과가 안 좋습니까?”
“제한이 확인됐습니다.”
“무슨 제한?”
도윤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자신도 능력의 정체를 전부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물을 숨긴 채 규칙만 요구하면 해나가 말한 대로 매장은 구멍이 된다.
“하루에 물 한 병만 새로 생깁니다. 거래를 많이 해도 오늘 몫은 끝입니다.”
수민이 창고에서 돌아와 멈춰 섰다. “그럼 아까 그 물이 마지막이었어요?”
“네.”
정호는 붕대를 감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화를 내지 않았다.
해나가 물었다. “상품마다 다릅니까?”
“아직 모릅니다. 오늘 실제로 거래한 상품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윤은 장부 아래에 새로운 줄을 그었다.
생수 1병. 하루 보충 1개. 대가와 기록 필요.
그때 철문 너머에서 둔탁한 노크가 울렸다.
똑. 똑. 똑.
문밖의 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크는 철문 안쪽에서 들렸다.
도윤의 손이 장부 위에서 굳었다.
잠시 뒤 다른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배터리도 거래할 수 있습니까?”
해나가 방패를 들어 올렸다. 도윤은 계산대 아래에 남은 건전지 세 묶음을 떠올렸다.
문 안쪽의 누군가는 아직 매장에 없는 물건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