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한 꽃으로 전설의 포션을 만든다

2화: 언니의 표본집 빈 페이지
언니의 표본집은 3년 동안 약방 서랍에 묶여 있었다.
다온은 그날 처음으로 책의 빈 페이지를 펼쳤다. 페이지는 새 종이처럼 희었지만, 옆면에는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우고 종이 아래에 얇은 흑연판을 댔다. 희미한 압흔이 떠올랐다.
‘청광화는 고가의 북쪽 기둥에 심지 말 것. 꽃은 사람 얼굴이 아니라…’
문장은 중간에서 끊겼다.
“얼굴이 아니라 뭘 기억한다는 거예요?” 해랑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다음 줄도 지워졌어요.”
백련은 책을 덮으려 했지만 다온이 손목을 잡았다. “왜 언니 표본집을 숨겼어요?”
“숨긴 적 없어. 네가 받으러 오지 않았지.”
“언니 장례식 때 약방에 왔어요. 선생님이 보관한다고 했잖아요.”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백련은 표본집의 가죽끈을 다시 묶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사라진 사람의 흔적을 들고 다니면 네가 종자를 찾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을 쫓게 될까 봐.”
“그래서 빈 페이지를 지웠어요?”
“내가 지운 게 아니다.”
해랑은 압흔을 확대경으로 살폈다. “연필 자국이 아니라 물로 씻은 흔적이에요. 누군가 기록을 지운 건 맞아요.”
백련은 말없이 작업대를 정리했다. 다온은 표본집의 빈 페이지 아래에 얇은 종이를 끼웠다. 언니가 남긴 장소 정보는 고가 주변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고가의 북쪽 기둥은 철거 구역이었다.
“오늘 밤 다시 갈 거예요.” 다온이 말했다.
“꽃을 더 채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해랑이 말했다.
“꽃의 사진과 수분을 확인할 거예요. 채취는 하지 않아요.”
“지난밤에 만든 포션을 더 만들려는 건 아니고?”
“약방의 주문이 들어왔어요. 빛을 잃어 가는 유리온실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어요. 식물에 병이 든 건지, 눈이 어두워진 건지 확인을 해야 해요.”
백련은 다온을 똑바로 봤다. “전설의 포션은 아직 시험 단계야. 환자에게 주지 마.”
“그럼 어떻게 효능을 확인해요?”
“먼저 식물이 다음 씨앗을 맺는지 확인해.”
“그때까지 환자는 기다려야 해요?”
“무엇을 치료하는 약인지 모르는 채 복용하게 할 수는 없어.”
해랑이 표본집을 덮었다. “둘 다 맞는 얘기예요. 그러니 꽃을 더 따지 않고, 환자에게 위험을 주지 않는 확인 방법을 찾죠.”
다온은 저녁 내내 포션의 농도를 나눠 작은 시험병 세 개를 만들었다. 하나는 온실의 빛을 받는 약초에 발랐고, 하나는 청광화 꽃잎에 닿지 않게 유리판 아래 두었다. 마지막 병은 자기 팔목에 한 방울 시험했다. 어둠 속 윤곽은 선명해졌지만, 빛을 보고 나자 잔상이 길게 남았다.
“네가 먼저 부작용을 확인하는 건 실험이 아니야.” 해랑이 말했다.
“사용자가 겪을 수 있는 증상이잖아요.”
“너는 사용자가 아니라 약을 만든 사람이야. 너한테 나타난 부작용을 일반화할 수 없어.”
다온은 시험병을 내려놓았다. “언니가 빈 페이지를 남긴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누구한테도 이 약을 주지 않을게요.”
“그걸 약속으로 받아도 돼?”
“네.”
그들은 고가 북쪽으로 다시 갔다. 철거팀은 밤 작업을 중단했지만, 낮에 덩굴을 걷어 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청광화의 꽃봉오리는 닫혀 있었다. 전날보다 꽃 주변의 습도가 낮아졌다.
해랑은 기둥 틈을 살폈다. “이곳에만 씨앗이 몰려 있어. 바람이 아래에서 올라와 꽃가루를 밀어내는 구조야.”
“꽃은 얼굴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고 언니가 썼어요.” 다온이 말했다. “그럼 어떤 걸 기억하죠?”
“빛의 파장일 수도 있고, 냄새나 체온일 수도 있지.”
백련은 손을 내밀지 않고 약방에서 가져온 향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말린 꽃잎이 들었다. 꽃봉오리가 아주 조금 열렸다.
“선생님, 이건 뭐예요?”
“예전 원종 표본에서 떨어진 꽃잎이야.”
“선생님이 채취한 거죠?”
“그래.”
“왜 약방에만 보관했어요? 야생 터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잖아요.”
“그때는 곤충이 사라져서 씨앗을 맺지 못했어. 이 꽃잎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
“언니는 그걸 알고 있었어요?”
백련은 답하지 않았다.
다온은 꽃의 반응을 기록했다. 꽃잎은 향주머니가 가까워질수록 열렸지만 백련의 얼굴을 향하지 않았다. 꽃은 오래된 꽃잎의 냄새에 반응했다. 처음 본 밤에는 백련이 향주머니를 들고 꽃 가까이 섰기에, 사람 얼굴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다.
“꽃이 선생님을 기억한 게 아니네요. 원종의 냄새를 알아본 거예요.”
백련은 향주머니를 닫았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럼 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내가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을 사실로 만들면 보호구역에서도 잘못된 결정을 하게 돼요.”
기둥 뒤에서 누군가 기침했다. 약방에 포션을 문의한 유리온실 노동자, 박수현이었다. 그는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제 눈은 포션으로 고칠 수 있습니까?”
“눈이 어두워진 원인부터 알아야 해요.” 다온이 말했다. “약은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청광화의 빛을 잠깐 빌려 줄 뿐이에요.”
“그럼 그 빛을 쓰면 일을 계속할 수 있나요?”
“잠깐은요. 하지만 잔상이 남을 수 있어요. 특히 조명이 강한 온실에선 위험합니다.”
수현은 유리온실 지붕을 바라봤다. “거기서 일 안 하면 다음 달 월세를 못 내요.”
“그럼 오늘은 포션을 쓰지 말고, 제가 온실을 같이 살펴볼게요. 유리에 붙은 약품이 눈을 자극하는지 확인해요.”
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조사관 일이죠. 환자를 위험한 곳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것.”
“온실 안에서 무슨 일을 하세요?” 해랑이 물었다.
“야간에 환기창을 닫고, 꽃에 살충제를 뿌립니다. 며칠 전부터 불빛이 번져 보여요. 어제는 초록 잎이 푸르게 빛난다고 착각했어요.”
“청광화 포션을 쓰면 그 증상이 더 심해질 수 있어요.” 다온은 온실의 작업표를 살폈다. 사용 약품의 이름은 적혀 있었지만, 농도와 살포 시간은 비어 있었다. “우선 이 약품이 눈을 자극하는지 확인해야 해요.”
“회사에 말하면 작업이 멈춰요. 그러면 저랑 다른 사람들 일당도 끊깁니다.”
“그럼 오늘 밤에는 살포를 멈추고, 남아 있는 약품을 측정해도 될까요?” 해랑이 물었다. “당신이 동의해야 조사할 수 있어요.”
수현은 온실 장갑을 벗었다. 손등에는 잎 모양의 발진이 올라와 있었다. “제가 멈추면 다른 직원이 대신 들어갈 거예요.”
“그 직원에게 설명할 수는 있나요?”
“팀장은 듣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동료는 제 말을 들을지도 몰라요.”
다온은 손전등을 건넸다. “이건 붉은 천으로 덮여 있어요. 식물에 직접 비추지 않고 바닥의 위험한 곳을 확인할 수 있어요. 포션 대신 오늘은 이걸 써요.”
“당신 약을 만들었는데 안 주는 게 맞아요?”
“약이 당신을 해치지 않는다고 확인할 때까지는요.”
수현은 잠시 망설인 뒤 손전등을 받았다. 내일 아침 조사에 응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이름은 보고서에 적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해랑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조사 결과를 개인 비난이 아니라 약품 사용 방식의 문제로 기록하겠다고 약속했다.
“제가 직장을 잃으면 제일 먼저 약방에 올 겁니다.” 수현이 말했다.
“그때도 같이 방법을 찾을게요.” 다온이 답했다.
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아침 첫 조 전에 확인할 수 있어요?”
“갈게요.” 다온이 말했다.
꽃봉오리는 향주머니를 떼어 내자 다시 닫혔다. 그 아래 흙에서 작은 곤충 한 마리가 나왔다. 날개에는 은빛 먼지가 묻어 있었다.
해랑은 날개에 묻은 은빛 가루를 표본지에 옮겼다. “밤나방이 아니라 고가 배수구에 사는 박각시류야. 낮에는 바위 틈에서 쉬고, 물이 빠질 때 꽃에 와.”
“그럼 온실에서 낮에 꽃을 피우면 수분을 못 하겠네요.”
“맞아. 우리가 복원한 꽃을 온실에만 두면 다음 세대를 만들지 못해.”
백련이 향주머니를 내려놓았다. “당시 원종을 채집할 때 이 곤충은 이미 줄어들고 있었어. 꽃만 약방으로 옮기면 종은 살아도 생태는 죽는 셈이지.”
다온은 꽃 주변의 좁은 틈을 확인했다. 나방이 들어올 수 있도록 콘크리트 조각을 한쪽으로 밀어 길을 만들었다. 해랑은 그 모습을 기록했다.
“이 구멍을 크게 만들면 철거팀이 다시 막을 거예요.”
“그러면 곤충이 지나갈 최소한의 폭만 남기자. 사람의 발은 못 들어오지만 작은 날개는 드나들 수 있게.”
다온은 손가락 두 마디 너비의 틈을 확보했다. 꽃의 뿌리를 건드리지 않고, 나방이 숨을 바위 조각을 옆에 쌓았다. 작고 불완전한 보호였지만, 꽃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살아남게 할 방법이었다.
다온은 표본집의 빈 페이지에 그 곤충을 그렸다. 그림 밑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꽃가루를 옮기는 건 벌이 아니다.’
다온은 언니가 지운 페이지 뒤편을 빛에 비췄다. 마지막 한 줄의 압흔이 드러났다.
‘아래쪽 배수관을 따라가면—’
해랑은 지도에서 배수관을 따라가려 했다. 백련이 손을 얹어 종이를 멈췄다. “그 창고는 종자상 소유가 아니야. 약방이 예전에 임대한 곳이지.”
“언니가 거기서 뭘 찾았는지 아세요?” 다온이 물었다.
“모른다. 하지만 네 언니가 떠나기 전, 그쪽으로 가는 길을 물었어.”
“왜 말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그곳이 비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네 언니가 혼자 조사하러 가는 걸 막지 못했지.”
다온은 표본집을 덮지 않았다. “이번에는 셋이 같이 가요.”
문장은 거기서 끊겼다. 고가 아래 배수관 방향에는 약방 종자상의 창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