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1화: 열쇠고리의 웃음
이태경은 증거 봉투를 열기 전에 봉인 번호를 세 번 확인했다.
서울 외곽 창고에서 발견된 남자의 시신은 전날 오후에 수습됐다. 현장에서 수거한 물품은 지갑, 열쇠고리, 깨진 휴대전화였다. 경찰은 사망 시각을 새벽 2시 전후로 추정했지만, 창고 안에는 CCTV가 없었다. 태경이 맡은 일은 열쇠고리의 금속 표면에서 채취한 흔적과 녹음 장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건 음향 감정 대상이 아닙니다.” 선임 감정관 백주환이 말했다.
“금속 물체에서 소리가 기록될 리는 없죠.”
“그런데 왜 당신이 만지려고 하죠?”
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 장갑을 벗고, 열쇠고리를 손바닥에 올렸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는 순간, 어린아이의 웃음이 들렸다. 짧고 맑은 소리였다. 바로 뒤에 여자가 “하은아, 뛰지 마”라고 말했고, 문이 닫혔다.
태경은 손을 놓쳤다. 열쇠고리가 받침대에 떨어져 땡 소리를 냈다. 주환은 그 소리를 기록하고, 봉투에서 물체가 다시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했다.
“무슨 소리를 들었죠?”
“아이 웃음과 문 닫히는 소리입니다.”
“그걸 감정서에 쓸 수는 없어요. 파형이 없으니까.”
주환은 증거물에서 한 번 들은 소리는 재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감정실 마이크에는 아무것도 녹음되지 않았다. 태경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의 웃음이 생생하게 귀에 남아 있었다. 그는 보고서에 ‘물체 접촉 중 청각 이상, 결과 미기재’라고 적었다.
강력팀 형사 윤서진이 감정실로 찾아왔다. 창고 피해자는 한 달 전 실종 신고가 접수된 윤민석이었다. 서진은 현장에서 발견된 열쇠고리가 피해자의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유족은 그런 열쇠고리를 본 적 없다고 했다. 태경은 금속 장식에 새겨진 이니셜을 보여 줬다. ‘H.E.’ 피해자 이름과 맞지 않았다.
“그럼 다른 사람의 물건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서진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DNA와 지문 감정이 먼저입니다.” 주환은 태경을 대신해 답했다.
태경은 아이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 소리는 수사 정보가 될 수 없었다. 서진은 현장 사진을 열었다. 창고 바닥의 먼지 위에는 아이가 그린 듯한 동그라미가 있었다. 피해자의 손이 그 옆에 놓여 있었다. 서진은 그 그림을 본 적 있다고 했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태경은 증거물 목록을 확인했다. 열쇠고리는 창고 구석에서 발견됐고, 피해자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발견 위치와 수거 번호는 정상적으로 기록됐다. 그런데 인수증의 수거 시각이 현장 사진의 메타데이터보다 23분 빨랐다. 서진은 촬영 기기의 시계가 맞지 않았을 수 있다고 했다.
주환은 그 차이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사진기 시각, 현장 무전 로그, 수거 담당자의 차량 기록을 나란히 두고 확인했다. 세 자료 중 두 개는 2시 18분을 가리켰고, 인수증만 1시 55분이었다. 누군가 시간을 잘못 적었거나, 증거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수거됐을 수 있었다.
“누가 봉인했습니까?” 태경이 물었다.
“현장 감식팀입니다. 기록이 틀렸다고 증거를 의심할 수는 없어요.”
“의심이 아니라 확인입니다.” 서진이 말했다.
그녀는 현장 감식자에게 전화해 인수인계 내용을 확인했다. 감식자는 봉투를 손에 든 적은 없고, 다른 팀원이 대신 차에 실었다고 했다. 그 팀원의 이름은 수거 번호에 없었다. 서진은 현장에 다시 가서 보관 기록을 대조하겠다고 했다.
태경은 다른 증거물 봉투를 살펴봤다. 깨진 휴대전화에서 손가락 자국을 찾던 중, 플라스틱 케이스에 남은 작은 긁힘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동그라미 세 개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그는 장갑을 낀 채 접촉하지 않고, 확대경으로만 확인했다. 아이가 그린 그림과 모양이 비슷했다.
“휴대전화에서도 같은 소리를 들었나요?” 서진이 물었다.
“아직 안 만졌습니다.”
“그럼 만지지 마세요. 비교 표본부터 확보하죠.” 주환이 말했다.
주환은 감정 절차를 위해 같은 제조사의 빈 케이스를 요청했다. 태경은 그 빈 케이스를 만지면 마지막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결과가 정상적인 표본과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주환은 이번 감각 사용을 금지했다. 우선 객관적인 흔적부터 조사해야 했다.
서진이 감정실을 나간 뒤, 태경은 손을 씻었다. 물이 손목을 타고 내려오는데도 웃음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물체에 남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진실을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서진은 창고 현장으로 돌아가 열쇠고리의 주변을 다시 촬영했다. 바닥에 남은 원형 자국은 열쇠고리보다 컸고, 자국 가장자리에 먼지가 눌려 있었다. 열쇠고리는 사건 현장에 떨어진 뒤 놓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 손에 쥔 채 바닥에 내려놓았을 수 있었다. 서진은 그 자국과 피해자의 손 위치를 사진에서 겹쳐 봤다. 두 흔적 사이에는 발자국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발자국은 성인 구두가 아니라 작은 운동화 밑창이었다. 현장 감식자는 아이가 들어온 흔적은 없다고 했다. 출입문은 안에서 잠겼고, 창고 뒤편의 환기구는 사람 하나가 빠져나가기엔 좁았다. 서진은 그럼에도 발자국을 수거하고, 바닥에 남은 먼지의 방향을 확인했다. 발자국은 피해자를 향하지 않고 출구로 나가 있었다.
태경은 감정실에서 분석된 먼지 표본을 받아 현장 사진과 비교했다. 금속 조각에 묻은 회색 분진은 지하 주차장 시료와 비슷했지만, 정확히 같은 곳에서 나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서진에게 환기구 쪽의 표본도 채취해 달라고 부탁했다. 서진은 수사팀이 이미 현장을 떠났지만, 다시 들어가려면 보존 기록을 갱신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다시 가면 누군가가 증거를 옮길 수 있어요.”
“그럴 수도 있고, 이미 옮겼을 수도 있죠.”
서진은 재진입을 선택했다. 감식팀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태경은 창고에 들어가지 않았다. 밖에서 기다리며 사고 현장에 쓰인 환기팬 소리와 주변 도로의 교통음을 따로 녹음했다. 같은 소리가 다른 공간에서 어떻게 반사되는지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창고 안쪽에는 작은 장난감 자동차가 놓여 있었다. 차체에는 흙이 묻었고, 앞바퀴 하나가 부러졌다. 유족은 피해자가 장난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서진은 현장에서 발견한 물건인지 확인했지만, 목록에 올라 있지 않았다. 태경은 장난감을 만지지 않고 사진만 찍었다.
“누가 이걸 여기에 두었죠?”
감식팀은 창고를 봉쇄한 뒤 들어온 사람이 없다고 했다. 장난감 아래에는 미세한 물자국이 있었다. 창고 천장은 새지 않았고, 바닥도 건조했다. 태경은 그 물자국을 보며 어린아이의 웃음 뒤에 들린 문 닫힘 소리를 떠올렸다.
서진은 장난감을 봉투에 넣지 않았다. 먼저 누가 물건을 반입했는지 현장 일지와 출입문 기록을 확인했다. 열쇠고리의 증거 봉투가 도착하기 23분 전에 창고 문이 한 번 열렸다. 출입 기록에는 감식팀 차량의 센서 신호만 남아 있었고, 실제로 문을 열었다는 이름은 없었다.
태경은 소리가 어떤 물체에서 들렸다고 해서 그 물체가 사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 누군가 오래된 장난감을 나중에 가져왔을 수도 있었다. 서진은 유족과 피해자의 이웃을 다시 조사하기로 했다. 피해자는 아이와 접촉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창고가 있는 건물 2층은 8년 전 어린이 학원으로 쓰였다.
그 학원에는 분홍색 우산과 곰 인형이 남아 있었다. 실종된 하은의 물건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서진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관리인에게 폐기 기록을 요청했다. 관리인은 아이가 사라진 뒤 학원이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폐업 신고는 실종 신고보다 3개월 빨랐다.
태경은 사건 물품의 연속 수거 번호를 다시 조회했다. 어느 물건도 학원에서 공식 수거되지 않았다. 아이의 흔적은 기록상 존재하지 않는데, 물리적인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태경은 현장으로 돌아가기 전 피해자의 유족에게 열쇠고리 사진을 보여 줬다. 유족은 금속 장식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뒷면에 붙은 파란 테이프는 집에서 쓰던 것과 같았다. 피해자는 생전에 파란 테이프를 작은 물건에 감아 두는 버릇이 있었다. 유족은 사진을 보며 “그 아이가 다시 왔나 봐요”라고 중얼거렸다.
“그 아이가 누구죠?” 서진이 물었다.
유족은 입을 닫았다. 태경은 더 묻지 않았다. 그들이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질문을 반복하면, 진술은 더 흐려질 수 있었다. 서진은 유족에게 필요한 지원을 안내하고, 열쇠고리의 출처를 확인할 시간을 주었다. 그날 밤 늦게 유족은 학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자원봉사자 한 명의 이름을 전했다.
그 이름은 문하은의 실종 신고서에 적혀 있었다. 담당자는 8년 전 사건이 종결된 뒤 행방이 확인되지 않았다. 태경은 그 이름을 보고 손이 굳었다. 그는 어릴 적 들은 목소리가 같은 사람의 것인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서진은 그 말을 듣고 피해자의 누나에게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연락 가능한 보호자와 담당 수사관의 번호를 확인했다. 유족은 사진을 돌려받고 싶어 했지만, 원본은 수사 기록으로 보관해야 했다. 서진은 사본을 만들어 전달하고, 반환 가능한 시점을 설명했다. 태경은 그녀가 진술보다 사람을 먼저 안심시키는 모습을 보며, 증거가 남는다고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두 번째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인형이 도착했다. 실종 아동의 방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인형의 귀가 찢겨 있었고, 봉투에는 수거 번호가 비어 있었다.
주환은 태경을 말리려 했지만, 그는 이미 장갑을 벗고 있었다.
이번에는 같은 아이의 웃음이 들렸다. 그리고 웃음이 멈춘 뒤, 누군가 태경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