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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빌려드립니다2화

목소리를 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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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재생 버튼 앞에서

라온은 익명 음성 파일을 격리된 저장 공간으로 옮겼다. 원본은 열지 않았고, 서버 로그만 확인했다. 파일은 새벽 세 시에 외부 전송 경로를 통해 들어왔다. 계정 정보는 없었으며, 제목을 제외한 메타데이터는 삭제되어 있었다. 수진은 편집실에 들어와 파일을 발견하고 도겸에게 연락했다.

“출처를 모르는데도 보관하고 있어요?”

“열람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확인하려면 기록을 남겨야 해요.”

“내용이 저작권 침해 자료면 회사가 보유해서도 안 될 수 있어요.”

“그럼 법무 검토를 요청하죠. 다만 삭제 전에 로그를 보존해야 합니다.”

수진은 파일을 완전히 지우고 싶어 했다. 도겸은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온은 그가 거절을 반복할 때마다 자신의 의견을 대신 정리하지 않기로 했다.

“도겸 씨가 파일을 확인하기 원하지 않는다면 재생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소유권과 삭제 절차는 본인이 정해야 해요.”

“그 목소리는 형이 남긴 겁니다. 형은 공개를 허락한 적이 없어요.”

도겸은 형이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고 처음으로 말했다. 그는 형과 함께 작은 낭독 채널을 운영했는데, 형이 병원에 입원한 뒤부터 모든 녹음을 중단했다. 마지막 녹음에는 치료 전 대화가 들어 있었고, 가족끼리 보관하기로 했다. 최근 누군가가 그 파일을 이용해 도겸의 목소리를 흉내 낸 광고를 만들려 했다고 했다.

“그 파일이 형 목소리인지 확인해야 한다면, 내가 아니라 법무팀과 가족이 먼저 판단해야 합니다.”

“가족에게 연락하기 싫습니까?”

“연락은 할 겁니다. 다만 지금 당장 혼자 듣고 싶지 않아요.”

라온은 그가 선택한 범위를 적었다. 원본 재생 금지, 복제 금지, 가족 또는 법률 대리인과 소유권 확인, 관련 없는 제작진에게 공유 금지. 수진은 법무팀 검토를 신청했다. 오디오북 일정은 계속 미뤄졌다.

한편 번역문 수정 요청에는 답이 오지 않았다. 수진은 녹음실 일정을 비우지 못한다며 일부 장면을 기존 문장으로 진행하자고 했다. 라온은 다시 회의를 요청했다. 이번에는 노트북을 닫고 직접 말하기로 했다.

“이 장면은 주인공이 용서한다고 결정한 게 아닙니다. 문장을 줄이면 그 선택이 사라집니다.”

“청취자는 원문을 보지 않아요. 듣기 편한 문장이 우선이죠.”

“듣기 편하게 만들되, 인물의 뜻을 바꾸면 안 돼요. 수정안을 두 개 준비했어요.”

라온은 첫 수정안을 소리 내 읽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문장의 끝까지 버텼다. 도겸은 유리 너머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두 번째 수정안은 말을 짧게 끊어 망설임을 살렸다. 수진은 두 안을 번갈아 읽어 보고, 두 번째를 채택했다.

“이 버전으로 녹음해 보죠. 대신 오늘 한 번만.”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겸은 새 문장을 읽었고, 인물의 숨이 살아났다. 녹음실 안에서 그는 과장된 감정을 넣지 않았다. 문장 사이의 침묵을 남겼다. 녹음 파일을 들은 라온은 처음으로 자신의 번역이 다른 사람의 목소리 안에서도 온전히 남을 수 있다고 느꼈다.

세션이 끝났을 때 도겸은 녹음실 밖으로 나와 라온에게 물었다.

“내 목소리로 번역문을 읽는 게 불편하지 않아요?”

“내가 쓴 문장을 내 목소리로 읽는 것도 아직 어색해요.”

“그럼 서로 연습하면 되겠네요.”

“당신이 제 목소리를 고쳐 주는 건 원하지 않아요.”

“알아요. 숨이 끊기는 위치만 같이 찾기로 했잖아요.”

그는 손에 든 대본을 내려다봤다. “나도 형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듣지 않는 게 당신 선택이라면 그걸 지키면 돼요.”

“언젠가는 들어야 할지도 몰라요.”

“그때도 혼자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가족이 원하면 함께 들을 수 있고, 듣지 않는 것도 선택이에요.”

그날 오후 법무팀은 음성 파일의 전달 경로를 확인했다. 익명 발신자는 형의 녹음에 접근 권한이 없는 외주 편집자였다. 그는 도겸의 예전 작업 파일을 개인 저장소에 옮겨 둔 뒤, 최근 광고 회사에서 비슷한 목소리를 제작해 달라고 요청받았다. 편집자는 문제를 알리려 파일을 보냈지만, 도겸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파일을 보내는 방식이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법무팀 직원이 말했다. “원본은 바로 삭제하지 말고, 증거 보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도겸은 가족에게 연락했다. 그의 누나는 원본이 더 이상 개인 저장소에 남지 않도록 법적 통지를 하겠다고 했다. 형의 목소리는 가족의 것이기도 했지만, 공개 범위를 정할 권한은 형이 생전에 남긴 기록과 가족의 합의에 달려 있었다.

수진은 납품 일정을 다시 잡았다. 오디오북 공개일은 일주일 미뤄졌다. 그녀는 라온에게 번역 검수료를 추가 지급하고, 지연에 따른 책임을 제작사와 분리하겠다고 했다. 라온은 그 합의를 문서로 받았다.

도겸은 형의 파일을 듣지 않고도 전달 경위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파일을 영원히 듣지 않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듣는 날을 잡아 보기로 했다. 날짜는 정하지 않았다.

밤, 라온은 자기 가이드 녹음을 다시 열었다. 첫 파일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빨랐다. 두 번째는 숨이 고르게 이어졌다. 그녀는 새로운 테스트를 녹음하며 문장마다 표시한 쉼표를 지켰다. 파일을 저장한 뒤 삭제하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재생된 목소리는 낯설었지만, 적어도 도망치지는 않았다.

라온은 법무팀과 함께 파일 보관 목록을 확인했다. 그 외주 편집자가 예전에 참여한 프로젝트는 일곱 건이었다. 도겸과 형이 운영했던 채널에서 가져온 파일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제작 계약서에는 완성본에 대한 이용 허락만 있었고, 원본 음성의 장기 보관이나 다른 광고에 쓰는 권한은 없었다. 편집자는 이 사실을 알고도 개인 저장소에 파일을 옮겼다.

“그 사람은 문제가 커지기 전에 경고하려 했다고 합니다.” 법무팀 직원이 설명했다. “하지만 파일을 익명으로 보내면 받는 쪽이 출처를 검증할 수 없어요.”

“도겸 씨에게 바로 연락했으면 됐잖아요.” 라온이 말했다.

“연락처를 몰랐다고 합니다. 예전 소속사에 문의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고요.”

라온은 편집자의 설명을 기록하되 사실로 확인된 내용과 당사자의 주장을 분리했다. 그가 경고하려 했다는 이유가 보관 권한을 만들지는 않았다. 도겸은 가족과 함께 공식 이의 제기를 준비했고, 원본은 법률 절차에 따라 임시 보관한 뒤 회수하기로 했다. 그는 파일을 듣지 않고도 이 절차를 진행했다.

녹음실에서는 수정 대본을 다시 읽는 일이 이어졌다. 라온은 한 문장 안에 주어가 너무 늦게 나오는 문제를 발견했다. 듣는 사람은 누가 말하는지 놓칠 수 있었다. 수진은 글로 읽을 때는 괜찮지만 낭독에서는 어색하다고 했다. 라온은 번역을 고쳐 주어를 앞에 두고, 도겸은 인물의 성격에 맞게 속도를 조절했다. 이번에는 수진도 화면의 마감 시간을 보며 재촉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읽어 주세요.” 라온이 말했다.

도겸은 같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소리가 한 박자 늦게 이어졌다. 라온은 이번 버전이 인물의 결정을 더 정확히 담는다고 했다. 수진은 두 버전을 비교해 편집본에 반영했다.

휴식 시간에 도겸은 라온에게 물었다. “왜 직접 녹음하는 걸 그렇게 피하죠?”

“어릴 때 발표를 못 했어요. 틀릴까 봐 목소리가 안 나왔고, 그 뒤로 사람들 앞에서 읽는 걸 피했죠.”

“지금은 번역을 설명할 때도 목소리가 나와요.”

“한 문장씩 준비했으니까요.”

“준비하면 할 수 있다는 뜻이네요.”

“준비해도 못할 때가 있어요.”

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못할 수 있다는 조건도 같이 준비하면 되죠. 내가 하는 연기 지도처럼.”

라온은 그 말을 듣고도 낭독을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번역 토크 행사에서 한 문단을 읽는다면 원고와 시간을 미리 정하겠다고 했다. 그 정도는 자신의 선택으로 해 볼 수 있었다.

수진은 오디오북 납품을 하루 더 늦추고, 대신 편집 검수 시간을 확보했다. 도겸은 무리하게 녹음을 계속하지 않았다. 한 장면을 마친 뒤 녹음실에서 나와 목을 쉬었다. 라온은 그에게 진행률을 묻지 않고 다음 날의 수정 원고를 준비했다. 각자의 속도를 지키는 것이 프로젝트 전체를 지연시키는 일만은 아니었다.

법무팀은 편집자에게 파일의 출처와 저장 경로를 설명하는 진술을 요청했다. 그는 외부 광고사에 샘플을 보냈다는 사실은 부인했지만, 저장소에 다른 직원이 접근했을 가능성은 인정했다. 도겸은 그 주장을 바로 믿지 않았다. 제작사는 해당 광고사에 사용 중지 요청을 보내고, 회신이 올 때까지 관련 음성 자료를 별도로 추적하기로 했다.

라온은 오디오북 제작 파일에도 접근 권한표를 붙였다. 원본 녹음, 편집본, 홍보용 발췌본을 구분하고, 누가 어떤 파일을 내려받았는지 기록했다. 수진은 관리 일이 늘어난다고 불평했지만, 나중에 어떤 자료가 어디에 쓰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며 동의했다.

“이런 표를 처음부터 만들었으면 파일 문제도 빨리 찾았겠죠.” 수진이 말했다.

“처음부터 알 수는 없었어요. 지금부터 바꾸면 됩니다.” 라온이 답했다.

수진은 수정된 관리표에 서명했다. 도겸은 그 과정을 보고 아무 말 없이 다음 장면의 대본을 가져왔다. 그의 침묵은 동의나 용서가 아니었다. 다만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현재의 표시였다.
도겸은 녹음 시간을 새로 정해 수진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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