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빚을 갚는 신관

2화: 첫 해빙
해빙선은 밤새 산허리를 넘어왔다. 아침이 되자 눈 아래 숨은 개울이 소리를 냈고, 신전의 돌계단은 물로 번들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봄이 왔다며 기뻐했지만, 씨앗 창고 문은 여전히 얼음에 막혀 있었다.
소아는 입김을 불며 잠금쇠를 흔들었다. “문이 더 단단해졌어요.”
미엘은 손으로 얼음의 두께를 재려다 멈췄다. “안쪽에서 얼어붙은 물이 문을 밀고 있습니다. 겉을 녹이면 압력이 커질 거예요.”
라칸은 갑옷의 어깨를 문에 댔다. 서리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지만, 금은 더 길게 벌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빼며 숨을 삼켰다.
“갑옷이 버티지 못합니다.”
“당신이 밀면 문이 떨어질 거예요.” 미엘이 말했다.
“안에는 종자가 있습니다.”
“문을 부수면 씨앗도 물에 잠겨 썩어요.”
소아는 문 앞에서 소리쳤다. “그럼 어떻게 하죠? 봄이 왔는데도 아무것도 심지 못하면 다음 겨울에 굶어요.”
미엘은 계산판에 손을 얹었다. “문을 녹이는 대신 물길을 빼야 합니다. 창고 바닥에 배수구가 있어요?”
“있었어요. 어머니가 돌로 막았죠.”
“왜요?”
“도둑이 씨앗을 빼갈까 봐.”
라칸이 계단 아래 배수로를 살폈다. 물이 창고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얼음이 녹으며 수로가 막혀 역류한 것이다. “배수구를 열면 문 안쪽 압력도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는 얼음 갑옷을 벗으려 했다. 미엘이 손목을 잡았다. “갑옷을 벗으면 추위에 몸이 상합니다.”
“얼음이 있어야 배수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가를 치르는 방식이 또 희생뿐입니까?”
라칸은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그럼 당신이 대신 들어가겠습니까?”
“필요하다면요.”
“그건 동의가 아니에요.” 소아가 끼어들었다. “저도 어릴 때 배수로를 청소했어요. 입구는 좁지만 어른 한 명은 기어갈 수 있어요.”
그들은 수로 입구를 파냈다. 소아가 도끼로 얼음을 깨고, 미엘은 얕은 물을 양동이에 퍼냈다. 라칸은 얼음 갑옷의 손으로 굳은 돌을 밀었다. 돌이 움직이지 않자 그의 어깨 문양이 번쩍였다. 균열에서 얼음 가루가 떨어졌다.
“그만해요.” 미엘이 말했다.
“조금만 더.”
“당신이 부서지면 문을 열 사람도 없어져요.”
그는 멈춰 섰다. 그 말이 명령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은 제가 다치는 게 싫습니까?”
“당신이 다치면 다른 사람이 당신의 자리를 대신해 희생할 테니까요.”
“그것만입니까?”
미엘은 대답을 미뤘다. 소아가 수로 안에서 돌을 두드리는 소리를 냈다. “여기 막힌 부분이 있어요. 혼자서는 안 움직여요.”
라칸은 갑옷을 벗지 않은 채 수로 입구에 엎드렸다. 미엘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소아는 안쪽에서 돌을 밀었다. 작은 틈으로 물이 쏟아졌다. 수로가 터지며 흙탕물이 세 사람의 얼굴을 덮쳤다. 라칸은 기침하며 밖으로 굴러 나왔다. 그의 어깨 갑옷이 깨졌고, 손바닥에 돌조각이 박혀 있었다.
“살아 있네요.” 미엘이 말했다.
“그렇게 보입니다.”
“다음에는 먼저 도와 달라고 하세요.”
“도움을 요청하는 건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도 빚을 혼자 계산하는 건 익숙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으려 해요.”
소아가 젖은 흙을 퍼내며 웃었다. “서로 익숙하지 않은 일을 같이 배워 보세요. 지금은 저 문을 봐야 하니까요.”
배수구가 열리자 창고 문을 누르던 물이 빠져나갔다. 얼음이 천천히 얇아졌다. 소아는 잠금쇠에 열쇠를 꽂았다. 열쇠가 반쯤 들어가다 멈췄다. 문 안쪽에서 무언가 걸려 있었다.
“씨앗 자루가 문을 막았나 봐요.”
그들은 문을 억지로 열지 않고, 창고 옆 환기구를 넓히기로 했다. 미카 같은 장인이 있었다면 쉽겠지만, 돌벽을 깎으면 씨앗이 쏟아질 위험이 있었다. 소아는 오래된 창고 설계도를 기억해 손가락으로 위치를 짚었다. 라칸은 남은 얼음 갑옷을 벗어 도구를 감싸고, 미엘은 각자 어느 정도 힘을 쓸지 정했다.
“제가 안에 들어가겠습니다.” 소아가 말했다.
“위험해요.” 라칸이 반대했다.
“제가 이 창고를 관리합니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요.”
“그렇다면 제가 밖에서 줄을 잡겠습니다.” 미엘이 말했다. “당신이 멈추라고 하면 바로 끌어낼게요.”
소아는 허리에 밧줄을 묶고 환기구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기어가는 소리가 났다. 얼음 조각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 미엘은 밧줄의 긴장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창고 안에서 자루가 끌리는 소리가 났고, 그 뒤로 작은 울음이 들렸다.
“소아 씨?”
“아이예요. 씨앗 자루 뒤에 숨어 있어요.”
미엘은 밧줄을 당기지 않았다. 소아가 아이를 먼저 끌어낼 수 있도록 느슨하게 풀었다. 잠시 후 환기구로 어린 남자아이가 기어 나왔다. 얼굴은 창백했고, 양손에는 씨앗 몇 알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름이 뭐니?”
“토비.”
“왜 창고에 들어왔어?”
“엄마가 씨앗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우리 밭은 봄이 오기 전에 얼었어요.”
소아는 창고 밖으로 나와 젖은 옷을 털었다. “몰래 들어온 건 잘못이야. 하지만 씨앗은 네가 가져가도 돼. 빚으로 적지는 않을 거야.”
“그럼 제가 갚을게요.”
“갚는 대신, 자라면 다음 집에 나눠 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택을 장부에 쓰려던 미엘은 잠시 멈췄다. “이건 채무가 아니라 자발적인 약속이네요.”
소아는 처음으로 열쇠를 돌렸다. 물이 빠진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안쪽에는 자루 열 개가 남아 있었고, 두 자루는 이미 물을 먹어 썩기 시작했다. 씨앗은 절반 이상 건질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남은 자루를 밖으로 옮겼다. 한 집은 땅을 갈고, 다른 집은 모종을 키우기로 했다. 누구도 같은 몫을 지지 않았다. 아이가 많은 집은 씨앗을 맡았고, 힘이 약한 노인은 나눔 장부를 읽어 주었다. 미엘은 각자의 기여를 적되, 누구에게 얼마의 빚이 생겼다고 쓰지 않았다.
라칸은 손바닥에서 돌조각을 빼냈다. 미엘은 천으로 상처를 감쌌다. “당신이 기억을 잃었을 때, 혹시 봄을 대신 빌렸다는 사실까지 잊었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은 왜 기억합니까?”
“당신이 장부를 읽어 줬으니까요.”
“장부가 아니라 사람이 알려 줬다고 해 주세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미엘, 당신은 제 이름을 장부 밖에서도 기억해 줍니까?”
“제가 기억할 수 있는 한은요.”
그 말은 약속이라기보다 바람에 가까웠다. 그래도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깨진 갑옷의 서리 문양이 잠시 빛났다가 잦아들었다.
마을 바깥 해빙선이 창고 문턱까지 다가왔다. 장부의 빈칸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날 사람들은 첫 씨앗을 나눠 심었다. 흙에 묻힌 씨앗 하나가 녹은 물을 받아들였다.
미엘은 장부의 마지막 칸에 새 문장을 적었다. ‘씨앗을 나눈 토비: 다음 수확 때 자발적으로 이웃과 나눔.’ 채무가 아닌 약속은 장부에 처음으로 남았다.
그날 저녁, 씨앗을 나눠 받은 이웃들이 창고 앞에 모였다. 남은 자루 가운데 썩은 것을 치우는 일을 두고 말다툼이 시작됐다. 한 농부는 토비의 어머니가 먼저 씨앗을 가져갔으니 그 몫을 갚아야 한다고 했다. 다른 이는 아이가 굶주릴 뻔했는데 씨앗 몇 알을 빚으로 적는 건 잔인하다고 맞섰다.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으면 다음 겨울에도 같은 일이 벌어져요.” 미엘이 말했다.
“기록하면 누군가 빚을 집니다.” 농부가 답했다. “신전은 늘 그랬어요.”
미엘은 장부를 닫았다. “그럼 우리가 기록할 문장을 같이 정하죠. 누가 무엇을 받았는지만이 아니라, 누가 어떤 조건을 원했는지도요.”
토비의 어머니가 문간에 나타났다. 그녀는 손에 작은 낫을 들고 있었고, 아들의 어깨를 감쌌다. “우리는 씨앗을 훔치러 보낸 게 아니에요. 아이가 아픈 동생을 먹이려고 나섰어요.”
소아가 다가가 말했다. “누가 당신을 벌하겠다고 하면 내가 앞에 설게요. 하지만 다음에 필요할 때는 문을 두드려요. 몰래 들어오면 얼음에 갇힐 수 있어.”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으면요?”
“그럼 내가 책임지고 열어 줄게.”
그 말에 농부가 언성을 높였다. “네가 전부 나눠 주면 우리 집 애들은 뭘 먹어?”
“저도 알아요. 그래서 남은 씨앗을 전부 주겠다는 게 아니에요.” 소아는 자루를 가리켰다. “썩기 전에 살릴 수 있는 몫을 정하고, 다음 수확 때 돌려받을 몫은 강요하지 않겠다고 적을 겁니다. 못 갚아도 벌을 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빚이 아니네.”
“맞아요.”
농부는 한참 서 있다가 자기 집 씨앗 자루 하나를 앞으로 밀었다. “내 집은 종자가 남아. 대신 밭을 갈 사람이 필요해.”
토비의 어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아이들과 밭을 갈게요. 종자는 수확하면 먼저 돌려드릴게요.”
미엘은 이 조건을 장부에 옮기려다 두 사람에게 먼저 읽어 주었다. 그들은 문장을 하나 바꾸고, 이름을 적을지 말지 직접 정했다. 토비의 어머니는 자기 이름을 쓰고 농부는 이름 대신 손도장을 찍었다. 누구도 신전 서약을 대신하지 않았다.
라칸은 말없이 지켜보다가 깨진 갑옷 조각 하나를 장부 받침으로 놓았다. “여기에 이름을 적지 않아도, 내가 봤다는 건 기억하겠습니다.”
미엘은 그를 바라봤다. “그 기억도 담보로 내놓지는 마세요.”
“이건 제 것이니까요.”
그가 미소를 지었고, 그녀는 처음으로 그가 갑옷 안에서 웃는 얼굴을 보았다. 봄바람이 창고 처마를 스쳤다. 얼음물이 떨어지며 바닥에 둥근 자국을 만들었다.
그 순간, 얼음 밑에서 라칸의 목소리로 누군가 속삭였다. “미엘을 잊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