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빚을 갚는 신관

1화: 장부의 이름
“수호기사 라칸. 봄을 대여한 값으로 기억 하나를 담보로 적었습니다.”
미엘은 신전 회계실 중앙에 놓인 장부를 다시 읽었다. 세로로 길게 찢긴 종이에 이름이 줄줄이 적혔다. 라칸의 이름은 맨 위였고, 그 아래에는 마을 사람 쉰셋의 이름이 있었다. 대여량은 네 달치 봄, 담보는 기억 하나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의 채무자 칸에는 마을 전체가 표시돼 있었다.
“이건 개인 대여가 아니에요.”
아르덴 신관장은 희끗한 눈썹을 찌푸렸다. “수호기사가 마을을 지키겠다며 대신 계약했다. 장부상으론 그가 책임자야.”
“그럼 왜 주민 이름이 채무자 칸에 있죠?”
“기적을 받은 이들이니까.”
미엘은 손에 든 계산판을 내려놨다. “기적을 요청했습니까? 대가를 설명 들었습니까?”
“신전은 겨울을 견딜 수 없는 이들에게 봄을 주었다.”
“제가 묻는 건 동의입니다.”
신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종이 울렸다. 해빙선을 알리는 첫 종이었다. 계절신전의 시계는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마다 한 번씩 울렸다. 창문 아래 처마 끝에 맺힌 고드름이 떨어져 돌바닥에 깨졌다.
미엘은 장부를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회색 돌계단 아래에는 얼음 갑옷을 입은 기사가 서 있었다. 라칸의 갑옷은 눈보다 푸른빛이 돌았고, 어깨에 난 금 사이로 맨살이 보였다. 그는 자기 몸에서 서리가 떨어지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이 제 장부를 맡았습니까?”
“회계관 미엘입니다. 이 기록에 서명했어요?”
“예.”
“마을 사람들에게 대가를 나눈다고 설명했나요?”
“아니요. 봄이 없으면 씨앗이 얼어 죽고, 사람들도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내놓았군요.”
라칸은 왼쪽 어깨의 균열을 눌렀다. “내가 기억 하나를 내놓으면 신전은 봄을 빌려준다고 했습니다.”
“어떤 기억인지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동의했어요?”
“마을을 살릴 수 있다면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미엘은 장부의 모서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이 기록에는 당신 혼자 동의한 게 아니에요. 쉰세 명이 같이 빚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라칸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내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신전이 잘못 기록했거나, 당신이 모르는 약속이 있었겠죠.”
“장부를 고칠 수 있습니까?”
“틀린 기록은 고칠 수 있어요. 하지만 대가를 지우지는 못합니다.”
“그럼 마을 사람들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이 대신 묻는 건 안 됩니다.”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뜻이죠?”
“당신은 이미 그들의 봄을 대신 빌렸어요. 이제 그들이 어떻게 갚을지 직접 결정해야 합니다.”
라칸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에서 얼음 조각 하나가 떨어져 돌계단에 부딪혔다. 작은 금이 더 길게 번졌다.
미엘은 그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갔다. 눈밭 위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겨울 내내 얼어 있던 배수로가 열리며 검은 흙이 드러났다. 집집마다 창문이 열렸고, 사람들은 봄 냄새를 맡으려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을 광장에 모인 주민들이 장부를 보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 이름이 왜 여기 있어요?” 씨앗 창고지기 소아가 물었다.
“봄을 빌려 썼으니까요.” 신전 서기관이 대답했다.
“내가 빌려 달라고 했나요?”
“라칸 경께서 마을을 위해 계약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갚으면 되지 왜 우리가 빚을 져요?”
사람들의 시선이 라칸에게 향했다.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미엘은 그에게 대신 답하지 말라고 눈짓했다.
소아가 장부를 낚아채려 했지만 서기관이 손을 막았다. 종이가 찢어질 듯 당겨졌다. 라칸이 가운데 끼어 장부를 보호했다. 그의 얼음 장갑이 종이를 스치자 가장자리가 서리로 굳었다.
“놓으세요.” 미엘이 말했다. “원본은 훼손되면 안 됩니다.”
“이 종이가 우리를 묶고 있어요.” 소아가 소리쳤다. “불태워야 해요.”
“태우면 기록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누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 확인할 길이 사라져요.” 미엘이 손을 뻗었다. “저도 이 장부에 책임이 있습니다. 제 가족이 예전에 신전에서 치료를 받았고, 저는 그 빚을 갚고 있어요.”
주민들이 조용해졌다. 미엘은 자신의 개인 장부를 펼쳤다. 어머니의 약초 치료와 겨울 침상 대여가 한 줄씩 기록돼 있었다. 그녀는 빚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 신전이 누군가에게 선택권 없이 대가를 넘긴다면 자기 숫자도 다시 봐야 했다.
“빚을 공개한다고 해결되진 않아요.” 소아가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무엇을 빌렸는지, 누가 동의했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
“기억은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한 노인이 물었다.
라칸이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잃은 기억은 되돌릴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약했어요?”
“예.”
“무슨 기억을 잃었는지도 모르면서요?”
“예.”
그 대답은 주민들을 더 화나게 했다. 한 청년이 라칸의 갑옷을 주먹으로 쳤다. 얼음이 금이 가며 그의 손등이 베였다. 라칸은 움직이지 않았다. 미엘이 청년의 손을 붙잡아 상처를 눌렀다.
“그를 때려도 기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럼 누구를 탓해야 하죠?”
“장부를 쓴 신전도, 대신 계약한 라칸도, 확인하지 않은 회계관도요. 저를 포함해서요.”
그녀는 책임의 숫자를 하나로 정리하지 않았다. 누구도 혼자 갚게 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먼저 기록하겠다고 했다. 소아는 씨앗 창고 열쇠를 들었다.
“봄이 오면 종자를 뿌릴 거예요. 그런데 창고 문은 얼음이 완전히 녹아야 열립니다. 지금 대여된 봄이 그 문까지 녹일 수 있는지부터 보여 주세요.”
라칸은 계단을 내려가 창고를 향했다. 미엘이 그의 옆을 걸었다. 장부에 적힌 대여 기간은 네 달이었지만, 첫 해빙선은 오늘 겨우 마을 끝에 닿았다. 봄이 약속보다 느렸다.
창고 문에는 검은 얼음이 두껍게 붙어 있었다. 소아가 도끼로 두드리자 날이 튕겨 나왔다. 라칸은 갑옷 낀 손을 문에 댔다. 서리가 그의 손목 위로 올라왔다. 얼음은 조금도 녹지 않았다.
“이상합니다.” 미엘이 장부를 펼쳤다. “계절 대여장에는 해빙 시작일이 오늘로 적혀 있어요.”
“봄의 대가가 모자란 겁니까?” 라칸이 물었다.
“장부에 적힌 대가는 기억 하나예요. 주민의 이름은 수혜자로만 있어야 합니다.”
미엘은 얼음 표면에서 희미한 글씨를 발견했다. 그 글씨는 장부와 다르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렀다. ‘갚지 않은 씨앗의 약속.’
소아가 창고 문에서 물러섰다. “그 약속은 우리 집안의 일이에요.”
그녀는 열쇠를 꺼냈다가 다시 앞치마 안에 넣었다. “예전엔 저 문을 열 때마다 씨앗 자루부터 셌어요. 열둘이었는데, 봄에 나가면 아홉만 돌아왔죠. 굶주린 집에 나눠 주거나 쥐가 갉았거나.”
“누가 어디에 나눠 줬는지는 기록되어 있나요?” 미엘이 물었다.
“장부엔 손실이라고 적혔겠죠.”
“실제로는 빚을 갚은 셈일 수도 있겠군요.”
“도와준 일에 값을 매기면 그건 또 다른 빚이에요.”
소아의 말에 미엘은 계산판을 꺼내지 않았다. 숫자를 쓰기 전에 무엇을 셀지부터 정해야 했다. 라칸은 얼음 위의 문양을 살폈다. 녹지 않은 얼음 아래엔 작은 씨앗들이 갇혀 있었다. 누군가 문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어낸 것처럼 문턱에 모여 있었다.
“이 씨앗은 작년에 수확한 것입니까?” 그가 물었다.
“아니요. 우리 어머니가 남긴 오래된 종자예요.” 소아는 잠금쇠에 손을 얹었다. “겨울이 길어져도 살려 두려고 보관했어요.”
“그런데 왜 문에 걸렸죠?”
“그날은 눈이 너무 깊어서 문까지 갈 수 없었어요. 아이들이 먹을 게 없었고… 제가 씨앗을 가져다 줬어요. 돌아오면 다시 채우겠다고 약속했죠.”
“누구에게요?”
소아는 라칸을 봤다. “당신의 어머니.”
라칸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저는 어머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알아요. 그 기억을 잃은 건 당신이죠. 하지만 약속을 한 건 당신 어머니였어요.”
미엘은 장부의 수혜자 이름을 훑었다. 소아의 어머니 이름은 없었다. 채무자 명단에는 마을 사람의 이름만 반복됐고, 이름 없는 칸이 중간중간 끼어 있었다. “이 장부는 씨앗을 받은 사람들의 기록을 빼고, 갚아야 할 사람만 적었어요.”
“그래서 봄이 멈췄습니까?” 라칸이 물었다.
“아직 단정할 수 없어요.” 미엘은 얼음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누락된 약속이 있으면 장부의 계산이 끝나지 않은 건 맞습니다.”
소아는 열쇠를 꺼내 잠금쇠에 대 보았다. 얼음이 열쇠를 삼킬 듯 달라붙자, 그녀는 급히 손을 놓았다. 손바닥에는 붉은 자국이 생겼다. 라칸이 장갑을 벗어 건네려 했지만 소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 손으로 열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또 누군가 대신 빚을 지겠죠.”
“열릴 때까지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미엘이 말했다.
“회계관이요?”
“기록할 사람으로요. 대신 결정하지 않고요.”
소아는 처음으로 미엘의 손에 든 장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약속은 적어도 장부에 남겨 주세요.”
라칸은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약속입니까?”
“아직 말할 수 없어요.”
미엘은 장부를 닫았다. “그럼 봄이 어디서 막혔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기억의 대가가 아니라, 오래된 채무가 걸려 있을 수 있어요.”
바닥의 해빙수가 창고 문 아래로 흘렀다. 물이 닿은 얼음 속에서 누군가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라칸은 그 소리를 듣고 눈을 감았다.
“누구 목소리예요?” 미엘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잃어버린 기억입니까?”
“아마도요.”
그는 눈을 떴다. 얼음 갑옷의 균열 너머로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 목소리가 제 기억이라면, 그 사람은 봄을 빌리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 겁니다.”
미엘은 장부를 다시 열었다. 빚진 사람 이름 가운데 라칸의 이름이 유독 흐릿했다. 그 아래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이름처럼 비어 있는 칸이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