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검객의 소송 대필

1화: 쓰지 않은 문장의 서명
청명정의 아침 재판은 붓을 씻는 소리로 시작됐다. 허소란은 물그릇을 갈고, 증언용 종이를 세 장씩 나눴다. 한 장은 당사자, 한 장은 기록소, 마지막 한 장은 판관에게 갔다.
“오늘 첫 피고는 남기현입니다. 백산검문 제자를 살해한 혐의.”
재판 보조가 피고인 이름을 읽었다. 소란은 붓끝을 닦다가 멈췄다. 백산검문은 오빠 소명을 파문한 문파였다.
“제가 대필해도 됩니까?”
“배정된 기록자는 당신입니다.”
“다른 기록자를 요청하겠습니다.”
“요청은 판관이 승인해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소란은 빈 종이를 들었다. “그럼 제가 씁니다. 단, 당사자가 직접 확인한 말만 옮길 겁니다.”
남기현이 들어왔다. 목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고, 허리에는 손잡이가 부러진 검집이 매달렸다. 그는 누구에게도 인사하지 않고 피고석에 앉았다. 문계수 판관은 그를 한 번 본 뒤 물을 마셨다.
“진술할 수 있습니까?”
기현은 목을 가리키고 고개를 저었다. 판관이 소란을 보았다.
“질문을 한 번에 하나씩 드리겠습니다.”
소란은 종이에 이름과 날짜를 썼다. “그날 북관에 있었습니까?”
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뽑았습니까?”
그의 손가락이 검집 위에서 멈췄다. 잠시 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소란은 그 움직임을 그대로 문장으로 옮겼다. ‘북관에는 있었으나, 검을 뽑지 않았다.’ 기현은 글을 읽고 검지를 들었다. “아니오”라는 뜻인 듯했다. 소란은 그가 바꿀 부분을 기다렸다.
그는 종이 오른쪽 아래의 ‘뽑지 않았다’를 가리켰다. 소란이 앞에 물음표를 그리자 기현은 손을 멈췄다.
“다시 질문할게요. 검이 당신 손에서 나갔습니까?”
기현은 주먹을 폈다. 칼을 뽑는 흉내를 내지 않고, 종이를 손바닥에 눌렀다. 소란은 ‘검은 본인이 뽑지 않았다’고 수정했다.
기현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소란은 글씨 압력이 한 단어에서 세게 눌린 것을 봤다. ‘본인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검을 뽑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누군가의 검을 막지 못했다고 말하려는 건가.
“누가 검을 뽑았습니까?”
기현은 입을 열었다. 흉터 아래에서 숨만 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세 번 두드렸다. 셋째 소리가 가장 약했다.
소란은 바로 적지 않았다. “누구인지 이름을 쓰기 싫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겁니까?”
기현은 시선을 내렸다.
판관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기록자는 추측을 쓰지 마시오.”
“추측은 쓰지 않았습니다. 답하지 않은 것도 기록해야 해서요.”
기현은 소란을 봤다. 그는 자기 손가락으로 종이 왼쪽 가장자리를 눌렀다. 종이가 살짝 구겨졌다. 그 압력은 이름을 쓸 때보다 강했다.
소란은 ‘피고는 검을 뽑은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기현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그는 첫 페이지에 자신의 서명을 했다. 소란이 옮긴 문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그때 증인석에 젊은 여성이 들어왔다. 정라희는 검문 제복의 단추를 풀지 않은 채 손에 든 나무패를 판관에게 내밀었다. 패에는 칼자국이 세 줄 나 있었다.
“저는 북관의 경비였습니다. 문이 열렸을 때 남기현이 안에 있었습니다.”
“그가 먼저 문을 열었습니까?” 소란이 물었다.
라희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나무패의 긁힌 자국을 엄지로 문질렀다. “문은 안에서 열렸어요. 하지만 그가 열었는지는 못 봤습니다.”
“그럼 그가 열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 말은 제가 하지 않았어요.”
소란은 ‘문은 안에서 열렸다’고 적었다. 라희는 문장이 맞는지 확인하고 서명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목이 움찔했다. 잉크통증이 올라온 듯, 그녀는 증언패를 놓칠 뻔했다.
“대필된 문장이 기억을 아프게 합니까?” 소란이 물었다.
“제가 직접 말한 문장인데도요?”
“글로 옮길 때 뜻이 달라지면 그럴 수 있습니다.”
라희는 종이를 다시 읽었다. “아니에요. 이 문장은 제가 한 말이에요. 아픈 건, 그 문밖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서예요.”
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검사관이 막으려 했지만 판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기현은 나무패의 세 번째 칼자국을 가리킨 뒤, 자기 목을 짚고 두 손으로 문을 미는 동작을 했다.
“그는 목소리를 잃기 전에 문을 열라고 외쳤다는 뜻입니까?” 판관이 물었다.
기현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라희의 증언패 위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세 번째 칼자국에서 멈췄다.
라희는 그를 보았다. “그날 문이 열린 다음,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어요. 제가 경고를 늦게 한 건 그때였어요.”
“누구였습니까?”
그녀는 대답을 삼켰다. 소란은 그 침묵을 문장으로 채우지 않았다. 그녀는 빈칸을 남기고 붓을 내려놓았다.
검사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고가 현장에 있었고, 검을 뽑은 자를 숨기고 있다면 공동정범 아닙니까?”
기현은 검집을 들어 보였다. 부러진 끝에는 피가 아니라 흰 나무 가루가 묻어 있었다. 검사관은 그걸 보지 않은 척했다.
“그 검집은 현장에서 발견된 검과 다릅니다.”
“그럼 실물 대조를 요청하겠습니다.” 소란이 말했다.
“기록자가 변론하지 마시오.”
“저는 변론이 아니라 물증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판관은 검집을 받아 들었다. “재판 전까지 증거실에 보관하라. 오늘은 피고의 진술을 끝내지.”
기현은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말을 못했지만 사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소란은 그의 표정을 기록하지 않았다. 문장에 없는 감정을 대신 적을 수는 없었다.
심리가 끝나자 보조가 서명문서를 거두었다. 기현은 마지막 장에 서명하려고 붓을 잡았다. 그의 오른손 검지 관절이 굳어 있어, 붓이 종이를 긁었다.
“제가 대신 써도 될까요?” 소란이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느리게 붓을 눌러 자기 이름을 썼다. 남기현. 마지막 획이 끝나자 종이 한가운데서 검은 잉크가 번졌다.
소란은 붓을 내려놓았다. 잉크는 그녀가 쓰지 않은 문장으로 퍼졌다.
‘나는 문을 열어 주었다.’
기현의 손이 떨렸다. 그는 그 문장을 보자 목의 흉터를 움켜쥐었다. 소란은 종이를 접으려 했지만, 판관이 손을 뻗어 막았다.
“문장을 지우지 마시오.”
“제가 쓴 게 아닙니다.”
“피고가 서명했습니다.”
“그 문장에 서명한 게 아닐 수 있어요.”
기현은 종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통증을 참는 듯 이마에 땀이 맺혔다. 소란은 종이를 잡아당기지 않았다.
“이 문장을 인정합니까?”
기현은 손을 들어 ‘아니오’를 표시하려다 멈췄다. 그는 문장 위에 자기 엄지를 올렸다. 잉크가 피부에 묻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통증이 있습니까?”
그는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동의하지 않는 문장이에요. 서명만으로 인정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판관은 종이를 가져갔다. “그 문장은 기록으로 남긴다. 누가 썼는지 다음 심리에서 확인하겠다.”
기현은 소란을 바라봤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기 목을 가리킨 뒤 손바닥을 펴 보였다. 말이 없다는 뜻인지, 그날 문을 열었다는 뜻인지 소란은 알 수 없었다.
“이 문장이 당신 기억을 아프게 합니까?”
기현은 붓을 달라고 했다. 손가락을 다 펴지 못한 채 종이에 두 글자를 썼다.
‘기억.’
그가 붓을 놓자, 서명 밑의 문장에 한 줄이 더 나타났다.
‘그날 문 안에는 나만 있지 않았다.’
소란은 숨을 멈췄다. 판관은 새 문장을 읽고 증거실 문을 잠그라고 명령했다. 재판 보조들이 문을 닫는 동안, 바깥 복도에서 누군가 칼집을 바닥에 끄는 소리가 들렸다.
검사관이 곧바로 종이를 가져가려 했다. “피고가 직접 서명한 뒤 나타난 문장입니다. 자백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서명은 앞서 대필한 진술을 확인하는 표시입니다.” 소란이 말했다. “추가 문장에 동의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어요.”
“피고는 문을 열었다고 인정한 셈이지.”
“문을 열었다는 말과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다릅니다.”
판관은 종이를 다시 펼쳤다. “피고인, 그 문장을 인정합니까?”
기현은 손바닥을 책상 위에 올렸다. 고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붓을 달라고 한 뒤 문장 아래에 한 글자를 적었다. ‘문’.
“어떤 문입니까?” 소란이 물었다.
기현은 손가락으로 자기 앞의 문, 그다음 복도 끝의 문을 차례로 가리켰다. 두 문은 방향이 달랐다. 그는 다시 종이에 ‘북관’이라고 썼다.
“북관의 문을 열었다는 뜻입니까?”
기현은 붓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서명하지 않았다. 그 한 글자와 장소를 적는 데도 목 아래 흉터가 수축했다. 그는 통증을 참으며 자기 손으로 쓴 문장을 바라봤다.
“이건 대필이 아닙니다.” 소란이 말했다. “그가 직접 쓴 보충 진술입니다. 다만 아직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판관은 검사관의 손을 막았다. “원문을 자백으로 확정하지 않는다. 피고가 직접 확인할 때까지 보충 진술로 봉인하라.”
기현은 자기 글에 손을 올렸다가 떼었다. 이번에도 잉크통증이 그의 기억을 파고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지만, 종이를 접지 않았다.
소란은 기록자 도장을 찍지 않았다. 판관이 종이를 봉투에 넣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당사자 서명이 없는 문장은 아직 완성된 진술이 아니라고 답했다. 그녀의 먹 묻은 엄지가 봉투 가장자리를 눌렀다. 오빠의 파문 기록도 누군가 완성되지 않은 문장을 대신 닫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현은 그쪽을 바라보며 손바닥을 책상 위에 올렸다. 붓을 들지 않았는데, 종이 가장자리에 그의 손자국이 새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