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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은 신전을 탈출했습니다2화

성녀님은 신전을 탈출했습니다

성녀님은 신전을 탈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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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저주의 맥동과 은빛 열쇠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이벨린은 손목에 감긴 은빛 사슬을 조용히 그러쥐었다. 쇠사슬 고리가 서로 부딪치며 낼 수 있는 미세한 마찰음조차 억누르려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봉인실 육중한 철문 아래쪽, 좁은 배식구 틈새에서 다시 한번 가느다란 쇳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사각. 찰그랑.

경비 사제들의 난폭한 발길질이나 교대할 때 울리는 무거운 쇠빗장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바깥에서 매우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철문 하단의 홈을 더듬는 소리였다.

이벨린은 차가운 돌바닥 위로 무릎을 굽히고 기어갔다. 손목의 사슬이 무겁게 바닥을 긁었지만 그녀는 소매를 바닥에 대어 소음을 흡수했다.

배식구 틈새로 손가락을 뻗자 차가운 석벽 틈새에 무언가 닿았다.

가느다란 은빛 금속 막대였다. 겉면은 몹시 얇았으나 정교하게 홈이 파여 있는 보조 열쇠였다. 그 열쇠 끝에는 작은 양피지 쪽지가 단단한 실로 묶여 있었다.

이벨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열쇠와 쪽지를 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손바닥 크기의 양피지에는 신전의 공식 문장 대신 은밀한 손가락 압인 하나만이 희미한 푸른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다섯 개의 꽃잎 형태를 띤 각인이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곁에서 보좌하던 시녀 세라 벨로아만이 사용하는 개인 인장이었다.

‘세라...’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대공 암살 누명을 쓰고 봉인실로 끌려오던 날, 세라는 차가운 사제들 뒤편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신전의 거대한 위압 앞에서 그녀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세라는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대사제의 눈을 피해 봉인실 보조 열쇠를 빼돌려 이곳까지 밀어 넣은 것이다. 쪽지 뒷면에는 아주 작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단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새벽 종이 세 번 울릴 때 교대 경비가 흩어집니다.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이벨린은 입술을 짓씹으며 쪽지를 잘게 찢어 입에 물고 삼켰다. 어떤 증거도 남겨서는 안 되었다. 은제 열쇠는 손목 사슬의 안쪽 천을 덧댄 틈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바로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거친 고함과 함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사단장, 비키시오! 대사제 전하의 직속 특령이오!"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집행 보좌 사제 루카스의 음성이었다.

"아직 정오까지 시간이 남았소. 봉인 점검은 기사단의 소관이오."

이어 들려온 것은 낮고 단단한 카시안의 목소리였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섞인 어조였다.

"점검 따위로 지체할 때가 아니란 말이오! 대사제 전하께서는 저 요망한 계집이 광장에 오르기 전 혀를 자르거나 침묵의 쐐기를 박아 신성 모독의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하라 명하셨소! 광장에서 무슨 망발을 할지 알고 그냥 둔단 말이오?"

철문 바깥에서 거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벨린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마르켈 대사제는 자신이 광장에서 신탁의 진실을 밝힐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처형 직전 성녀의 목소리마저 빼앗아 완벽한 인형으로 만들어 제단에 올리려는 간악한 계산이었다.

"처형 인계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죄인의 신병은 흑요 기사단에 귀속되었소."

카시안의 서늘한 음성이 쇠문을 뚫고 울렸다.

"집행 전 죄인의 신체를 훼손해 광장의 의식을 난잡하게 만드는 것은 규율 위반이오. 물러서시오, 사제."

"기사단장! 감히 대사제 전하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뜻이오? 네놈들의 저주를 억누르는 성유가 누구 손에서 나오는지 잊었단 말인가!"

사제의 목소리에 독기가 서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카시안의 묵직한 군화가 바닥을 짓밟는 파열음과 칼집이 가슴팍을 거칠게 밀쳐내는 둔탁한 소리였다.

"크억!"

"두 번 경고하지 않소. 문 앞을 지키는 것은 나의 검이오. 한 걸음만 더 다가서면 신성 모독이 아니라 기사단 방해죄로 벨 것이오."

복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제 루카스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분을 삭이지 못하고 멀어지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철컥.

무거운 쇠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이벨린은 신탁석 앞 돌바닥 위에 정자세로 섰다. 옷소매 안쪽의 은제 열쇠가 살갗을 파고들며 차가운 감촉을 전해 주었다.

철문이 천천히 열리고 카시안 루엔이 들어섰다.

그의 오른손에는 사제가 들고 왔던 검은 목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상자 겉면에는 은빛 룬이 새겨져 있었고 틈새로 소름 끼치는 냉기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를 봉인하는 고문 도구, 침묵의 쐐기였다.

카시안은 철문을 등 뒤로 닫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깥 빗장을 완전히 걸어 잠그지 않고 느슨하게 닫아 두었다.

그는 묵묵히 다가와 신탁석 아래에 검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대사제의 명입니다."

카시안의 회색 눈동자가 이벨린의 얼굴을 향했다.

"성녀님의 목소리를 봉인하고 광장으로 호송하라는 지시였습니다."

"단장님께서는 그 명령을 집행하러 오신 겁니까."

이벨린은 물러서지 않고 물었다.

"아니면 사제의 손을 쳐내고 저를 지키려 오신 겁니까."

카시안의 턱선이 단단히 굳어졌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누구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광장의 의식이 신전의 뜻대로 완벽하게 치러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의 말은 거칠었으나 속내는 명확했다.

카시안 역시 신전의 기만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품에서 철제 족쇄 열쇠를 꺼내 들었다.

"결박 상태를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카시안이 이벨린의 손목 사슬로 손을 뻗었다.

그가 반 걸음 더 다가선 순간 그의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 흑요 문양이 기이한 붉은빛을 뿜어내며 폭발하듯 팽창했다.

"큭...!"

카시안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족쇄 열쇠가 바닥을 뒹굴었다.

이벨린은 숨을 들이켰다.

카시안의 쇄골에서 시작된 검은 결정들이 살갗을 뚫고 솟구치듯 날카롭게 곤두서고 있었다. 그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를 내뿜으며 그의 오른쪽 뺨과 관자놀이까지 핏줄을 타고 번져 나갔다.

"단장님!"

카시안의 몸 전체가 극심한 오한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갔고 입술은 푸른빛으로 변했다. 검은 문양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어 흰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발작이 아니었다.

이벨린은 직감했다. 조금 전 마주쳤을 때 일어났던 미세한 파동이 신탁석 원문의 기운과 이벨린의 존재에 반응해 억눌려 있던 저주의 둑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카시안은 숨을 헐떡이며 왼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가... 까이 오지 마십시오...!"

그는 이를 악물며 경고했다.

"이 저주는... 닿는 자의 생명력을... 얼려 죽입니다... 물러서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고통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이벨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무릎을 꿇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벨린의 손끝에 옅은 금빛 파동이 어리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공명의 힘이었다.

"성녀의 기적은 명령으로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이벨린은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님, 제게 손을 맡기시겠습니까. 당신이 짊어진 고통을 제게 보여 주시겠습니까."

카시안의 흐려진 회색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렸다.

"무슨... 미친 짓을... 이것은 신전의 축복 따위로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지배하거나 일방적으로 치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당신의 상처를 함께 나누려는 것뿐입니다."

이벨린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공명은 상대의 명확한 승인이 없이는 온전히 발동하지 않는다. 억지로 밀어 넣는 힘은 상대의 영혼을 파괴할 뿐이었다.

카시안의 쇄골에서 검은 피 한 방울이 배어 나왔다.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그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이벨린의 금안을 보았다.

거기에는 동정이나 자만이 없었다. 오직 살고자 하는 자의 치열한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맘대로 하십시오."

카시안이 낮게 뱉어냈다.

그것은 허락이었다.

이벨린은 주저 없이 손을 뻗어 카시안의 드러난 오른쪽 목덜미, 검은 결정이 가장 짙게 솟구친 살갗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화아악!

순간 이벨린의 머릿속으로 지독한 빙하의 한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숨이 멎을 것 같은 통증이었다.

골수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흐느낌과 비명 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살려줘...’

‘내 아이를 대신 살려다오...’

‘죽고 싶지 않아...’

그것은 카시안이 대신 짊어진 타인들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죽어야 할 운명들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며 쌓아 올린 죽음의 찌꺼기들이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되어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체온이 사라지고 기억이 지워지는 대가 속에서 남자는 홀로 이 시린 지옥을 버텨 온 것이었다.

"아아악...!"

이벨린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이 허공으로 흩날렸고 손끝을 타고 오른 검은 기운이 이벨린의 팔뚝까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극심한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이벨린은 손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금빛 공명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상처를 억지로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얼어붙은 그의 혈관 속으로 따뜻한 새벽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당신 혼자 짊어질 무게가 아닙니다.’

이벨린의 마음이 공명을 타고 카시안의 의식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파지직.

카시안의 목덜미를 뒤덮고 있던 검은 결정들이 미세하게 금이 가며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타오르던 붉은빛이 잦아들고 맹렬하게 요동치던 흑요 문양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얼어붙었던 카시안의 피부 위로 희미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카시안의 거친 호흡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떨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수년 동안 단 한 번도 멎은 적 없던 뼈마디의 시린 통증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손을 짚고 있는 이벨린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차갑게 얼어붙어 파랗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타인의 저주를 나누어 가진 대가였다.

카시안은 황급히 손을 뻗어 이벨린의 손목을 쳐내듯 밀어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 두려움에 가까운 당혹감이 그의 단단한 얼굴을 뒤흔들었다.

"내 저주를 건드리면... 당신의 목숨도 온전치 못합니다."

"보셨지 않습니까."

이벨린은 떨리는 손을 옷자락에 문지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당신의 저주는 신이 내린 형벌이 아닙니다. 사람의 목숨을 짊어진 서약의 무게일 뿐입니다. 그리고... 제 공명은 그 무게를 덜어낼 수 있습니다."

카시안은 할 말을 잃은 채 그녀를 응시했다.

신전의 대사제들은 언제나 그에게 성유를 내리며 말했다. 신에게 순종하고 교단의 명령에 따라 피를 묻혀야만 저주의 파멸을 늦출 수 있다고.

그러나 눈앞의 성녀는 신전의 성유 따위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와 고통의 분담으로 저주를 잠재웠다.

이벨린의 소매가 스치며 안쪽에 숨겨져 있던 은빛 열쇠의 끝부분이 찰나의 순간 은은한 빛을 냈다.

카시안의 시선이 그 은빛 광택에 머물렀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봉인실의 자물쇠를 풀 수 있는 보조 열쇠였다. 신전 내부의 누군가가 그녀에게 탈출의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카시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열쇠를 빼앗지도 않았고 죄인을 문책하지도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바닥에 놓여 있던 침묵의 쐐기 상자를 집어 들었다.

"대사제에게는... 죄인이 극도로 쇠약해져 쐐기를 박을 경우 광장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라 보고하겠소."

카시안의 목소리는 다시 평소의 건조한 어조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 회색 눈동자 속에 담긴 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사슬의 빗장은 단단합니다. 하지만 손목이 부러질 각오가 있다면 벗어날 틈은 생길지도 모르지."

그는 더 이상 이벨린을 쳐다보지 않고 뒤돌아섰다.

철문 앞에 선 카시안은 손잡이를 잡고 낮게 읊조렸다.

"새벽 종이 세 번 울리면 교대 경비병들이 복도를 비웁니다. 그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철문이 열리고 카시안의 검은 망토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이번에는 바깥의 묵직한 쇠빗장이 걸리지 않았다. 오직 가벼운 걸쇠 하나만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정적이 다시 봉인실을 감쌌다.

이벨린은 떨리는 숨을 길게 내쉬며 소매 안쪽에서 은빛 보조 열쇠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 끝에 카시안의 차가운 저주 잔향이 남아 여전히 저려 왔지만 가슴속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댕―. 댕―.

대성전 상층부에서 새벽을 알리는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 종소리였다.

이제 곧 세 번째 종이 울릴 것이다.

이벨린은 망설이지 않고 은빛 열쇠를 손목에 감긴 은제 족쇄의 열쇠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딸깍.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십육 년간 그녀를 옭아매었던 신전의 사슬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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