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님은 신전을 탈출했습니다

1화: 신탁석 아래의 원문
새벽신 루메아의 대성전 지하 3층은 낮과 밤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방을 채운 푸른 마력 촛불은 온기를 내뿜는 대신 습한 석벽의 냉기만 드러냈다. 이벨린 아르세나는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손목에 감긴 은빛 봉인 사슬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슬이 움직일 때마다 차가운 쇠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내일 정오, 그녀는 대성전 중앙 광장에서 처형될 예정이었다.
죄명은 대공의 암살을 예고한 가짜 신탁을 유포하고 신성 교단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사제회가 작성한 판결문은 단호했고 왕실의 서명은 순식간에 끝났다. 십육 년 동안 신전이 고른 ‘새벽의 성녀’로 살아가던 삶의 끝치고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손쉬운 몰락이었다.
이벨린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병자를 낫게 하고 전쟁을 축복하라 하셨습니까."
목소리는 좁은 봉인실 안에서 헛되이 맴돌다 사라졌다.
그녀는 언제나 사제들이 건네준 화려한 양피지를 읽었다. 금박으로 장식된 문장들은 왕가와 대귀족의 입맛에 맞게 다듬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성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눈물을 흘리며 헌금을 바쳤다. 그러나 이벨린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고결한 목소리로 낭독하던 신탁문이 실은 마르켈 대사제의 방에서 며칠 전 미리 작성된 기만이라는 사실을.
이벨린은 무릎을 일으켜 감옥 한가운데 서 있는 고대 신탁석 앞으로 다가갔다.
높이 2미터에 달하는 검은 석판은 신전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교한 금박 문양과 붉은 봉인 왁스로 덮여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성한 빛을 머금은 기적의 산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벨린이 은빛 사슬을 늘어뜨린 채 손가락을 석판 하단에 가져대자 낯선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랐다.
그것은 이벨린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공명’의 힘이었다.
공명은 신전이 주장하듯 신이 내린 일방적인 기적이 아니었다. 닿는 대상의 결을 읽고 그 안에 숨겨진 결함이나 기억의 파편과 감각을 나누는 미세한 울림이었다.
이벨린은 손끝에 아주 작은 빛을 모아 금박이 얇게 벗겨진 석판 귀퉁이를 짚었다. 수백 년 동안 사제들이 덧칠한 금가루와 축복용 기름 밑바닥에서 정체불명의 홈이 잡혔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상단의 신탁문과 달리 바닥 가까운 구석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도구로 깊게 새겨 넣은 고대 문자 조각이 숨어 있었다.
이벨린은 사슬의 마찰음을 억누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금박 먹을 살짝 긁어내자 오랜 세월 잊혀졌던 문장이 손가락 끝에서 선명한 형태를 드러냈다.
‘성녀는 문을 열고 기사는 그 문을 닫으리라.’
이벨린의 금안이 크게 흔들렸다.
신전의 공식 교서 어디에도 이런 문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제들은 언제나 성녀가 신의 뜻을 전달하는 거울이며 기사는 성녀의 순례를 호위하는 영광스러운 칼날이라 가르쳤다. 하지만 석판 바닥에 피처럼 붉은 묵흔으로 굳어 있는 원문은 전혀 다른 소명을 말하고 있었다.
새벽의 문. 그리고 문을 여는 성녀와 닫아야 하는 기사.
"이것이... 조작되기 전의 진짜 신탁이란 말인가."
이벨린이 중얼거리는 순간 지하 봉인실의 육중한 철문 너머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쿵. 쿵.
묵직한 철제 갑주가 바닥을 짓누르는 발소리였다. 경비 사제들의 경쾌하고 가벼운 걸음걸이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무게감이었다. 이벨린은 황급히 옷소매로 석판 하단의 긁힌 자국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쇠로 된 빗장이 풀리고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두운 복도의 그림자를 찢으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검은 머리채 아래로 드러난 회색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굳어 있었고 숯처럼 검은 흑요 갑주 위로는 핏빛 문양이 옅게 맴돌고 있었다.
흑요 기사단장 카시안 루엔이었다.
그는 교단 내부에서 ‘처형인’이라 불리는 자였다. 신전의 명을 받아 귀족과 이단의 목을 베고 사람들의 고통과 저주를 몸으로 받아낸 대가로 오른팔과 쇄골까지 검은 흑요 문양이 새겨진 남자였다.
카시안은 봉인실 중앙에 서 있는 이벨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봉인실 안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카시안의 손에는 대사제의 붉은 인장이 찍힌 처형 인계서가 들려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녀님."
카시안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낮았다. 위로나 동정 따위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핵심뿐인 말투였다.
이벨린은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십육 년 동안 사제들 앞에서는 늘 차분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했지만 처형을 몇 시간 앞둔 지금은 더 이상 그들의 연극에 맞춰 줄 이유가 없었다.
"기사단장께서 직접 제 시신을 인수하러 오신 겁니까."
"집행 및 시신 인계 명령입니다. 내일 정오, 대성전 광장에서 의식이 시작됩니다."
카시안은 담담히 말하며 처형 인계서를 신탁석 옆 나뭇대에 올려놓았다.
그가 서류를 놓기 위해 이벨린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이벨린은 그의 오른쪽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 흑요 문양이 미세하게 요동치는 것을 보았다.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핏줄처럼 비틀렸고 카시안의 턱선이 굳어졌다.
그의 체온은 기이할 정도로 낮았으며 몸에서는 짙은 쇠비린내와 차가운 재 냄새가 풍겼다.
이벨린은 숨을 조용히 가다듬고 그를 향해 손을 뻗지 않은 채 나지막이 물었다.
"단장님께서는 이 신탁석이 하는 말을 믿으십니까."
카시안의 회색 눈동자가 이벨린에게 향했다.
"신탁은 사제들의 영역입니다. 기사는 오직 내린 명령과 검 결과에만 답합니다."
"명령이라 하셨습니까."
이벨린은 차가운 사슬을 흔들며 신탁석 하단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 석판 아래에는 사제들이 덧칠한 금박이 굳어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탁이 하늘에서 내린 불변의 글이라 말하지만 정작 이 돌이 품은 진짜 문장은 사제들의 붓 끝에 짓밟혀 숨겨져 있습니다."
카시안의 눈매가 서늘하게 찌푸려졌다.
"처형을 앞두고 신전을 모독하는 발언은 죄목만 늘릴 뿐입니다."
"모독이 아닙니다. 저는 지난 십육 년간 사제들이 써 준 거짓을 낭독했습니다. 대공께서 서거하실 것이라 예고한 적도 없고 왕국의 전쟁을 축복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가짜 신탁의 죄인으로 몰아 죽이려 합니다. 이것이 신의 뜻입니까 아니면 사제들의 계산입니까."
이벨린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단단하고 명료한 어조가 봉인실의 찬 공기를 갈랐다. 카시안은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이벨린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려 한 순간, 카시안의 오른팔을 감싸고 있던 흑요 문양이 미친 듯이 맥동했다.
"크윽..."
카시안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오른손으로 검 자루를 꽉 쥐며 오른팔의 저주를 억누르려 했으나 흑요 문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한기는 오히려 이벨린의 공명 기운과 부딪치며 거세게 날뛰었다.
이벨린은 놀라 카시안의 쇄골 근처를 바라보았다.
그의 피부 위로 솟아오른 검은 결정은 단순한 흉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대신 짊어진 대가로 굳어 버린 저주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저주의 파동은 이벨린이 방금 신탁석 바닥에서 읽어 낸 고대 원문의 울림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카시안은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비틀거리지 않고 이벨린의 눈을 직시했다.
"성녀님의 억울함이 무엇이든 간에 내일 정오의 처형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그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사제회가 결정했고 왕실이 승인했습니다. 당장 이 봉인실을 나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장님 역시 그 사제들의 손에 묶여 계시지 않습니까."
이벨린이 지적하자 카시안의 회색 눈동자에 옅은 균열이 생겼다.
카시안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흑요 인장을 꺼내 처형 인계서 하단에 묵직하게 찍어 눌렀다. 붉은 인장 위로 검은 기운이 스며들며 서류가 완성되었다.
카시안은 서류를 거두어 품에 넣고 뒤돌아섰다.
그가 철문 문고리를 잡았을 때 카시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건조하게 덧붙였다.
"새벽이 오기 전까지 체력을 아끼십시오. 광장으로 나가는 길은 깁니다."
철문이 다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쇠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지하 복도에 길게 울려 퍼졌다.
봉인실 안에 홀로 남겨진 이벨린은 신탁석 바닥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손가락 끝에 남아 있는 원문의 감각과 방금 전 카시안의 몸에서 요동치던 흑요 저주의 한기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신전은 성녀를 이용해 거짓을 퍼뜨렸고 기사를 이용해 그 거짓을 지켜 왔다.
그러나 신탁석 석판 밑에 숨겨진 원문은 전혀 다른 미래를 말하고 있었다. 성녀는 문을 열고 기사는 문을 닫는다.
이벨린은 차가운 사슬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내일 정오, 순순히 단두대 위로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사제들이 만들어 놓은 가짜 신탁의 감옥에서 벗어나 이 땅에 묻힌 진짜 신화의 조각을 찾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바로 그 순간 굳게 닫힌 봉인실 문 밖, 어두운 지하 복도 저편에서 조용한 마찰음이 울렸다.
딸깍.
경비병의 무거운 열쇠패 소리가 아닌, 금속 선이 쇠창살 사이를 은밀하게 긁고 지나가는 듯한 미세한 소리였다. 이벨린은 고개를 들고 어둠이 짙게 깔린 봉인실 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