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양봉가의 옥상 약속

2화: 폭염의 시험
오전 아홉 시, 옥상의 온도는 서른넷이었다. 미래는 종이 지도를 펼쳤다. 열화상 화면의 주황색 띠를 준호가 표시한 벌의 귀환선과 겹쳤다. 두 선은 배수구에서 만났다. 벌이 돌아오는 방향에 뜨거운 바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젯밤보다 열점이 넓어졌어요.” 미래가 말했다.
준호는 벌통 앞에 다가가지 않은 채 귀환 횟수를 세었다. “바람 때문에 돌아오는 벌이 아래로 꺾여요. 통풍구가 저쪽이면 벌통까지 뜨거운 공기가 밀릴 수 있습니다.”
“폐쇄된 냉각 배관이 정말 비활성인지 확인해야겠네요.”
미숙은 관리실에서 가져온 도면을 펼쳤다. 옥상 냉각 배관은 두 해 전 철거 예정으로 분류돼 있었다. 그러나 철거 예산은 다음 연도로 넘어갔고, 배관은 밸브만 잠근 상태로 남아 있었다. 도면에 표시된 밸브실은 지하 기계실 안쪽이었다.
“폐쇄라면서요.” 준호가 말했다.
“폐쇄 예정이었어요.” 미숙이 목소리를 낮췄다. “업체는 누수가 없다고 보고했는데, 실제로 작동하는지는 제가 몰랐어요.”
“문서는 보고서일 뿐이죠. 현장에서 확인해야 해요.” 미래는 장비 가방을 들었다.
셋은 지하 기계실로 내려갔다. 금속문을 열자 눅눅한 먼지 냄새와 모터의 떨림이 느껴졌다. 배관은 벽을 타고 천장 위로 올라가 옥상으로 이어졌다. 도면에는 폐쇄 표시가 찍혀 있었지만, 계기판 바늘은 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배관에 손을 대기 전에 미래는 적외선 온도계를 댔다. 차가워야 할 금속이 미지근했다.
“순환이 있어요.”
미숙이 숨을 들이켰다. “그럼 누가 밸브를 열었죠?”
미래는 손잡이의 먼지를 봤다. 먼지에 선명한 손자국이 나 있었다. 최근에 누군가 돌렸다. 그런데 밸브를 끝까지 열지도, 닫지도 않았다. 반쯤 걸친 상태였다.
“이대로 두면 압력 차가 생길 수 있어요. 바로 조작하면 위험합니다. 설비업체를 불러야 해요.”
“오늘 같은 날 업체가 언제 오겠어요?” 준호가 물었다.
“제가 자격 있는 기술자와 통화하겠습니다. 그 전까지는 옥상에 추가 출입하지 마세요.”
“벌들은 기다려 주지 않아요.”
“그럼 먼저 물과 그늘을 해결합시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은 옥상 쪽 계단을 향했다. 미래는 그가 장갑을 벗었다 다시 끼는 걸 보았다. 조급함이 손끝에 먼저 왔다. 그녀도 냉각 설비를 혼자 열어 보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이전의 사고는 서둘러 판단해서가 아니라, 확실해질 때까지 보고를 미뤄서 생겼다. 이번에는 두 실수를 모두 피해야 했다.
옥상에 도착하니 차광막 아래 벌들이 평소보다 낮게 날고 있었다. 준호는 벌통 앞에 물받이를 놓고 나무 부표를 올렸다. 그는 벌이 빠지지 않을 정도의 수면과 통풍을 유지하며 하나씩 채웠다. 미래는 열화상 화면을 따라 이동할 수 없는 구역을 표시했다. 배수구 방향으로 난 안전 통로가 통째로 막혔다.
“그쪽은 원래 통로예요.” 미숙이 말했다.
“그럼 수리와 출입이 겹치겠네요.”
“주민들 옥상 산책로는 오늘 오후에도 예약되어 있어요.”
“지금은 폐쇄해야 합니다.”
미숙이 반발했다. “그러면 민원이 더 커져요. 어린이 생태교실도 오후에 열기로 했습니다.”
“뜨거운 배관이 지나가는 곳에서 아이들 수업을 할 수 없어요.”
“취소하면 학부모가 나한테 전화하겠죠.”
미래는 열화상 카메라를 그녀에게 건넸다. “직접 보세요. 수치만 보여드리는 게 아니에요. 여기 바닥은 신발 밑창이 부드러워질 정도로 달아올랐습니다.”
미숙은 화면을 들여다보다 얼굴을 굳혔다. 열이 길게 이어지는 선을 따라 벌통에서 멀어지는 벌들이 빛처럼 움직였다. “오늘은 수업을 취소하겠습니다. 대신 입주민들에게 이유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해요.”
“그건 제가 설명할게요.” 준호가 말했다. “벌 때문이라고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벌이 원인이라고 과장하지도 않고요.”
미래는 휴대용 온도계를 들고 옥상 바닥 여러 지점을 찍었다. 바람이 바뀔 때마다 열점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졌다. 배관은 뜨거운 물을 내보내는 게 아니라, 고여 있던 열을 옥상으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누군가 밸브를 반쯤 연 이유를 알아야 했다.
오후 두 시, 업체 기술자 강태석이 도착했다. 그는 밸브를 보자마자 장갑을 벗었다.
“이걸 이 상태로 두면 펌프가 망가집니다.”
“누가 조작했는지 아십니까?” 미래가 물었다.
“지난주 관리단에서 옥상 냉각을 다시 연결해 달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다만 승인 문서가 없어서 점검만 하라고 했죠.”
미숙이 눈을 크게 떴다. “제가 그런 요청을 한 적 없어요.”
태석은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관리단 대표번호에서 왔습니다. 이름은 남기지 않았고요.”
“대표번호는 누구나 쓸 수 있잖아요.” 미래가 말했다.
태석은 임시 배관을 연결해 압력을 낮추자고 했다. 냉각수를 빼면 옥상 열점은 가라앉겠지만, 지하 상가의 냉방까지 중단될 수 있었다. 반대로 현 상태를 유지하면 펌프가 멈출 수 있었다. 미숙은 상가 입점주들이 더위를 견디지 못할 거라고 걱정했다. 준호는 옥상에서 벌이 죽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한쪽을 끄는 선택만 있나요?” 미래가 물었다.
태석은 임시 우회관을 가리켰다. “이 배수 라인을 열면 압력을 분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닥으로 뜨거운 물이 조금 흐를 겁니다. 접근 통제와 흡수포가 필요해요.”
“몇 분이면요?”
“배수 확인까지 십 분. 밸브 조작은 제가 하겠습니다.”
“주민 통로를 닫고, 미끄럼 방지 매트와 흡수포를 둘게요.” 미래가 말했다.
준호가 벌통 쪽을 바라봤다. “그 작업 동안 벌들이 놀라지 않게 제가 차광막을 잡겠습니다.”
“벌통 위에서 하지 마세요. 접근 금지선을 정하고, 제가 이동 동선을 알려드릴게요.”
그들은 우회 작업을 시작했다. 미숙은 계단 입구에 붉은 안전띠를 둘렀고, 준호는 새 그늘막을 낮게 펴지 않고 바람이 지나갈 틈을 남겼다. 태석은 밸브를 조금씩 열었다. 뜨거운 물이 배수관으로 흐르며 쇳소리를 냈다. 첫 물줄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튀었다. 흡수포가 밀려나고 뜨거운 물이 통로 쪽으로 번졌다.
“뒤로!” 미래가 외쳤다.
준호는 차광막 줄을 놓지 않았다. 바람이 세게 불면 망이 벌통에 덮일 수 있었다. 미래는 바닥의 매트를 발로 눌러 물길을 틀었다. 물이 장갑 안쪽으로 스며들어 손등을 데웠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배수구 앞에 흡수포를 밀어 넣었다. 태석이 밸브를 닫았다가 압력을 확인했다. 바닥으로 번지던 물줄기가 잦아들었다.
“손 괜찮아요?” 준호가 물었다.
“괜찮아요. 손목만 젖었어요.”
“어제도 다쳤잖아요.”
“당신은 벌통 앞에 있었고요.”
그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그녀를 보았다. 미래는 그 시선이 걱정인지 지적인지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아직 작업 끝난 거 아니에요.”
밸브를 안정시키자 이상 열점은 배수구 주변으로 좁아졌다. 준호는 물받이의 부표를 확인한 뒤 넘치지 않게 작은 통을 하나 더 붙였다.
“봉군은요?” 미래가 물었다.
“지금은 안정됐어요. 오늘 밤까지 더 봐야 합니다.”
“수치와 관찰을 같이 적어 주세요. 다음 조치에 필요해요.”
“당신도 손 상태를 기록해요. 방금 뜨거운 물에 닿았습니다.”
미래는 대꾸하려다 말았다. 준호는 그녀의 손목에 깨끗한 거즈를 감았다. 꽉 조이지 않았고, 맨살을 만지기 전에 먼저 물었다. “제가 감아도 될까요?”
“네. 장갑을 벗기지 않는 범위에서요.”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매듭을 묶었다. 미래는 거즈 끝을 내려다봤다. 현장에서는 손이 빠른 사람이었다. 오늘은 매듭을 천천히 지었다.
옥상 문 쪽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생태교실을 기다리던 입주민들이 취소 안내를 받고 항의하러 올라온 것이다. 미숙은 내려가서 상황을 설명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카메라 화면을 휴대전화로 찍지 않고, 미래에게 먼저 촬영 가능 여부를 물었다.
“열점 사진은 설비 조사 기록으로만 써도 되나요?”
“사람이나 벌통이 식별되지 않게 잘라 내면 가능합니다. 온도 범례는 남겨 주세요.”
준호가 덧붙였다. “벌통 내부 사진은 제가 허락하기 전엔 안 됩니다.”
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는 내가 민원 공지에 그 조건도 적겠습니다.”
그녀는 옥상 문을 열고 주민들에게 내려오라고 말했다. 아이 하나가 난간 너머로 벌통을 보려 하자 어머니가 어깨를 감싸 뒤로 물렸다. 준호는 망이 잘 고정되어 있다고 설명했고, 아이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관리업체가 밸브 봉인을 새로 달았다. 태석은 정식 수리 견적을 내겠다고 약속했고, 미숙은 냉각 공사 요청 통화 기록을 확인하겠다고 했다. 미래는 임시 조치 보고서에 열점 원인 추정과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항을 구분해 적었다. 원인란에는 ‘폐기 예정 배관 내 잔류 순환 가능성, 조작 주체 미확인’이라고 썼다.
“관리단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일까요?” 미숙이 물었다.
“확인한 사실을 쓰는 겁니다. 미숙 단장님이 조작했다고 쓴 건 아니에요.”
“그래도 누군가는 이 기록을 보고 책임을 묻겠죠.”
“그 책임을 피하려고 사실을 빼면, 다음엔 더 크게 다칠 수 있어요.”
미숙은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서명을 했다. “내가 모른다고 말하는 게 불편하네요.”
“모르는 걸 확인하는 게 관리자의 일이기도 하죠.”
준호는 봉군 기록장에 그날의 관찰을 적었다. 귀환 횟수, 물 소비량, 바람 방향, 벌의 낮은 비행. 마지막 줄에는 ‘차광막 임시 고정, 내일 오전 재확인’이라고 썼다. 그는 기록장을 미래에게 보여 줬다.
“보고서에 숫자를 옮겨도 됩니다. 벌통 안쪽 사진은 안 돼요.”
“알겠습니다.”
“혹시 제 기록이 과장됐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말해 주세요.”
“관찰은 준호 씨가 한 거니까 제가 고칠 일이 아니에요. 다만 수치와 다르면 질문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어떻게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확신이 없을 때 없다고 말해 주는 거요.”
미래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에 감긴 거즈를 만졌다. “저도 그게 필요해요.”
두 사람은 계단문을 닫고 옥상을 내려왔다. 열화상 카메라는 아직 경고를 띄우지 않았지만, 배관 봉인은 낯선 새것처럼 빛났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준호가 인사했다.
“내일 주민 설명회에 같이 와 줄 수 있어요?”
“설비 원인 설명 때문에요?”
“그것도 있고요. 제가 말하면 벌통을 지키려고 하는 변명처럼 들릴 수 있어서.”
“주민이 그렇게 들을 수도 있죠. 그래도 당신이 직접 말해야 할 부분은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럼 같이 서 주되, 제 대신 말하지 않는 거네요.”
“맞아요.”
준호는 웃었다. “그 약속이면 좋습니다.”
미래가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순간, 미숙에게 메시지가 왔다. 출입 기록에 어젯밤 옥상 문을 연 임시 카드가 있었다. 발급자는 관리단도 시설팀도 아니었다. 카드 권한란에는 ‘냉각 공사 외주 임시’라고 적혀 있었다. 사용자의 이름은 비어 있었다.
미래는 화면을 준호에게 보여 줬다. “배관을 건드린 사람이 벌통을 노린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준호는 메시지를 확대했다. “그럼 왜 출입 기록이 없다고 했을까요?”
문이 닫히며 옥상의 바람 소리가 끊겼다. 그날 열점을 만든 건 오래된 배관이었지만, 반쯤 열린 밸브는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