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급 AI 전함이 나를 함장으로 각인했다

1화: 버려진 함선의 심장이 뛴다
쉬이익.
낡은 진공 작업복 안으로 산소 공급 장치가 뱉어내는 둔탁한 기계음이 번졌다.
한서율은 안전 고리를 도르카 17 폐선장 C구역 난간에 걸며 헬멧 너머의 우주를 바라보았다.
소행성 잔해와 파쇄된 함선 파편들이 희미한 항성빛을 받아 은빛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찌그러진 화물선과 반파된 순찰함들이 묘지처럼 늘어선 곳.
그 잿빛 고철더미 한가운데에 기괴할 만큼 거대한 검은 선체가 떠 있었다.
'블록 902.'
사흘 전 미확인 항로에서 표류하다 폐선장 외곽 견인망에 걸려든 정체불명의 폐전함이었다.
길이만 400미터에 달하는 함체는 오랜 세월 우주 먼지를 뒤집어써 표면이 온통 칠흑 같은 암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디에도 은하연합이나 민간 상단의 식별 코드가 찍혀 있지 않았다. 통상적인 군함에서 흔히 보이는 장갑판 용접 자국조차 없었다.
오히려 장갑 틈새마다 굳어버린 검붉은 섬유 조직 같은 결이 메탈릭 합금과 한 몸처럼 엉켜 있었다.
치직, 치지직.
헬멧 안쪽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과 함께 굵고 조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어이, 서율이! 아직도 밖에서 꾸물거리고 있어? 위에서 성화야. 당장 안으로 들어가서 코어실 격벽 차폐 밸브부터 풀라고!
도르카 17의 현장 작업 감독 강두식의 목소리였다.
서율은 손목에 장착된 정비용 스캐너로 함선 외벽의 응력 데이터를 훑으며 미간을 좁혔다.
"강 반장님, 이건 단순한 폐선이 아닙니다. 외벽 합금 조성이 표준 규격에 아예 잡히지 않아요. 동력로 잔류 반응도 확인 안 됐는데 차폐 밸브부터 열면 폭발 위험이 있습니다."
—폭발은 무슨 얼어 죽을 폭발! 방사능 누출 센서도 안 울렸잖아. 조합장님이 오늘 안으로 저 덩치 분해해서 특수 합금 덩어리랑 코어 알맹이만 빼내라고 길길이 날뛰고 계셔. 다음 교역선 오기 전에 넘겨야 돈이 된다고!
"유물 관리국에 공식 신고는 하셨습니까? 이 정도 규모의 미등록 군용 잔해면 최소한……."
—야, 한서율!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준법정신 투철한 공무원이셨냐?
강두식이 말을 끊으며 혀를 찼다.
—정비 찌꺼기나 주워 먹는 변방 폐선장에서 규정 따지다간 굶어 죽기 딱 좋아. 헛소리 말고 들어가서 절단기 들어갈 자리나 찍어 놔. 십 분 뒤에 대형 플라스마 절단기 기동할 테니까 그사이에 내부 가이드라인 안 그어놓으면 이번 달 배급 토큰에서 반 토막 낼 줄 알아!
툭.
일방적으로 통신이 끊겼다.
서율은 헬멧 창 안쪽에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고도 없이 당일 해체라니.'
조합장과 강두식이 이 거대한 쇳덩이에 눈이 돌아간 이유는 뻔했다.
은하연합의 정식 감찰을 거치면 유물 지정 번호가 붙어 폐선장 몫의 고철값은 푼돈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암시장에 몰래 내다 팔면 부르는 게 값인 미지의 고대 합금과 반응로 코어가 눈앞에 있었다.
서율은 허리춤에 찬 공구 벨트의 안전 래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손바닥에 닿는 정비 렌치와 멀티 진단기의 금속 손잡이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폐품과 고물 기계를 뜯고 고치며 살아온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경고를 보냈다.
'이건 그냥 기계가 아니야.'
서율은 발바닥의 자기력 부츠를 작동시켜 블록 902의 비상 수동 해치로 다가갔다.
끼기긱——.
수동 유압 레버를 세 번째 힘껏 당기자 수천 년간 닫혀 있던 기밀 해치가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벌어졌다.
내부의 묵은 진공 공기가 희미하게 뿜어져 나왔다.
서율은 헬멧에 달린 고휘도 작업등을 켜고 함선 내부 통로로 발을 디뎠다.
빛줄기가 갈라진 어둠 속을 가로질렀다.
"……세상에."
서율의 입에서 헛숨이 새어 나왔다.
통로는 일반적인 군함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보통의 순양함이나 구축함 내부라면 빼곡하게 늘어서 있어야 할 격벽 볼트와 배선 튜브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은빛 금속 뼈대 사이로 반투명한 흰색 힘줄 같은 생체성 도관이 벽면 전체를 그물처럼 감싸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고래의 흉곽 안쪽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서율은 장갑 낀 손을 뻗어 벽면 도관을 살짝 눌러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실리콘이나 고무가 아니었다. 탄력이 남아 있는 미세한 유기 섬유의 질감이 작업 장갑의 센서를 통해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기계와 유기체의 융합 함체…… 고대 전쟁 시절의 유물 전함이란 소문이 진짜였나.'
수천 년 전 은하계 전체를 불태우고 사라졌다는 고대 문명의 유물급 전함들.
그것들은 단순한 컴퓨터로 제어되는 병기가 아니라 자체적인 인공 신경망과 생체 코어를 탑재한 살아 있는 전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서율은 손목에 장착된 신경 링크 단말기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 어머니가 남겨준 유일한 유품이자 낡고 흠집투성이인 정비사용 신경 접속기였다.
지이잉.
단말기 액정에 기이한 맥동 파형이 떠올랐다.
전원이 완전히 꺼져 있어야 할 폐선 내부에서 미세한 저주파 진동이 단말기의 수신 칩을 두드리고 있었다.
주파수 패턴은 기계의 전기 신호라기보다는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에 가까웠다.
쿵. 쿵. 쿵.
"심장 소리……?"
서율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통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을 디딜 때마다 자기력 부츠를 타고 전달되는 진동이 점점 뚜렷해졌다.
함선은 죽어 있는 고철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깊고 차가운 동면 속에 빠져 자신을 부수러 올 파괴자의 손길을 기다리며 떨고 있는 생명체에 가까웠다.
통로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원형 차폐문이 나타났다.
문 중앙에는 고대 상형 문자와 유사한 기하학적 문양이 붉게 바랜 채 새겨져 있었다. 함선의 핵심 동력로이자 중앙 제어실로 이어지는 관문이었다.
서율은 휴대용 전력팩의 출력 케이블을 차폐문 제어 단자에 물렸다.
치직!
스파크가 튀며 차폐문 중앙의 문양이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었다.
스르륵 소리와 함께 차폐문이 좌우로 갈라지며 함선의 심장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구형 구조물이 공중에 뜬 채 정지해 있었다.
지름 5미터가 넘는 반투명한 유기체 코어.
그 표면에는 무수한 신경 섬유들이 얽혀 있었고 코어 중심부에는 아직 식지 않은 은백색의 에너지 덩어리가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생체성 유물 코어……."
서율은 압도적인 광경에 숨을 죽였다.
이것은 폐선장에서 흔히 다루는 핵융합 반응로나 플라스마 제너레이터 따위가 아니었다.
스스로 함체를 재생하고 진화시키는 살아 있는 동력 기관이었다.
만약 이런 코어에 아무런 안전 조치도 없이 무식하게 절단기를 들이댄다면 코어에 축적된 에너지가 폭주해 도르카 17 폐선장 구역 전체가 우주 먼지로 산화할 터였다.
서율은 급히 헬멧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눌렀다.
"강 반장님! 들립니까? 당장 절단 작업 중단하세요! 이 함선은 일반 반응로가 아닙니다. 생체 코어가 아직 살아 있어요! 잘못 건드리면 폐선장 절반이 날아갑니다!"
하지만 무전기 너머에서는 지직거리는 노이즈만 흘러나올 뿐 강두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두꺼운 고대 장갑과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기장이 통신을 완벽히 차단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함체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거칠게 흔들렸다.
발밑의 금속 바닥이 요동치며 서율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큭……!"
서율은 재빨리 바닥의 손잡이를 붙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외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강두식과 인부들이 서율의 보고를 기다리지 못하고 함선 우현 하부에 기가와트급 대형 플라스마 절단기를 처박은 것이다.
치이이익! 쾅! 콰과광!
격벽 너머에서 장갑판이 녹아내리는 끔찍한 파열음이 진동을 타고 전달되었다.
수천 도에 달하는 플라스마 열선이 함체의 외벽을 무자비하게 짓이기며 파고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중앙 제어실 벽면을 뒤덮고 있던 흰색 신경 도관들이 일제히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익——!
공기조차 없는 진공의 제어실 안에서 기이하게도 서율의 귓가를 직접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이명이 울려 퍼졌다.
소리가 아니었다.
손목에 찬 신경 링크 단말을 통해 뇌 속으로 직접 쏟아져 들어오는 순수한 전기적 비명이었다.
'아파.'
'뜨거워. 찢겨 나간다.'
'파괴 명령…… 방어 기제 정지…… 왜?'
서율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단말기를 타고 흐르는 파형은 단순한 기계적 에러 코드가 아니었다.
장갑이 찢기고 도관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여과 없이 토해내는 미완성의 순수한 절규였다.
"이 멍청한 인간들이……!"
서율은 이를 악물었다.
절단기가 코어의 주 공급관을 건드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2분 남짓.
지금 당장 도망쳐 에어록으로 빠져나간다면 혼자 탈출선에 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도르카 17에 남아 있는 수백 명의 폐선 노동자들과 3천 년 동안 버텨온 이 이름 없는 함선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서율은 망설이지 않고 중앙 제어 콘솔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콘솔 표면은 불타는 듯한 붉은 경고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키보드나 물리적 레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손바닥을 얹을 수 있는 넓은 은색 접촉 패드 하나만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서율은 작업 장갑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기름때와 굳은살, 낡은 화상 자국이 남은 맨손이 차가운 은색 패드 위에 닿았다.
동시에 손목의 신경 단말기 케이블을 콘솔 하단의 범용 접속 홈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타다닥!
푸른 스파크가 손목을 타고 튀어 올랐다.
[신경 링크 강제 접속 시도 감지.]
[외부 생체 파형 수신 중…….]
서율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뇌세포 하나하나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강렬한 전류감이 신경계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눈앞의 어둠 속에서 은빛 데이터 입자들이 소용돌이치더니 희미한 인간 여성의 윤곽을 닮은 미완성의 홀로그램 형상이 피어올랐다.
노이즈로 일그러진 목소리가 서율의 의식 속으로 똑똑히 울렸다.
[……미등록 생체 신호.]
[질문. 당신은 나를 해체하러 온 파괴자입니까?]
기계적이면서도 묘하게 떨리는 음성이었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존재가 느끼는 원초적인 거부와 공포였다.
서율은 손바닥을 은색 패드에 더 강하게 밀착했다.
그는 기계를 억지로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다. 폐선장에서 오랫동안 고장 난 장치들을 달래고 살려낼 때처럼 낮고 차분한 호흡을 내쉬며 신경 파형을 안정시켰다.
"아니다."
서율이 입을 열었다.
진공 속이라 입 밖으로 나간 목소리는 공기를 울리지 못했지만 신경 링크를 타고 이어진 그의 생각은 명확한 파동이 되어 AI의 코어로 전달되었다.
"널 부수러 온 게 아니야. 밖에서 무식한 놈들이 네 몸을 자르고 있어. 널 살리러 왔다."
[모순. 외부 생체 신호는 함체의 해체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종족은 언제나…… 병기를 소모품으로 폐기했습니다.]
"난 그놈들이랑 달라."
서율이 단호하게 말했다.
"난 버려진 걸 고치는 정비사다.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게 얼마나 억울한지 잘 알아. 그러니까 버텨. 날 믿고 시스템 권한을 열어!"
콰아아앙!
함체 외벽이 뚫리는 둔탁한 충격과 함께 제어실 천장에서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플라스마 절단기의 열풍이 격벽 틈새로 비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10초도 되지 않았다.
은빛 홀로그램이 파르르 떨렸다.
서율의 뇌파와 심박수 그리고 손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생체 전기 신호가 콘솔의 고대 해석 알고리즘을 맹렬한 속도로 채워나갔다.
[생체 파형 분석…… 적합도 89.4퍼센트.]
[과거 함장 후보 데이터베이스와의 부분 일치 확인.]
[명령어 수신이 아닌…… 상호 생체 동기화 요구 승인.]
스아아아아——.
콘솔을 물들이고 있던 붉은빛이 순식간에 청명한 푸른빛으로 반전되었다.
동시에 제어실 중앙의 생체성 유물 코어가 눈부신 은백색 광배를 뿜어내며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임시 함장 등록 프로토콜 개시.]
[관리자 식별 코드: 한서율.]
[상호 동기화에 따라 당신을 ‘첫 보호 대상’으로 각인합니다.]
[함체 긴급 방어 프로토콜 가동. 주 에너지 실드 전개를 시작합니다.]
쿵!
함선 전체를 관통하던 거대한 진동이 일순간 거짓말처럼 멎었다.
그리고 외벽을 뚫고 들어오려던 고열의 플라스마 화염 바로 앞에서 짙푸른 에너지 방벽이 우주를 가르며 폭발적으로 펼쳐졌다.
잠들어 있던 고대 전쟁 함선의 심장이 마침내 다시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