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

6화: 성물에 난 금
손목 안쪽의 검은 고리는 새벽이 밝을 때까지 식지 않았다.
에블린은 침대에서 일어나 촛불을 켰다. 붉은 선이 고리를 따라 가늘게 떨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맥박을 억지로 눌러 참는 듯한 감각이었다.
세드릭의 피였다.
그가 위험해지면 자신이 알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이 그의 피를 부르면 그도 알아챈다. 계약을 맺을 때 확인한 조항이었다.
에블린은 소매를 걷어 문양 위에 엄지를 댔다. 차갑게 식은 손끝에 얇은 생명력을 실었다. 그 힘이 붉은 선을 더듬어 멀리 뻗었다.
‘세드릭.’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목이 쿵 하고 뛰었다. 낯선 피비린내와 눈 쌓인 철 냄새가 한순간 숨을 막았다. 이어서 무덤덤한 남자의 목소리가 감각 사이로 스며들었다.
‘살아 있나 보군.’
“죽을 만큼은 아니에요.”
에블린은 소리를 낮췄다.
“당신 쪽에서 보낸 신호입니까?”
‘내가 보낸 것이 아니다.’
세드릭의 기척이 잠시 끊겼다. 마치 검끝으로 어둠을 더듬는 사람 같았다.
‘네 곁에 내 피를 묶은 것과 닮은 냄새가 있다.’
에블린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저택 정문 너머로 신전의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길을 비추며 길쭉한 상자를 옮겼다.
오늘 이사벨라의 첫 축복식에 쓰일 성물.
신전이 봉인한 채 운반하고 후보가 손을 대기 전에는 누구도 열지 못한다던 물건이었다.
“성물에 저주가 있다는 뜻인가요?”
‘모른다.’
세드릭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네가 가진 힘을 탐낼 것이다. 절대 손대지 마.’
붉은 선이 마지막으로 조여 들었다가 잠잠해졌다.
에블린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세드릭은 저주의 냄새가 난다고 했을 뿐 범인도 성물의 정체도 몰랐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래도 경고를 버릴 이유는 없었다.
백작은 오늘 이사벨라가 흔들리는 순간 자신을 제단 옆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그때 성물이 자신의 생명력을 삼키려 든다면 이번에는 단순히 쓰러지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에블린은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작은 유리병 안에서 장미 씨앗 하나가 붉은 뿌리를 웅크린 채 숨 쉬고 있었다.
“손대지 않고도 확인할 방법은 있어.”
씨앗을 손바닥에 올린 에블린은 천천히 웃었다.
“그것이 나를 먼저 물려고 한다면 말이지.”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이른 시간부터 향 냄새와 꽃 냄새로 가득했다.
마리는 하녀들과 함께 흰 장미를 단상 위에 올리고 있었다. 에블린이 다가가자 마리는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애님 말씀대로 가장 안쪽 꽃병을 비워 두었습니다. 아무도 장식이 바뀐 걸 눈치채지 못했어요.”
“수고했어. 운반 상자 쪽은?”
“신전 기사들이 가까이 못 가게 합니다. 대신 상자를 닦는 하인에게 물을 건넸어요. 봉인에 손대는 사람이 있으면 보라고 했습니다.”
마리의 눈 아래에는 잠을 이루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목소리는 지난번보다 덜 떨렸다.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더는 궁지에 몰린 아이처럼 명령만 기다리지 않았다. 제 몫을 지키기 위해 먼저 움직일 줄 알게 됐다.
예배당 문 앞에서는 토마스가 신전 기사들의 동선을 살피고 있었다. 에블린이 가까워지자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안정 보조 영애님이십니다. 제단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기사들이 길을 열자 토마스는 한 발 뒤에서 속삭였다.
“운반대는 신전 기사 넷이 지키고 있습니다. 다만 상자를 제단에 올린 뒤에는 대신관님과 백작님만 가까이 남을 겁니다.”
“마르틴 대신관은?”
“영애님을 계속 보고 계셨습니다. 손을 어디에 두는지까지요.”
예상했던 일이었다. 신성 측정식에서 마르틴은 이사벨라의 빛과 자신의 힘이 완전히 겹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그 불일치를 확인하려 들 것이다.
에블린은 예배당 안쪽을 훑었다. 제단 위 장미 장식의 가장 안쪽 꽃병은 비어 있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척 그 안에 씨앗을 떨어뜨렸다.
씨앗은 물을 머금은 흙 아래로 곧장 파고들었다.
“언니.”
떨리는 부름에 에블린은 돌아섰다.
이사벨라는 하얀 의식복을 입고 서 있었다. 어깨를 덮은 은빛 망토가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다. 백작 부인이 몇 번이나 정리했을 머리칼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지만 손가락 끝은 차갑게 질려 있었다.
“제가 정말 할 수 있겠죠?”
백작 부인이 곁에 없을 때만 묻는 목소리였다.
에블린은 이사벨라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회귀 전의 자신이라면 아무 의심 없이 그 손을 잡고 빛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이사벨라는 환하게 웃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성녀라 불렀다.
그 웃음 뒤에 남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에블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네가 할 일은 네 손으로 시작하는 거야.”
이사벨라가 조심스럽게 소매를 붙잡았다.
“언니가 옆에 있으면…….”
“곁에는 있을게.”
에블린은 이사벨라의 손등을 한 번 쓸었다. 따뜻하게 해 주기 위한 손길은 아니었다. 매달린 손을 떼어 낼 틈을 주는 손길이었다.
“하지만 네 대신 제단에 서지는 않아.”
이사벨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운함이 먼저 지나갔다가 곧 불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때 백작 부인이 다가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에블린.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하니?”
“이사벨라가 긴장하고 있어서요.”
“그럴 필요 없다. 네가 옆에 있지 않니.”
백작 부인의 시선은 다정한 척 이사벨라의 어깨에 닿았다가 날카롭게 에블린에게 향했다.
“의식이 시작되면 동생의 오른쪽에 서라. 성물이 반응하지 않으면 즉시 안정 보조를 해.”
“신전 규율상 성물을 직접 만질 수 있는 사람은 후보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손을 대라는 뜻이 아니야.”
“그럼 규율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돕겠습니다.”
백작 부인의 입가가 딱딱해졌다. 에블린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허락의 말은 빼앗을 수 없지만 기록에 남은 역할은 규율로 묶을 수 있다.
“그렇게 하렴.”
대답은 허락이 아니라 경고였다.
대신관 마르틴이 예배당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뒤로 신전 기사들이 검은 나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상자는 제단 위에 놓였고 은빛 봉인줄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백작은 가장 앞줄에 앉은 후원자들을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사벨라가 오늘 빛을 보이면 로젠버그의 이름과 돈이 함께 빛날 것이다. 에블린이 그 빛의 값으로 무엇을 내놓게 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을 터였다.
“성녀 후보 이사벨라 폰 로젠버그.”
마르틴의 목소리가 엄숙하게 울렸다.
“성물 앞에서 당신의 신성을 증명하십시오.”
봉인줄이 풀렸다.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 안에는 손바닥만 한 수정 성배가 놓여 있었다. 맑고 투명한 표면 속에 옅은 흰빛이 잠들어 있었다.
에블린의 손목이 뜨거워졌다.
이사벨라는 제단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성배 위에 손을 올리자 예배당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빛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사벨라의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났다. 측정식 때처럼 에블린이 얇게 흘려보낸 힘이 아니라 이사벨라 자신이 억지로 끌어낸 불안한 빛이었다.
성배는 반응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귀족들 사이에 작은 숨소리가 번졌다. 백작의 미소가 사라졌다.
“조금 더 집중하렴.”
백작 부인이 속삭였지만 이사벨라의 손은 더 심하게 떨렸다. 빛은 성배 표면을 스치지도 못한 채 꺼졌다.
백작이 고개를 돌렸다.
“에블린. 가까이 가거라.”
명령은 낮았지만 거절을 허락하지 않았다.
에블린은 제단을 향해 두 걸음 걸었다. 마르틴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과 손끝을 따라왔다. 신전 기사들의 손도 검자루 위에서 미세하게 굳었다.
여기서 손을 내밀면 백작의 바람대로 된다. 성물이 무사히 빛난다면 이사벨라의 영광은 더 단단해지고 자신은 영원히 안정 보조라는 이름 아래 묶인다.
성물이 세드릭의 경고대로 반응한다면 더 나빴다.
“성물에는 직접 닿지 않겠습니다.”
에블린은 제단 아래 장미 장식 앞에 멈췄다.
“의식의 꽃이 시들었습니다. 후보의 집중을 흐릴 수 있으니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마르틴은 잠깐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물에서 두 걸음 이상 떨어지십시오.”
“물론입니다.”
에블린은 비어 있던 꽃병에 손을 넣었다. 흙 속의 씨앗이 그녀의 손끝을 알아보고 가늘게 떨었다. 이미 있는 생명력의 방향을 조금 바꾸는 일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힘을 한 방울만 흘렸다.
붉은 뿌리가 흙을 가르며 성배 쪽으로 뻗었다. 누구도 보지 못할 정도로 가느다란 뿌리였다.
성배 안의 흰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가 수정 바닥에서 솟구쳤다.
쨍.
맑은 소리가 예배당을 갈랐다.
성배 표면에 머리카락만 한 검은 금이 생겼다. 금은 흰빛을 삼키며 성배의 가장자리까지 번졌다. 차가운 기운이 뿌리를 타고 에블린의 손가락으로 기어올랐다.
무언가가 그녀의 생명력을 물었다.
에블린은 즉시 손을 뗐다. 씨앗의 뿌리를 끊어 내자 손바닥 위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성배는 마치 먹이를 놓친 짐승처럼 한 번 크게 울었다.
손목의 문양이 타들어 갔다.
‘물러나.’
세드릭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선명했다.
에블린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검은 금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지만 성배 안쪽에는 가시 같은 그림자가 남았다.
마르틴이 손을 들어 의식을 멈췄다.
“누구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백작이 제단 앞으로 나왔다.
“에블린이 멋대로 힘을 썼습니다. 아이가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저는 성물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에블린은 차분히 말을 끊었다.
“그리고 대신관님께서 정한 거리도 지켰습니다.”
신전 기사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사실입니다. 영애께서는 장식만 만졌습니다.”
백작의 턱이 굳었다. 이사벨라는 성배와 에블린을 번갈아 보며 창백해졌다.
“언니가 한 건가요?”
“아니.”
에블린은 흔들리는 동생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저 성물이 먼저 반응한 거야.”
마르틴은 흰 장갑을 끼고 성배에 난 금을 살폈다.
“성물의 안쪽에서 외부 기운이 감지됩니다. 이 상태로 의식을 이어 갈 수 없습니다.”
“외부 기운이라니요?”
백작 부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신전이 직접 봉인해 온 성물 아닙니까?”
“그래서 운반 기록을 확인해야 합니다.”
마리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상자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겁을 삼키고 상자의 옆면을 가리켰다.
“대신관님. 물수건으로 닦을 때 봉인랍에 검은 조각이 박힌 걸 봤습니다. 처음에는 먼지인 줄 알았는데 떨어지지 않았어요.”
신전 기사가 봉인랍을 조심스럽게 긁어 냈다. 붉은 랍 사이에서 바늘처럼 가느다란 검은 가시 조각이 나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에블린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발레리우스 성에서 세드릭의 저주가 피를 먹을 때마다 검은 가시가 피부 아래로 기어 다녔다. 눈앞의 조각도 같은 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세드릭도 이것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마르틴의 눈이 가시와 에블린의 손바닥을 차례로 훑었다.
“영애는 이것을 본 적 있습니까?”
그 질문은 너무 곧았다. 에블린은 핏방울이 묻은 손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처음 봅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같은 종류일 뿐 이 조각 자체는 처음이었다.
“다만 성물이 제 힘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제 힘을 끌어당기려 했습니다. 후보의 신성을 확인하는 물건이라면 이상한 일 아닌가요?”
마르틴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백작이 불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에블린의 힘은 안정 보조에 불과합니다. 아이가 의식을 망친 책임을 돌리려는 말은…….”
“그만하십시오.”
마르틴의 목소리가 예배당을 가라앉혔다.
“오늘 성물은 후보의 힘을 판정하지 못했습니다. 로젠버그 영애의 안정 보조 역시 이 사건의 원인이라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백작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성물과 운반 기록은 신전으로 회수하겠습니다. 봉인 훼손의 경위가 밝혀질 때까지 이사벨라 영애의 축복식도 연기됩니다.”
후원자들 사이에서 낮은 소란이 일었다. 백작이 그토록 감추려 했던 균열이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렇다고 이사벨라가 공개적으로 실패한 것은 아니다. 실패를 증명할 성물 자체가 오염됐으니까.
에블린이 원한 것은 바로 그 정도의 금이었다.
이사벨라는 제단 곁에서 망토 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에블린이 다가가자 그녀는 애써 고개를 들었다.
“정말 제 잘못이 아닌가요?”
“오늘은 아니야.”
에블린은 대답을 아껴 두었다. 오늘은 아니라는 말이 이사벨라에게 위로가 될지 더 큰 불안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이사벨라가 작게 물었다.
“그럼 다음에는 제가 혼자 할 수 있을까요?”
에블린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빌린 빛으로 걸어온 아이가 처음으로 자기 발밑의 빈자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답은 네가 찾아야 해.”
이사벨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르틴은 봉인된 상자를 기사들에게 넘겼다. 검은 가시 조각은 별도 상자에 넣어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 에블린은 그 손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 순간 손목의 고리가 다시 뛰었다.
이번에는 고통이 아니라 날 선 경계가 전해졌다.
‘에블린.’
세드릭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을 저주라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죠?”
잠시 뒤 그의 대답이 붉은 선을 타고 왔다.
‘피를 따라 사냥감을 찾을 때 남기는 표식이다.’
에블린은 신전 기사들이 성물을 실은 마차를 몰고 저택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성물에 표식을 심었다.
그리고 그 표식은 세드릭의 피와 자신의 생명력을 알아봤다.
축복식은 멈췄다. 하지만 누군가가 시작한 사냥은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