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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5화

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

이번 생은 내가 흑막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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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저택의 값싼 충성

발레리우스의 검은 성을 다녀온 뒤로 이틀이 지났다.

에블린은 저녁 식탁에 놓인 은수저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백작은 전보다 다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얼굴일수록 요구가 뒤따랐다.

"이사벨라의 첫 축복식을 사흘 뒤로 정했다. 대신관께서도 오실 거다."

이사벨라가 기쁜 숨을 삼켰다. 백작 부인은 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우리 이사벨라가 백작가의 이름을 높일 날이구나."

에블린은 잔을 내려놓았다.

"안정 보조도 참석해야겠군요."

백작의 미소가 아주 잠깐 굳었다.

"당연한 일을 묻는구나. 네가 서쪽 온실에서 준비할 약초도 필요하다. 성녀 후보의 첫 의식이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있어선 안 돼."

그는 발레리우스에 다녀온 일을 묻지 않았다. 대신 온실 이야기를 꺼냈다. 허락해 준 권한을 다시 목줄처럼 잡겠다는 뜻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에블린은 얌전히 답했다.

이사벨라는 들뜬 눈으로 언니를 보았다.

"언니가 곁에 있으면 저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

그 말에 백작 부인의 손끝이 멎었다. 이사벨라의 힘이 약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집에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백작과 백작 부인은 알고 있다. 그래서 축복식을 미룰수록 후원자들의 기대만 커진다는 것도.

에블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더 꼼꼼히 준비해야겠네."

사흘.

백작은 그 짧은 시간 안에 신전의 시선과 귀족들의 돈을 모두 붙잡으려 한다. 이사벨라가 흔들리면 자신을 다시 제단 곁에 세울 생각일 것이다.

이번에는 손을 내미는 척하며 목을 조일 셈이다.

식사가 끝난 뒤 에블린은 곧장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용인 복도를 지날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벽을 타고 흘렀다.

"마리. 이번 달 급료에서 또 빼겠다. 실수한 건 네 몫이니."

집사 벨트람이 어린 하녀의 앞치마를 손끝으로 밀쳤다. 마리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축복식 장식비 영수증은 내일까지 정리해 둬. 숫자 하나라도 틀리면 네 동생 약값까지 내 책임이 아니야."

벨트람이 떠나자 에블린은 벽 뒤에서 나왔다.

마리가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치맛자락 아래로 숨긴 약방 봉투가 살짝 드러났다. 값싼 진통초와 곰팡이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동생이 아프니?"

마리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약방 봉투를 숨길 때는 냄새도 함께 숨겨야 해."

에블린은 마리의 손에 쥔 영수증을 보았다. 날짜와 약값이 적힌 종이 모서리는 여러 번 접혔다 펴진 듯 닳아 있었다.

"벨트람이 네 급료를 빼앗는 이유는 장식비가 아니라 네가 장부를 봤기 때문이겠지."

마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가 본 건 없습니다."

"그 말은 오늘부터 믿을게."

에블린은 목소리를 낮췄다.

"대신 내 질문에는 거짓말하지 마."

마리의 손가락이 영수증을 구겼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에블린은 일부러 달래지 않았다. 불쌍해서 건넨 손은 가장 먼저 의심받는다.

그녀는 서쪽 온실 열쇠를 꺼내 보였다.

"진정초가 필요하면 가져가. 네 동생 약값도 내가 낼게. 그 대가로 벨트람이 움직이는 날과 백작 부인의 지시를 내게 알려 줘."

"왜 저를……"

"나는 내 편이 필요해. 너는 동생을 살릴 돈이 필요하고."

마리는 열쇠를 받지 못한 채 손만 떨었다.

"제가 들키면 쫓겨납니다."

"벨트람에게 붙어 있어도 네 급료는 계속 잘릴 거야. 네가 장부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에블린은 열쇠를 마리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내게 붙으면 적어도 네 몫을 빼앗기지는 않아. 배신하면 나도 네 동생을 모른 척하겠지. 그러니 네가 고르면 돼."

부드러운 약속보다 분명한 대가가 낫다. 에블린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배웠다.

한참 뒤 마리가 열쇠를 움켜쥐었다.

"장식비가 두 번 들어간 장부가 있습니다. 백작 부인께서는 축복식이 끝난 뒤 남은 돈으로 신전 귀빈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마리는 숨을 골랐다.

"영애님이 어디로 가는지 보고하라는 명령도 내려왔습니다. 하녀들뿐 아니라 기사 견습에게도요."

"이름은?"

"토마스입니다. 훈련장에 있을 거예요."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 사본은 네가 갖고 있어. 아직 내게 주지 마. 벨트람이 눈치채면 네가 먼저 다칠 테니까."

마리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믿으시는 건가요?"

"아직은 아니야."

에블린은 돌아섰다.

"하지만 믿을 수 있게 될 기회는 줄게."


밤의 훈련장에는 비 냄새가 남아 있었다.

토마스는 홀로 나무 인형을 베고 있었다. 낡은 훈련검의 손잡이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의 장갑에는 약초를 찧은 녹색 얼룩이 묻어 있었다.

에블린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검을 내렸다.

"영애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로."

"내 동선을 백작님께 보고하느라 바쁠 텐데 말이야."

토마스의 얼굴이 굳었다. 변명부터 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명령이었습니다."

"알아. 그래서 묻는 거야. 그 대가로 무엇을 받았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블린은 훈련장 가장자리에 놓인 빈 약병을 가리켰다.

"어머니가 앓는다고 들었어. 기사단 급료로는 약을 구하기 어려운 모양이네."

"제 가족을 조사하셨습니까?"

"네 검 손잡이를 봤어. 손에 힘이 빠지는 사람은 칼을 그렇게 감지 않아. 약초 냄새도 나고."

토마스는 한참 뒤 고개를 숙였다.

"기사단에서 이번 달 안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저는 나가야 합니다. 백작님은 영애님의 동선을 자세히 적어 오면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추천서 하나로 어머니의 약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감시자가 되는 일쯤은 기꺼이 받아들이겠지. 에블린은 그를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 내게 성과를 내."

에블린은 작은 종이 봉지를 내밀었다.

"서쪽 온실의 진정초야. 네 어머니에게 먼저 써. 그리고 백작님이 내게 내리는 명령과 기사단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내게 알려 줘."

"거짓 보고를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거짓말은 오래 못 가. 네가 보고할 사실을 내게도 먼저 말해. 내가 숨기고 싶은 일은 네게 시키지 않겠어."

토마스가 봉지를 내려다봤다.

"그럼 백작님께는 무엇을 보고합니까?"

"네가 본 사실을. 다만 그 사실이 내게도 먼저 닿게 해. 내게 불리한 일을 봐도 감추지 마. 대신 너를 곤란하게 만들 방법은 내가 찾을 테니까."

그는 쉽사리 봉지를 받지 못했다.

"영애님은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누군가는 네가 쓸모없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아직 아니야."

말을 마친 에블린은 그의 검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쓸모 있는 사람에게 정당한 값을 치러."

토마스의 손가락이 마침내 종이 봉지를 움켜쥐었다.

"백작님은 축복식 날 대신관 마르틴을 부르셨습니다. 이사벨라 아가씨가 흔들리면 영애님께 다시 안정 보조를 시킬 생각입니다."

에블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성물은요?"

"신전에서 봉인해 운반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사벨라 아가씨가 손을 대기 전에는 누구도 만지지 못하게 한다고요. 운반대도 신전 기사들이 지킨답니다."

신전이 봉인한 성물.

성녀 후보의 첫 축복식치고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준비였다. 대신관 마르틴은 측정식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내일부터 기사단의 교대 시간도 알려 줘."

"명령이십니까?"

"거래야."

토마스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서쪽 온실에 돌아오자 벨트람이 문 앞을 막아섰다.

"백작님께서 축복식 전까지 약초 반출을 금하셨습니다."

마리가 에블린의 뒤에서 숨을 죽였다. 손에는 조금 전까지 없던 장부 사본이 들려 있었다.

에블린은 그것을 받아 온실 장부 사이에 끼웠다. 사본의 귀퉁이에는 백작의 도장이 찍힌 신성 측정식 기록이 함께 묶여 있었다.

안정 보조. 의식용 약초 관리 보조.

벨트람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공식 기록에 제 권한이 적혀 있네요. 축복식 준비를 막는 건 백작님의 뜻이 아니라 집사님의 판단이었습니까?"

"그럴 리가……"

"그럼 장식비 장부도 함께 백작님께 확인받죠. 축복식에 쓴 돈이 왜 두 번씩 적혔는지도요."

벨트람의 눈이 마리에게 향했다. 마리는 움츠러들었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훈련장 쪽에서 토마스가 걸어왔다. 손에는 백작의 인장이 찍힌 전달문이 들려 있었다.

"백작님 명으로 약초를 가져가십시오. 축복식 준비가 늦어지면 곤란하다고 하셨습니다."

토마스가 담담히 덧붙였다.

"집사님께서 막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가져왔습니다."

벨트람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제 판단이 짧았습니다."

그가 물러나자 온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마리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정말 제 말을 믿으신 건가요?"

"아직은 아니야."

에블린은 진정초를 잘라 작은 꾸러미 둘을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 네가 네 몫을 지킨 건 맞아."

첫 꾸러미는 마리에게 갔다. 두 번째는 토마스에게 건네졌다.

에블린은 두 사람을 차례로 바라봤다.

"내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너희는 너희 삶을 지켜. 그 대신 누군가가 너희 몫까지 빼앗으려 하면 내게 먼저 알려 줘."

마리가 꾸러미를 꼭 쥐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토마스도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저도요."

두 사람은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에블린도 바라지 않았다. 목숨을 건 맹세보다 매일 지킬 수 있는 약속이 오래간다.

그때 손목 안쪽의 검은 고리가 뜨겁게 울렸다.

낯선 맥박이 피부 아래에서 한 번 크게 뛰었다.

세드릭의 피였다.

에블린은 소매 끝을 움켜쥐었다. 저주가 다시 폭주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피의 계약은 이유 없이 상대를 부르지 않는다.

사흘 뒤 축복식도 막아야 했다.

그보다 먼저 검은 성에서 온 신호의 뜻을 알아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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