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활자방 막내의 역적 명단2화

활자방 막내의 역적 명단

활자방 막내의 역적 명단

AD
스폰서 광고

2화: 아버지의 죄목을 찍은 판

송묵은 필준보다 먼저 활자틀을 열어 놓았다. 덮개 곁에는 작은 칼이 있었다. 나무 활자의 면을 깎는 칼이었다. 필준이 방에 들어서자 스승은 칼을 천으로 감쌌다. 틀 한가운데의 낮은 활자는 아직 남아 있었다.

“어제 몇 장 찍었지?”

“세 장입니다.”

“몇 이름이 나왔나?”

필준은 문 앞에서 멈췄다. 장부에 세 장이라고 적었지만 이름이 세 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스승은 작동을 알고 있었다. 필준은 남경수, 도연승, 서도경을 차례로 말했다. 송묵은 마지막 이름에서 눈을 감았다.

“그 활자는 오늘 쓰지 않는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내가.”

“아버지 이름은 왜 넣었습니까?”

송묵은 답 대신 어제 건조한 종이를 내렸다. 세 장을 빛 아래 놓자 먹의 높이가 달랐다. 세 이름 모두 같은 판본의 말미에 찍혔고 옆의 번호만 달랐다. 그는 칼을 다시 꺼내 활자를 깎으려 했다.

필준이 손을 뻗어 틀을 잡았다. 칼끝이 손등을 스쳤다. 깊지는 않았지만 붉은 선이 먹 위로 번졌다. 송묵은 칼을 놓았다. 두 사람은 피가 종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동시에 손을 뒤로 당겼다.

“아버지는 그 이름 때문에 끌려갔습니다.”

“그 이름을 없애면 더 끌려가는 사람은 없다.”

“이미 찍힌 건요?”

송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필준은 칼보다 세 장의 종이를 먼저 챙겼다. 스승이 가르친 대로 종이는 모서리로 들었다. 먹이 마르기 전 무심코 덮으면 글자가 사라졌다. 이제 그는 그 글자가 사라지면 사람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판을 보여 주세요. 아버지 죄목이 찍힌 판이요.”

“검열관이 보관한다.”

“어제 제본소에 왔습니다. 판을 들고.”

송묵의 어깨가 내려갔다. 그는 문을 닫고 창호 앞에 천을 쳤다. 그제야 서랍 맨 아래에서 얇은 나무판 하나를 꺼냈다. 원판이 아니라 원판의 배치를 적은 초본이었다. 글자 사이에 작은 사선들이 있었다. 필준은 어긋난 활자 간격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죄목에는 서도경이 금서를 숨겨 남경수와 도연승에게 전했다고 적혔다. 그러나 초본의 사선은 그 이름 옆 번호를 잇고 있었다. 둘째에서 셋째로, 셋째에서 넷째로. 글을 읽는 순서가 아닌 종이를 보내는 순서였다.

“수신표군요.”

송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압수된 책을 되돌려줄 곳을 적었다. 책 안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 그 사람도 잡혀가니까 겹활자에 넣었다. 본문과 다른 방향으로 누르면 수신 이름이 나오게.”

“그런데 죄목에는 전부 역적이라고 적혔네요.”

“누군가 수신표를 읽었다.”

필준은 첫째 칸을 찾았다. 초본의 그 자리는 칼로 긁혀 있었다. 스승은 눈을 피했다. 이름을 넣고 빼는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알았으나, 지운 사람도 송묵이었다.

“첫째를 빼셨습니까?”

“살려 두려고.”

“그 사람이 누군데요?”

송묵은 말하지 않았다. 첫째가 없어도 다음 세 이름의 운송 순서를 복원할 수 있었다. 첫째를 지운 탓에 누군가가 빠진 부분을 맞추며 나머지 이름을 더 쉽게 읽은 셈이었다. 필준은 스승이 아버지를 넘기려고 만들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살리려고 했다는 말만으로 책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읽었는지 확인하려면 지우시면 안 됩니다.”

송묵은 칼을 서랍에 넣었다. 초본을 내주기 전에 자기 이름과 오늘 날짜를 아래에 적었다. 자신이 만든 배열이고 자신이 첫째를 지웠다고 썼다. 필준이 원하는 문장이었다. 그 문장이 있으니 증거를 아버지 편으로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었다.

바깥에서 길복이 종이 묶음을 굴렸다. 관청으로 가져갈 백한 장짜리 묶음이었다. 송묵은 그 묶음을 보고 필준을 앞질러 나갔다.

“오늘 운반은 늦춘다.”

“검열관이 해 뜨기 전에 가져오라 했습니다.”

길복은 수량표를 내밀었다. 표에는 이미 수령 도장이 찍혔다. 아직 보내지도 않았는데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송묵은 표를 받으려 했지만 길복이 놓지 않았다. 자신이 늦게 가져가면 벌을 받는다고 했다.

필준이 백한 번째 종이를 보자고 말했다. 길복은 묶음을 풀었다. 백 장은 같은 결의 종이였고 마지막 한 장만 조금 더 얇았다. 먹이 없었으며 오른쪽 아래에 동그란 압흔이 있었다. 배소진이 말한 활자틀의 자국과 같은 모양이었다.

길복이 빈 장이라고 확인하고 다시 덮으려 했다. 필준이 말렸다.

“누가 넣었어?”

“저녁에 관청 사람이 한 장 빠졌다고 가져왔습니다. 송 장인께도 말했다고 했어요.”

송묵은 고개를 저었다. 길복의 얼굴이 하얘졌다. 운반 견습은 명을 전달하는 사람이 장인에게도 전했겠거니 믿었다. 확인할 권한도 시간도 없었다. 이미 수령 도장이 찍힌 표는 그 믿음에 덧붙인 함정이었다.

류정서가 군사 둘과 들어왔다. 검열관은 문 앞에서 수량표부터 보았다.

“왜 아직 여기 있나?”

송묵이 앞으로 나섰다. 백한 장째의 결이 달라 대조 중이라고 말했다. 류정서는 그 설명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길복을 보고 본인이 묶음을 열었는지 물었다. 아이는 필준이 열라고 했다고 답했다.

“관청 납품을 훼손한 셈이군.”

필준은 백한 번째 종이를 들어 보였다.

“빈 종이 하나를 확인했습니다. 먹이 든 장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류정서의 시선이 종이에 박혔다. 그는 빈 종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필준은 종이를 낮추지 않았다. 햇빛이 옆으로 비치자 먹 없는 압흔이 한순간 나타났다. 검열관의 도장과 닮은 작은 테두리가 보였다.

“빈 종이면 내려놓아라.”

“아무것도 없으니 가져가셔도 되겠지요. 다만 납품 규격과 다르다고 장부에 적겠습니다.”

류정서는 필준을 보았다. 막내가 장부를 쓰는 것은 허락된 일이었다. 검열관은 물건을 압수할 수 있었으나 납품 장부에 무엇을 적는지까지 미리 막으면 의심이 커졌다. 그는 송묵에게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길복은 관청으로 직접 보내고, 묶음을 열었던 필준도 함께 오라는 명을 남겼다.

군사들이 나간 뒤 길복이 묶음을 껴안았다. 필준은 아이가 울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자기 손등의 상처를 천으로 감고 소진의 종이 가게로 갔다. 백한 번째 장을 가져가는 것은 곧 물건을 훔쳤다는 명분이 됐다. 대신 그 압흔을 읽을 사람을 데려와야 했다.

소진은 사정을 듣고 묶음에서 같은 납품용 종이를 꺼냈다. 밝은 빛만으로 부족하면 물기가 없는 고운 가루를 얇게 뿌려 압흔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종이에 자국이 남아 들킬 수 있었다. 필준은 가루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다른 방법은?”

“같은 종이로 한번 눌러 봐. 자국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면 빛만으로도 읽기 쉬워져.”

그녀는 새 종이를 들고 인쇄방으로 왔다. 송묵이 겹활자를 틀에서 조심스럽게 빼냈다. 내부에 세 작은 조각이 있었다. 모서리를 누르면 홈을 따라 돌아가고 다른 이름이 올라왔다. 필준은 각 방향을 세 번씩 시험했다. 이름은 세 개뿐이었다. 아버지 뒤의 더 많은 이름이 거기서 나오지는 않았다.

송묵이 첫째를 지운 칼자국은 옆의 별도 활자에 있었다. 그 활자를 종이에 누르자 이름 대신 원판의 번호가 나왔다. 첫째 이름을 지웠으나 그 자리에 있던 운송 번호는 아직 남았다. 소진은 그것이 책의 페이지 수와 비슷하다고 했다.

“대조본 말미를 순서대로 모으면 책 한 권이 되겠네.”

필준은 아버지가 책을 묶던 손을 떠올렸다. 압수된 장들을 돌려받아 다시 묶으려 한 일이 역모의 전송처럼 바뀌었다. 이름이 명단에 있는 까닭은 죄목이 아니라 서로 빠진 장을 채우는 역할 때문이었다.

길복은 백한 번째 종이를 햇빛 아래에 들었다. 아이의 팔이 떨리자 소진이 받침판을 대 줬다. 필준은 실험 종이의 압흔과 비교해 작은 글자를 하나씩 적었다. 검열관의 도장 아래, 원판의 첫째 칸 옆에 찍힌 주문 승인 번호였다.

그 번호가 누구의 것인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죄목보다 먼저 찍혔다는 것은 종이의 결로 알 수 있었다. 이름의 압흔이 그 위를 눌렀고, 둘의 깊이가 달랐다. 먼저 주문을 승인한 사람이 나중에 명단을 죄목으로 바꾼 것이다.

길복이 갑자기 묶음을 닫았다.

“제가 안 가면 도망쳤다고 할 겁니다.”

필준은 자기 목적만 생각하느라 견습생이 당장 관청으로 불렸다는 것을 놓쳤다. 아이에게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증거를 지키려 다른 사람을 위험에 세우는 행동이었다. 그는 초본을 접어 길복에게 보여 줬다.

“네가 잘못 만든 묶음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어. 같이 가자. 대신 혼자 받았다고 답하지 마. 가져온 사람이 누군지도 말하고.”

“그 사람 이름은 모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 제가 시킨 말처럼 외우지 말고.”

송묵이 두 사람 앞을 막았다. 스승은 검열관에게 나무판을 맡긴 자신이 먼저 가겠다고 했다. 필준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소진은 상인의 납품표를 들고 함께 가겠다고 했다. 네 사람은 각자 자신이 책임질 기록을 들었다.

관청으로 향하기 전에 필준은 건조대의 세 장을 그대로 두었다. 다만 새 종이에 압흔 번호와 자신이 관찰한 방향을 적어 소진의 가게에도 한 부 맡겼다. 관청에서 종이를 빼앗아도 기억이 한 사람의 말로만 남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류정서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필준이나 송묵보다 길복의 묶음을 먼저 봤다. 아이를 안쪽 방으로 보내고 다른 셋은 바깥에 남으라고 했다. 필준은 길복의 등에 묶인 매듭을 풀었다. 백한 번째 장은 묶음 안이 아니라 송묵이 든 얇은 나무판 두 장 사이에 있었다.

“찾으시는 빈 장은 여기 있습니다.”

류정서가 손을 내밀었다. 필준은 종이를 빛에 비추고 나서 천천히 내렸다. 자신이 읽은 압흔을 말할 것인지, 검열관이 먼저 설명하게 둘 것인지 마지막으로 골라야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 이름만 보고 급히 답하지 않았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