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방 막내의 역적 명단

3화: 검열관이 찾는 빈 한 장
류정서는 빈 종이를 받기 전에 필준의 손을 봤다. 손등에 감은 천이 젖어 있었다. 그는 종이를 묻히지 말라고 말했다. 사람의 상처보다 증거가 더럽혀지는 것이 먼저였다. 필준은 천을 손목 쪽으로 내리고 종이의 모서리만 잡았다.
“납품 규격과 다릅니다. 누가 보탰는지 확인하려 왔습니다.”
“규격은 관청이 정한다.”
“그렇다면 별도 한 장의 주문서를 보여 주시면 장부에 적겠습니다.”
배소진이 자신의 납품표를 펼쳤다. 백 장짜리 묶음을 세 개 보냈고 종이 결도 같았다. 백한 번째 장은 다른 결이었다. 류정서는 그 차이를 벌금의 근거로 삼으려 했다. 납품 장수가 관청 물건을 섞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소진은 표의 날짜를 가리켰다.
“이 장은 제 납품 뒤에 더해졌습니다. 먼저 제 묶음을 받은 분부터 확인하시지요.”
송묵이 원판의 초본을 내놓았다. 자신이 겹활자를 만들었고 첫째 이름을 지웠다는 기록이 있었다. 류정서는 초본을 보고 바로 빼앗으려 했다. 필준은 이번에도 막지 않았다. 이미 소진의 가게에 사본을 맡겼다. 원본을 숨기면 검열관이 거짓이라는 말을 하기 쉬웠다.
“자백까지 가져왔군.”
류정서가 말했다. 송묵은 필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답했다.
“명단이 잘못 쓰인 경위를 말하러 왔습니다. 아이에게는 판을 만들라 시키지 않았습니다.”
길복이 종이 묶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견습생은 이 자리에 자신이 끼어도 되는지 몰라 문 곁에 있었다. 류정서는 아이에게 누가 묶음을 풀었는지 다시 물었다. 길복이 필준이라고 답하자 군사를 불렀다.
“그럼 네가 받은 그대로가 아니군. 들어가서 진술해라.”
아이만 따로 데려가려 했다. 송묵이 함께 들어가겠다고 말했지만 군사는 칼자루를 잡았다. 필준은 빈 종이를 든 손을 높였다. 창호의 빛이 종이 뒤에서 들어왔다. 동그란 압흔 안의 짧은 획이 드러났다.
“이 도장은 납품 뒤에 찍힌 것이 아닙니다.”
류정서가 고개를 돌렸다.
“네가 도장을 읽느냐?”
“도장 이름은 모릅니다. 누른 순서는 압흔이 겹친 방향으로 압니다. 이름은 이 위에 나중에 눌렸습니다.”
필준은 자기 손등의 상처가 이름 위에 피를 흘리지 않도록 손을 바꿨다. 아버지 죄목의 원판이 있기 전에 주문을 승인한 표식이었다. 그 표식이 확인되면 아버지가 스스로 금서를 퍼뜨렸다는 설명은 흔들렸다. 누군가 먼저 대조본을 주문했고 그 안의 수신표를 죄목으로 전환했다.
류정서는 문을 닫으라고 했다. 군사가 바깥 사람들을 물렸다. 종이를 여러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행동이었다. 소진은 문이 닫히기 전에 자신이 납품 확인인으로 왔다고 큰 소리로 이름을 말했다. 문밖 서리가 그 이름을 적었다. 숨겨지기 전에 방문 사실 하나라도 남긴 것이다.
“말이 많군.”
검열관이 종이를 받았다. 그는 빛에 비추지 않고 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다른 종이로 덮으며 길복을 안으로 데려가라 했다. 필준은 아이가 떨어진 북처럼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아버지를 찾으려 왔다가 또 다른 이름을 희생자로 남길 수는 없었다.
“길복이 받은 표에는 이미 수령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필준이 말했다.
“납품 전에 받은 도장입니다. 사람이 아직 안 왔는데 받았다고 적어 두셨지요. 저 아이가 무엇을 섞었는지 물으려면 받았다고 적은 사람도 같이 있어야 합니다.”
소진이 수량표를 문밖 서리에게 넘겼다. 류정서는 그것을 막으려 한 걸음 나갔다. 송묵이 빈 종이를 덮은 다른 장을 치웠다. 필준은 종이를 빼앗지 않고 모서리의 압흔을 다시 확인했다. 표식의 번호가 초본의 첫째 번호와 같았다.
그 번호는 이름이 아닌 문서 보관함을 가리켰다. 관청이 사용하는 함마다 달린 붉은 나무패, 그중 원판 보관함의 번호였다. 필준이 벽의 함을 보는 순간 류정서가 그의 팔을 잡았다.
“관청 물건을 함부로 보면 네 아버지와 똑같이 된다.”
필준은 힘으로 팔을 빼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겹활자를 손바닥에서 꺼냈다. 군사들이 활자를 무기로 볼 수 있으므로 바닥에 놓고 발을 뒤로 뺐다. 작은 나무 조각은 소리가 나도록 한 번 굴렀다.
“이 안에 아버지 이름을 넣었습니다. 원판과 대조해 주세요.”
류정서가 겹활자를 봤다. 세 이름을 바꾸는 물건을 이제 자신이 가져갈 수 있었다. 그는 원판을 열어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을 이용해 가짜 문서를 만들었다는 죄목을 필준에게 붙이려 했다.
송묵이 무릎을 꿇었다. 장인은 겹활자의 작동을 관청 앞에서 보여 주겠다고 했다. 누르는 방향과 이름이 정해져 있으므로 실제 명단과 일치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막내 혼자 만든 물건이라는 설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부정하겠다고 말했다.
그 사이 문밖에서 수량표를 확인하던 서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수령 도장은 류정서가 아니라 그의 상관이 맡긴 별도 도장이었다. 서리는 자기 이름으로 받은 표를 처리할 수 없다고 했다. 상관의 결재 문서와 대조해야 했다.
류정서는 길복에게 기다리라 명했다. 아이를 안쪽으로 보내는 명이 멎었다. 필준은 벽의 함을 다시 봤다. 검열관은 더 많은 사람이 오기 전에 세 사람을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종이와 초본은 돌려주지 않았다.
“문서는 보관한다. 너희는 부르면 와라.”
소진이 빈 종이의 압흔을 탁본으로 남기겠다고 했다. 검열관은 허락하지 않았다. 관청 밖에 내용이 나가면 금서를 퍼뜨린 죄가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필준은 더 요구하지 않았다. 빈 종이의 번호와 지워진 첫째 칸이 이어진다는 것을 이미 읽었다. 그 사실을 종이로 남길 방법은 인쇄방에 있었다.
길복은 관청 문을 나서자 다리가 풀려 계단에 앉았다. 송묵은 아이에게 자기 손목을 잡고 일어나라 했다. 굳은 손목이 아파 장인이 이를 악물었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아이가 선 뒤에야 천천히 팔을 내렸다.
“제가 거짓말한 건 아니죠?”
길복이 물었다. 필준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했고 받은 물건을 받은 대로 설명했다. 소진은 아이에게 오늘 납품한 수량을 직접 장부에 적게 했다. 글씨가 서툴러 한 줄을 쓰는 데 오래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누구도 대신 써 주지 않았다.
인쇄방으로 돌아온 송묵은 새 활자 목재를 내놓았다. 필준은 겹활자의 세 이름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다. 사람 이름을 퍼뜨리면 수신자들이 다시 잡혀갈 수 있었다. 대신 누르는 방향과 세 번호, 죄목이 만들어진 날짜와 주문 승인 번호를 새 판에 새겼다. 실험을 재현할 수 있는 기록이었다.
소진은 백장의 압흔을 자신이 본 대로 적고 서명했다. 송묵은 활자를 만들고 첫째 이름을 지웠다는 문장을 새 판에 넣었다. 필준은 아버지를 구하고 싶다는 말도 별도 종이에 적었다. 자신에게 동기가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몇 장 찍을까?”
송묵이 물었다.
“우선 다섯 장. 하나는 관청, 하나는 종이 가게, 하나는 여기. 나머지는 소진 누나가 아는 장수에게.”
“한번 나가면 거두지 못해.”
필준은 판을 다시 읽었다. 이름이 없고 사실과 추정이 다른 문단에 있었다. 주문 도장이 곧 역모를 지시했다는 결론도 쓰지 않았다. 대조해 달라는 요청과 자신이 확인한 순서만 남겼다.
“알고 찍겠습니다.”
그는 첫 종이를 틀 위에 올렸다. 손에 힘을 고르게 줬다. 겹활자를 발견하던 날과 다르게 어느 모서리를 누르는지 알았다. 검열관이 가져간 활자를 대신할 새 판은 특별한 장치가 아니었다. 누구든 같은 문장을 찍을 수 있는 판이었다.
첫 장의 먹이 말랐다. 소진이 글자를 확인하고 송묵이 빠진 획을 고쳤다. 길복은 종이를 넷으로 나눠 묶었다. 이번 수량표에는 미리 수령 도장을 찍지 않았다. 받을 사람이 직접 날짜와 이름을 쓰도록 빈칸을 남겼다.
해 지기 전에 소진이 첫 사본을 가져갔다. 필준은 수레를 골목까지 밀었다. 사람들의 이름을 알게 되는 일과 사람들을 알아가는 일은 달랐다. 아버지와 같은 표에 적힌 사람들은 아직 얼굴도 몰랐다. 이제 그들에게 갈 때는 역적 명단을 들고 심문하러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밤에 제본소 봉인을 맡은 서리가 찾아왔다. 류정서는 도장이 드러난 일을 상관에게 보고해야 했고, 아버지의 죄목에 대한 재심사가 시작됐다는 말이었다. 풀려났다는 소식은 아니었다. 필준은 문턱에서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서리는 아버지가 전달한 짧은 말을 덧붙였다.
“이름보다 장수를 세어라.”
필준은 서리를 방 안에 들이고 정확히 어떤 말이었는지 다시 물었다. 아버지는 붙잡힌 뒤에도 같은 말을 세 번 했다고 했다. 죄목의 이름이 몇인지가 아니라 빠진 책의 장수가 몇인지 세라는 뜻이었다.
그는 새 판 옆에 원래 대조본을 펼쳤다. 말미의 세 번호는 순서이기도 했지만 각각 다른 쪽의 장수였다. 책 한 권을 세 사람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첫째 칸은 남은 마지막 묶음이었다. 송묵이 지운 이름 대신 보관함 번호가 남은 까닭도 설명됐다. 그 묶음은 밖의 사람이 아니라 관청 안에 있었다.
필준은 이 사실을 바로 인쇄하지 않았다. 아직 직접 보지 못한 추정이었다. 장부에 확인할 항목으로 적었다. 그 아래 길복이 쓴 납품 수량이 보였다. 백한 장이 백 장과 별도 한 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로 묶인 것은 반드시 같은 물건이 아니었다.
송묵은 빈 첫째 칸을 오래 보다가 내일 자신이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필준은 함께 가겠다고 답했다. 스승이 지운 이름을 먼저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을 아버지에게 무슨 장을 지키는지 직접 묻고 싶었다.
마지막 사본이 바람에 말랐다. 필준은 손톱 밑의 먹을 닦고 불을 껐다. 골목 건너에서는 이미 소진이 가져간 사본을 누군가 읽고 있었다. 그 문장은 그의 손을 떠났다.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두려웠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혼자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