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병원의 느린 계절

3화: 문을 닫기 전의 화분
임대 설명회에는 건물 세입자 열두 명 중 여덟 명이 참석했다. 우석은 재개발 계획과 예상 일정, 임대 종료 조건을 설명해 달라고 건물주 대리인에게 요청했다. 대리인은 아직 사업 검토 단계이며, 확정된 보상안은 없다고 말했다. 세입자들은 보증금 반환과 이전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석은 식물병원을 남겨 달라고 말하기보다, 공사 일정과 계약 종료 시점을 문서로 확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여기 계속 있고 싶은 건 맞아요.” 우석이 말했다. “하지만 답을 정하기 전에 조건을 알아야 합니다.”
세입자 중 몇 명은 빨리 나가고 싶어 했고, 몇 명은 오래 영업한 가게를 지키고 싶어 했다. 모두를 같은 편으로 묶을 수 없었다. 수아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병원에서 온 식물을 돌보고 있었고, 우석이 필요하다면 회의록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네가 협상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기와 무관한 건 아니야.” 우석이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식물을 병원에 돌려보내는 일을 먼저 끝내고 싶어요.”
“그걸 선택한 거면 충분해.”
병원 직원들은 화분을 다시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려고 방문했다. 수아는 새싹과 뿌리 상태, 물 주기 주기를 설명했다. 휴게실에 두기 전에 관리 담당자를 지정해야 한다고 했다. 직원들은 근무 조별로 담당자를 정할 수 있다고 답했다. 수아는 화분을 병원에 돌려보내기로 했다.
“조금 더 여기 두면 안 될까요?” 우석이 물었다.
“제가 계속 돌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어요. 하지만 이 식물은 병원 직원들이 원해서 왔던 거잖아요. 담당자가 정해졌으면 돌려보내는 게 맞아요.”
수아는 병원 반출 확인서와 인계서를 준비했다. 화분을 받은 직원은 관리법을 읽고 서명했다. 식물은 이전보다 건강해졌지만,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니었다. 병원 직원들은 수아에게 다음 주 상태 사진을 보내겠다고 했다.
“꼭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수아가 말했다. “상태가 나빠지면 병원에 알려 주면 돼요.”
그녀는 화분을 내려놓고 두 손을 비웠다. 우석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버려질까 봐 가져왔다고 했죠.”
“그랬어요. 지금은 버려지지 않을 방법을 찾았어요.”
“그럼 당신은요?”
수아는 병원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자리를 떠올렸다. “저도 그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
식물병원에는 보리의 입양 신청자가 찾아왔다. 우석은 수아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보리는 낯선 사람 앞에서 숨었지만, 수아가 옆에 앉자 조금씩 나왔다. 입양자는 고양이를 안아 보려 했다. 우석은 보리가 먼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안내했다. 그 사람은 잠시 기다린 뒤 손을 낮게 내밀었고, 보리는 냄새를 맡고 다가왔다.
“천천히 적응시키면 괜찮겠어요.” 입양자가 말했다.
“첫 주는 별도 방에서 지내게 하고, 식사량과 화장실을 기록해 주세요.” 우석은 체크리스트를 건넸다. “적응이 어렵다면 입양을 다시 상담할 수 있습니다.”
입양자는 조건을 읽고 동의했다. 보리는 그날 바로 떠나지 않았다. 일주일 뒤 집 환경을 확인한 후 인계하기로 했다. 수아는 보리가 떠나는 게 아쉬웠지만, 입양을 막지 않았다.
“아쉽죠?” 우석이 물었다.
“네. 그래도 보리가 잘 지낼 곳이면 보내야죠.”
“당신도 잘 지낼 곳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연애 고백도 위로도 아니었다. 수아는 우석이 자신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심했다. 그녀는 병원 복귀 상담을 예약했고, 주 2회 단축 근무가 가능한지 물어볼 계획이라고 했다. 복귀하지 않겠다고 단정하지도, 무조건 돌아가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이에요.”
수아는 우석에게 식물병원의 임대 협상 자료를 같이 읽어도 되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문서를 건넸다. 건물주가 제시한 이전 지원금과 영업 중단 기간을 확인하고, 다른 세입자들의 요구와 대조했다. 수아는 병원에서 겪은 인력 배치와 휴식 공간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지역 상점들의 작업 공간이 갑자기 사라질 때 생기는 영향을 정리해 주었다. 그녀는 협상 대표가 아니라 자료를 검토한 주민으로 의견을 냈다.
입주자들은 영업 종료 날짜를 최소 6개월 전에 알리고, 보증금을 먼저 반환하며, 이전 공간을 찾는 동안 임시 영업 장소를 제공해 달라고 공동 요청서를 보냈다. 모두가 결과를 얻은 건 아니었다. 건물주는 임대 연장은 거절했지만, 계약 종료 통지를 늦추고 보증금 반환 시점을 문서로 확정했다. 식물병원은 90일 후 다른 골목으로 옮기기로 했다. 우석은 작은 점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떠나야 하네요.” 수아가 말했다.
“네. 그래도 준비할 시간이 생겼어요.”
“원하는 걸 다 지킨 건 아니지만, 조건을 정할 수는 있었어요.”
“그게 다음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수아는 새 작업실을 보러 갈 때 함께 가겠다고 했다. 단, 임대 계약은 우석이 직접 결정해야 했다. 그녀는 식물 보관 공간의 채광과 접근성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우석은 고맙다고 했지만, 도움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새 작업실은 지금보다 작았지만, 창문이 넓고 물을 버릴 수 있는 배수구가 있었다. 임대료는 조금 낮았고, 건물주와 2년 계약을 논의할 수 있었다. 우석은 계약서를 검토한 뒤 입주를 결정했다. 수아는 그가 서명하는 자리에서 옆에 있었다. 둘은 계약 조건과 감정을 분리해 이야기했다.
식물병원 이전 날, 동네 주민들이 화분을 옮겼다. 병든 식물은 따로 포장하고, 회복 중인 식물은 이동 시간을 최소화했다. 우석은 각 화분의 상태표를 새 장소에 붙였다. 수아는 가장 먼저 응급실 화분의 사진을 병원 직원에게서 받았다. 작은 잎이 두 장 더 자랐다.
“잘 지내네요.” 우석이 말했다.
“병원에서 관리자를 정했으니까요.”
“당신이 시작한 일이에요.”
“제가 혼자 살린 건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의 휴직 연장 신청서도 제출했다. 복귀 상담을 통해 단축 근무와 심리 지원을 요청했다. 답변은 다음 주에 오기로 했다. 그녀는 결과를 미리 낙관하지 않았다. 다만 질문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새 작업실 문을 닫기 전, 우석은 수아에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식물 치료와 무관한 약속이었다. 수아는 동의했다. “이번에는 저도 질문 하나 할게요. 당신은 왜 식물병원을 병원이라고 불러요?”
“누군가 아픈 걸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곳이면 좋겠어서요.”
“사람도 와도 돼요?”
“식물 환자와 함께라면요.”
수아는 웃었다. “그럼 다음에 제 상태도 기록해 볼게요. 다만 진단은 하지 말고요.”
“동의합니다.”
둘은 문을 잠그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작업실 안에서는 식물들이 새 자리에서 천천히 적응하고 있었다. 모든 잎이 살아남을지는 알 수 없었고, 모든 사람이 다시 일터로 돌아갈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수아는 그 불확실함을 없애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다음 주 사진을 기다리고, 복귀 상담에 갈 시간을 정했다.
그날 밤 병원 직원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 휴게실 화분의 잎 하나가 노랗게 변했다는 내용이었다. 수아는 바로 병원으로 가지 않았다. 사진과 물 준 날짜를 먼저 물었다. 우석은 답을 기다리며 화분 관리표를 열었다.
그녀의 새 생활은 아직 천천히 자라는 중이었다.
입주자 회의에서 우석은 재개발을 막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세입자마다 원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떤 가게는 이미 다른 곳을 찾았고, 어떤 가게는 임대료가 오르더라도 남고 싶어 했다. 그는 계약 종료 날짜와 보증금 반환 방식, 이전 지원을 문서로 받자고 제안했다. 주민들은 각자 필요한 조건을 적어 냈다.
수아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우석이 요청한 자료를 검토했다. 세입자들이 같은 요구를 하는지 표로 정리하고, 서로 다르게 적은 부분은 그대로 남겼다. 그녀는 다수가 원하는 안으로 소수를 덮지 않았다. 회의록 초안에 자신의 이름을 넣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협상 결정은 세입자들이 해야 했다.
우석은 건물주와 두 차례 더 협의했다. 임대 연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계약 종료 통지 기간과 보증금 반환 날짜는 확정됐다. 식물병원은 다른 점포로 옮길 수 있도록 세 달의 준비 시간을 받았다. 그 결과는 모두가 원한 결말은 아니었지만, 세입자들이 급히 내몰리지는 않게 했다.
수아는 임대 협상 회의에 끼어들지 않고, 식물병원 이전 계획을 도왔다. 새 장소의 햇빛과 급수 공간을 확인하고, 화분을 옮기는 순서를 작성했다. 우석은 그 일을 정식으로 부탁하고 작업비를 제안했다. 수아는 비용을 받기로 했다. 호의로 시작한 일도 노동이 될 수 있었다.
새 작업실 계약은 우석이 직접 읽고 결정했다. 그는 보증금과 관리비를 비교하고, 계약 기간을 확인했다. 수아는 질문 목록을 만들어 줬지만 서명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돕되, 각자의 책임을 넘겨받지 않았다.
이전 날짜는 계약서에 적었고, 우석은 화분 이동 상자를 주문했다. 수아는 병원 직원에게 새 작업실 주소를 알려 주고 사진을 받을 방법을 정했다.
작업이 끝난 뒤 우석은 수아에게 저녁을 제안했다. 수아는 내일 상담 결과를 확인한 뒤 답하겠다고 했고, 우석은 괜찮다고 했다.
수아는 상담 질문을 메모해 두고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알람을 맞췄다.
물은 아직 주지 않았다.
그 답은 아침에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