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의 월광검객

2화: 뽑지 않은 검
백월루 안에서 들린 목소리는 늙은 여인의 것이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연하는 사부의 쪽지를 다시 읽었다. ‘검을 뽑지 마라. 네가 나를 찾으면 마지막 기억은 사라진다.’ 문장 아래에는 작은 은문이 추가돼 있었다. ‘먼저 네가 무엇을 잊었는지 말하라.’
초연은 문 앞의 종이 가루를 확인했다. 쪽지는 문 안쪽에서 밀려 나왔고, 잉크는 아직 젖어 있었다. 누군가 방금 적었다. “사부가 여기 있다면 우리가 온 걸 안다는 뜻이에요.”
“사부가 아니라면?” 연하가 물었다.
“그때는 누가 사부의 글씨를 흉내 낸 건지 찾아야죠.”
정무가 뒤에서 다가왔다. 그는 백월루에 들어가지 않고, 무림맹 봉인표를 확인했다. 봉인은 훼손되지 않았지만 종이 아래쪽이 젖어 있었다. 누군가 안쪽에서 물을 흘린 흔적이었다.
“이곳은 출입 금지다.”
“안에 사람이 있어요.” 연하가 말했다.
“그걸 확인할 권한은 무림맹에 있다.”
“그럼 문을 열어 주세요.”
정무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수배 문서를 펼쳐 사부가 비급을 훔친 이유가 무공 독점과 관련됐다고 설명했다. 백월루에는 무림맹이 금지한 검법이 보관되어 있었고, 사부는 그것을 가져갔다는 혐의를 받았다.
연하는 사부가 그런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믿음은 증거가 아니었다. 그녀는 문에 귀를 대고 안쪽 소리를 들었다. 발소리가 없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종이 한 장이 문 아래에서 움직였다.
“무엇을 잊었는지 말하라고 했어요.” 초연이 말했다. “검을 뽑기 전의 기억을 먼저 정리해 봐요.”
연하는 바닥에 앉아 눈을 감았다. 사부와 마지막으로 대련하던 날, 자신은 월광검의 세 번째 초식을 실패했다. 사부는 검을 뽑지 않은 채 자세를 가르쳤다. 이후 비가 왔고, 백월루 바깥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 뒤 장면이 끊겨 있었다.
“저는 사부가 떠나는 걸 봤어요.”
“그때 검을 뽑았나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연하는 검 손잡이를 놓았다. “검을 뽑지 않으면 마지막 장면을 못 찾을 거예요. 하지만 뽑으면 그 장면이 사라질 수 있어요.”
초연은 선택을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수첩을 펼쳤다. 그녀는 연하의 기억이 흐려질 때마다 주변에 있던 사람과 물건, 몸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었다. 어제 연하가 만두를 기억하지 못한 것은 검을 뽑은 직후가 아니라, 잠을 자고 일어난 뒤였다. 기억이 옮겨지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었다.
“검을 쓴 뒤에도 기록이 남으면, 당신이 잊은 걸 다른 사람이 증명할 수 있어요.”
“그 기록이 내 기억을 대신할 수는 없죠.”
“대신하지 않아요. 당신이 원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증언이죠.”
연하는 초연의 수첩을 받아 들었다. 수첩 첫 장에는 연하가 좋아하는 차가 적혀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이름과 그날 마신 향이 함께 기록돼 있었다. 그녀는 그 기록을 읽으며 자신이 아주 조금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무는 무림맹에 연락하러 갔다. 그는 백월루 문을 임의로 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폐허의 소유권이 문파 공동재산이라면 연하에게 확인 권리가 있을 수 있었다. 그는 법리를 살펴보겠다고 했다.
초연은 문틈으로 약초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을 맡았다. 안쪽에서 말린 쥐오줌풀과 진피 향이 났다. 누군가 긴장을 가라앉히려고 차를 끓였을 수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 작은 찻잔을 놓았다. “안에 계신 분, 차를 드실 수 있으면 잔을 문 밖에 두세요.”
한참 뒤 잔이 안으로 당겨졌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연하의 가슴이 조여 왔다. 사부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문을 부수고 싶었지만 손을 칼집에서 떼었다.
정무가 돌아왔을 때 그는 백월루의 일부 방을 확인할 임시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단, 무림맹 조사관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연하는 그가 시간을 끄는 것처럼 느꼈다.
“누구를 기다리는 거죠?”
“현장 기록관이다. 봉인을 풀 때 증인이 필요하다.”
“그 증인이 오기 전에 안에 있는 사람이 나가면요?”
“그럼 탈출 흔적이 남겠지.”
연하는 그의 답을 믿지 못했다. “사부를 잡으러 온 건가요?”
“혐의를 조사하러 왔다.”
“그건 다른 말이에요.”
정무는 시선을 피했다. 그의 명령서에는 ‘사부 생포’가 아니라 ‘비급 회수’가 적혀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문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의 걸음이 아니었다. 무거운 발과 가벼운 발이 번갈아 움직였다. 초연은 담 아래에 새로 생긴 흙 자국을 발견했다. 누군가 담을 넘은 흔적이었다. 발자국은 두 방향으로 이어졌고, 한쪽 끝은 나무 아래에서 사라졌다.
“사부가 밖으로 나간 걸까요?” 연하가 물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담을 넘었습니다.”
초연은 자국에서 피 냄새를 맡았다. 발자국 하나는 오른발을 끌었고, 끌린 자리에는 혈흔이 남아 있었다. 연하는 그 흔적을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안쪽의 잔 소리가 다시 났다. 누군가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였다.
그녀는 검을 뽑지 않고 문에 말했다. “저는 연하입니다. 사부를 찾으러 왔어요.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당신이 원하면 여기서 기다릴게요.”
안쪽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났다. 이어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검을 버렸느냐?”
연하는 대답을 못 했다. 검은 허리에 있었다. 하지만 아직 뽑지 않았다.
“아니요.”
“그럼 아직 잊지 않았구나.”
문 안쪽에서 열쇠가 돌아갔다. 문이 아주 조금 열렸고, 늙은 여인의 눈이 보였다. 그녀는 연하의 얼굴보다 칼집을 먼저 바라봤다.
“네 사부는 여기 없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검문답을 알고 있다.”
연하는 한 걸음 다가갔다. 여인은 손을 뻗어 문을 닫으려 했다.
“그 답을 들으면 너는 사부를 배신자로 기억하게 될 거다.”
연하는 검을 뽑지 않았다. “그 기억을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초연은 여인이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 이름을 물었다. 노파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찻잔을 안으로 가져가고, 잔 밑에 낡은 종이 조각을 두고 갔다. 종이에는 백월루의 옛 문파 표식과 함께 ‘기억은 검이 아니라 문답에 남는다’고 적혀 있었다.
“이건 사부의 말인가요?” 연하가 물었다.
“그가 내게 배운 말이다.” 노파가 답했다. “그는 이 문파에 오기 전부터 월광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검을 뽑는 일을 두려워했지.”
연하는 사부가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부는 늘 검을 뽑으라고 가르쳤고, 대가를 숨기지 않았다고 믿었다. 노파는 사부가 검의 대가를 알고도 제자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는 사랑이었는지, 죄책감이었는지 자신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정무는 노파의 말을 기록하려 했지만, 노파는 무림맹 문서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는 무림맹이 자신을 증인으로 부르면 사부를 배신자라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무는 그 자리에서 기록을 덮었다. 그가 처음으로 공식 기록보다 증인의 두려움을 먼저 보았다.
“그럼 증언을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노파는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감찰관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강요하지 않겠다고 기록하겠습니다.”
연하는 노파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사부를 믿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믿음은 증거가 아니지만, 자신이 가진 기억의 일부였다. 그녀는 그 기억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동시에 사부가 무림맹의 비급을 가져갔을 가능성도 열어 두었다.
노파는 백월루 안으로 연하를 들이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 동틀 무렵 뒤쪽 문을 열겠다고 했다. 단, 검은 칼집에 둔 채 들어올 것. 연하는 그 조건에 동의했다. 정무는 자신도 증인으로 들어가겠다고 했고, 초연은 의원으로 동행했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연하는 초연의 수첩을 다시 읽었다. 잊을 것이 두려워 검을 뽑지 않는 일과, 누군가를 구하려 검을 뽑는 일은 다르다고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은 초연의 글씨였다. 연하는 사부가 가르쳐 준 말처럼 외우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기억했다.
그들은 새벽까지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초연은 교대로 잠을 자자고 했지만, 연하는 눈을 감을 때마다 사부의 손에 들린 칼집을 보았다. 칼은 뽑히지 않았는데도 그날의 기억 가장자리만 검게 타들어 갔다.
“기억이 흐려지는 건 검을 쓰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어요.” 초연은 맥을 짚고 말했다. “두려움과 잠 부족도 기억을 흐려요. 검의 탓으로만 돌리지 마세요.”
연하는 초연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맥을 짚는 손은 차분했지만, 초연의 눈 밑에는 밤샘의 그늘이 내려앉았다. “당신도 무서워하네요.”
“그렇죠. 당신이 저를 잊을까 봐 겁나요.” 초연은 웃지 않았다. “그래서 기록하는 거예요. 그래도 기록이 당신을 대신할 거라고 믿진 않아요.”
그 말에 연하는 수첩을 돌려주었다. 이름과 습관만 적힌 페이지 사이에 초연이 쓰지 않은 빈 장이 있었다. 연하는 먹을 갈아 ‘오늘은 검을 뽑지 않았다’고 적었다. 글씨가 삐뚤어졌지만, 그 선택은 누구의 증언도 아니었다.
노파는 문 안에서 아침상을 밀어냈다. 죽 한 그릇과 낡은 목패가 놓였다. 목패에는 사부의 문파 표식이 절반만 남아 있었다. 정무가 그 조각을 알아보자 노파는 문을 조금 열고, 목패가 비급을 훔친 표식과 다르다고 말했다. 무림맹의 문서에는 두 표식이 같은 문양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정무는 즉시 반박하려다 멈췄다. 그는 문서함에서 도난 당시의 탁본을 꺼냈다. 표식의 오른쪽 획이 분명히 달랐다. 누군가 오래된 문파 표식을 고쳐 그린 셈이었다. 연하는 사부의 혐의가 거짓일 수 있다는 희망보다, 문서가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다는 불안을 먼저 느꼈다.
“그 탁본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초연이 물었다.
“무림맹 기록실의 서리다.”
“아직 살아 있나요?”
정무는 대답 대신 문서함을 닫았다. “확인하겠다.”
노파는 목패를 다시 가져갔다. 증언을 바꾸라는 압박이 올 것을 안다는 듯, 그녀는 문에 빗장을 걸었다. “오늘 들은 건 너희 셋의 귀에만 둬라. 이름을 적는 순간 그 사람은 사라진다.”
연하는 목패를 그리지 않고 각 획의 방향을 말로 설명했다. 초연은 일부러 다른 순서로 적어 같은 실수를 함께 반복하지 않도록 했다.
정무는 탁본을 무림맹으로 가져가자고 했다. 연하는 원본을 혼자 들고 가지 말라고 했고, 그는 사본을 세 장 만들어 나눴다.
초연은 그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속삭였다. 정무가 제도 안에서만 움직이면 기록실이 먼저 증거를 없앨 수 있었다. 연하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의 손에 놓인 사본을 보며 조금은 믿어 보고 싶었다. 믿음은 증거가 아니어도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문 안에서 노파가 기침했다. 초연은 약을 놓고 가도 되겠느냐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잠시 뒤 문 밑으로 약그릇이 밀려 나왔다.
해가 떠오르자 정무는 무림맹으로 돌아가 탁본의 서리를 찾겠다고 했다. 연하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당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기록실로 갑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내 사본을 공개해라.” 정무가 말했다. “그때는 내 이름도 같이 적어라.”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외우려 애쓰지 않았다. 종이에 적힌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어 읽었다. 글자가 사라져도 자신이 택한 약속은 남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