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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의 월광검객1화

화양의 월광검객

화양의 월광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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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칼집에 남은 이름

연하는 월광검의 손잡이를 쥐고도 뽑지 않았다. 검은 칼집 안에서 가볍게 울렸다. 새벽 안개에 젖은 길 위로 마차 바퀴 자국이 이어져 있었고, 자국은 작은 역참에서 끊겼다. 사부가 사라진 지 사흘째였다.

“검을 뽑으면 흔적을 놓칠 수도 있어요.” 초연이 말했다.

“안 뽑으면 길을 잃는다.”

“어제도 그렇게 말하고, 어머니가 만든 만두를 어디서 먹었는지 잊었죠.”

연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검을 뽑을 때마다 기억이 하나씩 사라졌다. 그날 아침 그녀는 어머니의 만두 냄새를 떠올리려 했지만, 김이 오른 찜통과 빈 그릇만 기억했다. 누가 함께 있었는지, 맛이 어땠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초연은 의원 가방을 내려놓고 바퀴 자국의 깊이를 살폈다. 마차는 빈 상태로 역참에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무거운 물건을 실은 흔적이 있었다. 바퀴의 바깥쪽이 흙에 더 깊게 파였고, 그 위로 작은 말굽 자국이 겹쳤다.

“검을 실은 것 같아요.”

“사부의 검은 내게 있다.”

“다른 검이겠죠. 혹은 철제 상자요.”

연하는 흔적 옆에 쪼그려 앉았다. 바퀴 자국 아래에는 말린 풀잎이 눌려 있었다. 비가 온 뒤에도 향이 남아 있었다. 쑥과 쥐오줌풀을 섞어 말릴 때 나는 냄새였다. 초연은 그 풀이 역참 마구간에서 쓰이는 안정제라고 했다. 누군가 말이 놀라지 않도록 먹였을 수 있었다.

역참 주인은 사부를 본 적 없다고 했다. 연하는 그가 거짓말한다고 확신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그녀는 말의 사료통을 살폈다. 한 칸은 비어 있었고, 바닥에 은빛 가루가 묻어 있었다. 월광검의 칼집에 새기는 은문 가루와 비슷했다.

“이걸 만져도 기억을 잃진 않겠죠?” 초연이 물었다.

“검이 아니라 가루야.”

연하는 손가락 끝으로 가루를 살짝 찍었다. 피부 위에서 작은 빛이 반사됐다. 그녀는 가루를 천에 옮겨 담았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검이 반응했다. 칼집 안쪽에서 한 번 낮은 진동이 울렸다.

역참 주인은 그제야 연하가 월광검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문 쪽으로 물러났다. 초연은 그의 앞을 막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길을 열어 두었다.

“당신이 사부를 숨겼나요?” 연하가 물었다.

“나는 아무도 숨기지 않았소.”

“그럼 왜 도망가려 했죠?”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초연은 그가 오른손을 떨고 있는 것을 봤다. 손목에는 밧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그를 결박했다가 풀어 준 흔적이었다.

“당신도 협박을 받았군요.” 초연이 말했다.

“모릅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오.”

“누구죠?”

주인은 창밖을 바라봤다. 길 건너에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무림맹 감찰관 정무였다. 정무는 역참 주인의 이름을 기록하고, 연하에게 수배 통지서를 건넸다. 사부가 무림맹 비급을 훔쳐 달아났다는 혐의였다.

“사부님을 배신자로 기록했군요.” 연하가 말했다.

“문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

“문서가 사부를 본 건 아니죠.”

정무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비급 도난 날짜와 마지막 목격지를 설명했다. 사부는 백월루의 폐허 근처에서 목격됐고, 그 뒤 흔적이 끊겼다. 백월루는 무림맹 문서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문파였다.

“당신은 그를 찾는 건가, 붙잡는 건가?”

“혐의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와 같이 가요.” 초연이 말했다. “우리가 먼저 찾으면 당신도 진실을 확인할 수 있겠죠.”

정무는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연하가 검을 뽑으면 기억을 잃는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기억이 흐려지는 사람을 증인으로 세울 수 없다.”

연하는 칼집을 잡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나는 검을 뽑지 않으려 합니다.”

“그 말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겠다.”

“왜죠?”

“아직 행동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정무는 수배 문서를 접고 역참을 나갔다. 그는 연하에게 해가 지기 전에 백월루로 향하라고 경고했다. 무림맹은 그곳을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했다.

연하는 사부가 배신자였는지, 도망자였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사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려 했다. 회색 바위, 비에 젖은 소매,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검. 하지만 그날 검을 뽑았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기억을 되찾으려면 검을 뽑아야 해요?” 초연이 물었다.

“검에 남은 은문을 읽어야 한다.”

“그 기억을 잃은 뒤에도요?”

“검에는 기억이 남는다.”

“그럼 당신의 기억은 사라지고, 검의 기록만 남는 거군요.”

연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을 뽑으면 기억이 옮겨간다는 말은 사부에게 들었다. 그때는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검을 쓰고 난 뒤였다.

초연은 연하의 손목에 맥을 짚었다. 검을 뽑은 뒤마다 맥박이 느려지고, 특정 시기의 기억이 먼저 흐려졌다. 그녀는 신체가 무공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억을 되찾는 약은 없지만, 검을 뽑기 전후의 증상을 기록하면 잃는 순서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당신은 기억을 잃지 않으려 검을 쓰지 말라고 하지 않네요.”

“당신이 선택해야 하니까요. 다만 대가를 알고 선택해야 해요.”

연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그녀는 사부를 찾기 위해 기억을 잃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여겨 왔다. 초연은 그 선택을 대신 막지 않았지만, 무심히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해가 기울자 둘은 백월루로 향했다. 길목에는 무림맹의 봉인표가 붙어 있었다. 종이에는 출입하면 검을 압수한다는 문구와 정무의 서명이 있었다. 연하는 봉인표를 떼지 않았다. 백월루의 담 너머에는 오래된 정자가 보였고, 돌계단 위로 달빛이 번졌다.

검은 칼집 안에서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진동이 세 번 이어졌다. 초연은 연하가 검을 뽑기 전에 숨을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안 뽑아도 돼요.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어요.”

“사부가 안에 있다면?”

“그럼 문을 두드려 보죠.”

연하는 검을 뽑지 않고 백월루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한 번, 밖에서 한 번, 다시 안에서 두 번 소리가 났다. 초연은 그것이 무림맹의 신호가 아니라 오래된 문답 암호라고 했다.

연하는 사부가 가르친 월광검의 첫 구절을 떠올렸다. ‘달이 보이지 않을 때 누구의 길을 따르는가.’ 답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검을 뽑으면 답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틈으로 종이 한 장이 밀려 나왔다. 사부의 필체였다. ‘검을 뽑지 마라. 네가 나를 찾으면 마지막 기억은 사라진다.’

연하는 문을 두드리던 손을 내렸다. 백월루 안쪽에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는 사부가 아니었다.

“누구십니까?” 초연이 먼저 물었다.

문 안의 목소리는 대답 대신 문답을 돌려주었다. “달이 없을 때 길을 잃지 않는 것은?”

연하는 입술을 다물었다. 사부가 가르친 답은 ‘발밑의 돌을 센다’였을까, ‘곁에 선 사람의 숨을 듣는다’였을까. 두 문장 모두 그의 수업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나는 산길에서, 하나는 눈을 가리고 검을 휘두르던 밤에. 기억은 가늘게 겹쳐 어느 쪽도 온전하지 않았다.

“답을 기억하지 못해요.” 연하가 말했다. “그렇다고 검을 뽑아 억지로 찾아내진 않겠습니다.”

문 안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 말을 사부에게도 했느냐?”

그 질문은 칼끝처럼 정확히 가슴을 찔렀다. 연하는 세 번째 대답을 피했다. 그날 자신은 사부 앞에서 검을 뽑았다. 이유는 사부가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사부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 칼집을 쥐고 있던 사람은 자신이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편리하구나.”

초연이 연하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말은 지금 사실이에요. 잊었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모르는 일을 지어내 죄를 고백할 수도 없죠.”

정무가 돌아와 문 앞의 봉인표를 살폈다. 그는 종이 모서리가 안쪽으로 젖은 것을 보고 누군가 문틈에 물을 부었다고 판단했다. 그가 무림맹의 봉인을 떼려는 순간, 연하가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열지 않기로 했어요.”

“안에서 신호를 보냈다.”

“문을 두드리면 문답으로 답하겠다고 했지, 열어도 된다고 하진 않았어요.”

정무는 잠깐 그녀를 보다가 손을 거두었다. 초연은 문 앞의 진흙에서 작은 짚신 자국 두 개를 발견했다. 하나는 문으로 들어갔고, 다른 하나는 담을 향했다. 들어간 발자국은 작았지만 나오는 발자국은 깊었다. 안에 있던 사람이 누군가를 업고 나갔을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담을 따라 돌아갔다. 나무뿌리 아래로 이어진 발자국이 끊겼다. 연하는 이끼에 눌린 작은 은 조각을 찾았다. 월광검의 장식과 같은 무늬였지만, 뒷면에는 ‘여울’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사부가 그녀에게 물을 건널 때 발을 두는 곳을 가르치며 부르던 별칭이었다.

그 이름을 읽자 연하는 입안에서 피 맛을 느꼈다. 사부는 그 별칭을 제자에게만 불렀다. 하지만 기억은 한 장면만 주었다. 비 내리는 나루, 젖은 손, 누군가 떨어뜨린 은 조각. 누가 누구의 손을 잡았는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정무는 조각을 증거 봉투에 넣으려 했다. 연하는 이번에는 막지 않았다. “기록하되, 사부의 물건이라고 단정하지 마세요.”

“소유자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쓰지 않겠다.”

그 말은 조금 전보다 달라져 있었다. 정무는 그의 문서에 ‘출처 미상’이라고 적고, 은 조각을 연하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손안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 감각을 기억하려 했다. 기록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으로 남기고 싶었다.

백월루 안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연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문 앞에 서 있는 셋 중, 먼저 돌아갈 사람은 누구냐?”

정무가 답하려 했지만 연하가 먼저 말했다. “아무도 먼저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다만 문을 열라고 강요하지도 않겠습니다.”

침묵 끝에 문 안에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대답은 네 것이냐, 사부의 것이냐?”

연하는 은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제 대답입니다.”

바람이 담장 너머 정자의 풍경을 흔들었다.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지만, 안쪽 사람이 숨을 죽이지도 않았다. 연하는 사부의 필체가 적힌 쪽지를 접어 품에 넣고 밤을 기다리기로 했다. 검을 뽑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가 오늘의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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