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라디오에 전 애인이 산다

2화: 이름을 부르지 않는 약속
서윤은 남문역 3번 출구에 도착해도 사진 속 테이프를 찾지 못했다. 역 앞에는 퇴근 인파와 포장마차 연기가 뒤엉켰고, 오래된 안내 방송이 기둥에 부딪혀 울렸다. 자정까지는 열두 분. 사진을 보낸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은 꺼져 있었다.
“방송국 사람입니까?”
벤치 아래에서 누군가 물었다. 회색 모자를 쓴 남자가 종이봉투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졌지만 왼손 새끼손가락에 흰 흉터가 보였다. 이안은 기타 줄에 손을 베인 뒤 그 흉터를 숨기려 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서윤은 한 걸음 멈췄다.
“서윤 씨?”
남자는 그녀의 이름을 먼저 불렀다. 그 한마디에 심장이 속도를 바꾸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안과 달랐다. 더 거칠고 나이가 들었다.
“누구시죠?”
“달이 보낸 사람입니다. 테이프는 가지고 왔어요.”
“얼굴을 보여 주실래요?”
“그건 안 됩니다.”
“그러면 테이프도 받을 수 없어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50대쯤 되어 보였고 눈 밑이 짙었다. 종이봉투를 건네려다 말고, 서윤의 손을 살폈다.
“달은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이름을 묻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이름은 안 물었습니다. 당신이 누군지는 알아야 물건을 받을 수 있어요. 제 직업은 방송 작가고, 여기서 제 역할은 자료 출처를 확인하는 겁니다.”
“서윤 씨는 그 목소리를 아는군요.”
“아직 모릅니다.”
“그럼 왜 왔습니까?”
“확인하러요.”
남자는 봉투를 펼쳤다. 테이프가 아니라 손바닥 크기 녹음기가 들어 있었다. 서윤은 바로 알아봤다. 여덟 해 전 방송국에서 쓰던 모델이었다. 손잡이 한쪽이 갈라졌고 마이크 덮개는 검게 변색됐다. 이안과 마지막으로 함께 야외 방송을 했던 날, 그가 이 장비를 들고 있었다.
“이건 방송국 자산입니다.”
“창고에 버려져 있던 걸 가져왔습니다. 돌려주려고 했지만 받을 사람이 없었어요.”
“누가 버렸죠?”
“제가.”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서윤은 장비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일련번호부터 사진으로 남겼다. 태오가 알려 준 보관 목록과 대조하려면 원본이 필요했다. 하지만 개인에게서 받은 물건의 출처를 확인하지 않고 가져가면, 나중에 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테이프는 어디 있습니까?”
“이 녹음기 안에 있습니다.”
“그럼 제가 가져갈 수 없어요.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남자는 웃지 않았다. 그 대신 봉투를 꼭 쥐었다.
“이안이 아직 살아 있다고 믿습니까?”
“그 사람 얘기를 해 주세요.”
“당신은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말은 누가 했죠?”
남자는 대답 대신 출구 쪽을 보았다. 광장 건너편에서 누군가 휴대전화를 들고 그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서윤이 시선을 돌리자 그 사람은 바로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봉투를 감추며 한 발 물러섰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잠깐만요. 그 녹음기를 두고 가세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피해가 갈 겁니다.”
“그 사람을 보호하는 일과 기록을 숨기는 일은 다릅니다.”
“보호받는 사람은 기록을 남길 여유가 없어요.”
서윤은 그 말을 붙잡고 싶었지만, 남자는 개찰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쫓아가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상대를 겁먹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녀는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서윤 씨, 지금 어디예요?”
태오의 전화가 울렸다. 서윤은 방금 본 일을 숨기지 않고 모두 말했다. 태오는 녹음기 일련번호를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녹음기의 일부가 이미 서버에 복사돼 있는지 살피려면 동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동의는 누구한테 받아야 해?”
“소유자가 불분명하면 방송국 법무팀. 그쪽이 자료를 복구할지 결정할 거야.”
“이안 목소리가 들어 있을 수도 있어.”
“서윤아, 네가 원하는 걸 먼저 말해 봐.”
그녀는 역 계단을 내려가며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건 이안이 살아 있다는 확인이야.”
“그러면 그 확인 때문에 누군가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지도 같이 봐야 해.”
“알아.”
“정말?”
통화가 짧게 끊겼다. 서윤은 역 근처 24시간 카페로 들어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달이 보낸 사람은 이안을 보호하는 듯했고, 동시에 이안의 행방을 알고 있는 듯했다. 사진을 다시 열어 배경을 확대했다. 건너편 유리벽에 희미한 숫자가 비쳤다. 17-04. 날짜일까, 보관함 번호일까.
그녀는 방송국 장비 목록을 요청하는 메일을 썼다가 지웠다. 지금 요청하면 국장에게 사연을 숨겼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래도 공식 기록은 필요했다. 방송을 이어 가려면 개인적인 기억을 증거인 것처럼 다룰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법무팀은 오래된 녹음 장비는 자산 처분 목록에 들어 있으며 회수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 대신 분실 기록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 사이 태오는 방송국 지하 편집실에서 옛 프로그램 파일을 확인했다. 보관함 번호 17-04는 그 해 봄 야외 녹음 전용 장비였다. 장비 반출 기록에는 이안의 사인과 함께, 담당 직원 ‘강이안’이 적혀 있었다.
서윤은 기록지를 한참 바라봤다.
“네가 맡긴 게 맞네.”
“그날 장비를 반납하러 온 건 기억나.” 태오가 말했다. “그런데 창고에 들어간 다음에 사라졌어.”
“누가 마지막으로 봤어?”
“나.”
“왜 그때 말 안 했어?”
태오는 한숨을 쉬고 의자를 끌어당겼다.
“이안이 네게 직접 연락하겠다고 했어. 네가 걱정할까 봐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 나는 그 말을 믿었고,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 뒤로 일곱 해였어.”
“알아.”
“연락이 한 번도 없었어.”
“알아.”
태오는 변명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게 더 화가 났다. 책임질 말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그는 자신의 침묵을 그대로 내놓았다.
“내가 그때 널 믿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야.”
“그럼 뭘 말하려는 거야?”
“그날 창고에 들어온 사람은 이안 혼자가 아니었어. 국장도 같이 있었어.”
서윤은 눈을 들었다. 당시 국장은 편성팀장이었다. 그는 일주일 뒤 외부 제작사로 옮겼고, 지금은 방송국의 본부장이었다. 태오는 기록지의 뒷면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잉크가 번진 메모가 하나 있었다.
원본은 본인 요청으로 보관. 접근 금지.
글씨는 당시 팀장의 필체와 같았다. 태오가 바로 법무팀에 사본을 보내자고 했지만,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 기록은 누군가의 사생활이 아니라 자산 관리 자료였다. 그래도 본부장에게 직접 확인하기 전에 이안이 남긴 목소리의 맥락을 먼저 알아야 했다.
그날 자정 방송에서 달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약속을 지키셨군요.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네요.”
“대신 방송국 기록에서 장비의 출처를 찾았어요.”
“그 기록을 공개하지 마세요.”
“그건 제 결정으로 약속할 수 없어요. 사실 확인에 필요한 기록은 보존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다시 쫓게 될 겁니다.”
“그 사람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선택을 알고 싶은 거예요.”
“차이가 있습니까?”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달은 전화를 끊기 전에 낮게 말했다.
“내일 방송에는 직접 갈게요. 문을 잠그지 마세요.”
방송이 끝나고, 서윤은 부스 바깥 출입문을 열어 둔 채 기다렸다. 열두 시 삼십 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낡은 녹음기를 품에 안은 사람이 내렸다. 그는 카메라를 피해 고개를 숙였지만, 오른손 손등의 화상 자국은 오래전 그날과 같은 자리였다.
서윤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문을 열어 주었다.
서윤은 복사한 장비 기록을 휴대전화로 촬영해 날짜와 함께 별도 보관했다. 원본을 가져가지는 않았다. 서류가 필요하면 법무팀을 통해 요청해야 했다. 작은 절차 하나가 느리고 답답했지만, 자료를 지키려면 자신이 원하는 속도를 강요할 수 없었다.
“본부장에게 바로 물어볼 거야?” 태오가 물었다.
“오늘은 아니야. 기록에 적힌 ‘본인 요청’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전에는 질문이 너무 많아.”
“혹시 본부장이 이안을 봤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어도, 먼저 사실로 만들면 안 돼.”
서윤은 당시 근무표를 찾아보았다. 이안의 이름이 적힌 날짜에는 본부장뿐 아니라 외부 제작사 직원 네 명이 함께 있었다. 한 사람은 이미 퇴사했고, 다른 한 사람은 타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려면 이안의 동의와 방송국의 개인정보 검토가 필요했다. 무작정 연락해 옛일을 캐묻는다면, 당시 출연자에게 다시 불안한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 있었다.
“네가 먼저 달에게 질문을 하려는 게 맞아?” 태오가 물었다.
“그 사람이 연락하겠다고 했어. 나는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리는 건 네가 제일 잘하니까.”
서윤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태오는 곧바로 사과하지 않았다. 말이 아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유를 묻는 눈을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가.”
“미안. 내가 네가 괜찮은 줄 알았어.”
“괜찮은 척한 적은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진 않았어.”
태오는 그제야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이안이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네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힘들어할까 봐 설명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지. 그 판단이 너한테 뭘 남겼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어.”
서윤은 기록 화면을 닫았다. 사과를 받아야 하는 순간인지, 그냥 듣고 있어야 하는 순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바로 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남은 근무표를 사진 찍고 공식 요청 메일의 초안을 함께 작성했다.
그날 저녁, 본부장이 회의실에서 서윤을 불렀다. 그는 방송 원고에 개인적인 사연을 지나치게 담았다고 지적했다. 서윤은 개인적인 기억을 방송에 공개하지 않았으며, 청취자의 동의 없이는 파일을 보관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본부장은 자료를 더 받으면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했고, 그 목소리가 누군지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장비 번호 17-04를 기억하십니까?”
“오래된 자산 번호는 기억나지 않네.”
“그때 원본을 보관한 이유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서류를 통해 요청하게. 추측으로 사람을 몰아가면 안 되잖나.”
그가 서윤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서윤은 물러섰다. 본부장의 말은 정답처럼 들렸지만, 그의 손이 회의실 서랍을 닫는 순간 손등의 힘줄이 불거졌다. 그녀는 그 신체 반응만으로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질문을 문서로 남기겠다고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