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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라디오에 전 애인이 산다1화

자정의 라디오에 전 애인이 산다

자정의 라디오에 전 애인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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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마지막 방송의 사연

“오늘도 잠들지 못한 분들, 여기는 자정의 창입니다. 한서윤입니다.”

서윤은 마이크 앞에서 입술을 떼고, 유리창 너머 조정실을 보았다. 손가락 두 개를 편 태오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방송 시작까지 이십 초. 빨간 불이 켜지면 정해진 목소리만 내보내야 했다.

‘오늘은 조금 다른 밤이네요.’

그녀는 원고에 적힌 첫 문장을 지웠다. 책상 아래에 구겨진 종이가 세 장 있었다. 방송국장이 준 폐국 안내문, 광고주 이탈 보고서, 다음 달 계약 갱신 불가 통지서. 마지막 종이에는 서윤의 이름도 있었다.

“자정의 창은 오늘로 1,842번째 밤을 맞았습니다.”

태오가 헤드폰을 벗는 게 유리 너머로 보였다. 1,842회라는 숫자는 원고에 없었다. 서윤이 입사한 뒤부터 세어 온 숫자였다. 이 방송이 끝나면 프로그램은 주말 재방송 슬롯으로 밀리고, 그녀는 편성팀으로 돌아간다. 돌아갈 자리가 남아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만.

전화 연결음이 들어왔다. 신규 청취자 한 명. 이름은 ‘달’. 사연은 단 두 줄이었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목소리는 남나요? 저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 아직 그 사람이 살아 있다고 착각합니다.

서윤은 숨을 가볍게 들이마셨다. 이런 사연은 흔했다. 세상에 남겨진 사람은 모두 목소리를 하나씩 갖고 있었다. 음성 메시지, 오래된 영상, 엘리베이터에서 나누던 인사. 그런데 그녀는 사연보다 그 아래 적힌 ‘첨부 파일 있음’을 먼저 보았다.

“달 님, 혹시 파일을 보내셨다면 지금 방송에서 틀어도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낮고 조금 갈라졌다. 남자라고 확신하기엔 숨이 너무 얇았다. 하지만 끝 음절이 내려앉는 방식은 기억 속 누군가를 건드렸다.

“그럼 잠깐 듣겠습니다. 불편하면 바로 끊어 주세요.”

서윤은 파일 재생을 눌렀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먼저 흘렀고, 그 뒤로 젊은 남자의 웃음이 터졌다. 녹음이 오래되었는지 소리가 뭉개졌지만, 웃음 끝에 숨을 들이마시는 버릇만은 선명했다.

“괜찮아. 내가 먼저 사라지는 거 아니야. 네가 못 찾는 것뿐이지.”

서윤의 손이 콘솔 위에서 멈췄다.

그 문장은 이안이 마지막으로 남긴 음성 메시지와 같았다. 일곱 해 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 강이안은 오늘 밤만 지나면 설명하겠다며 집을 나갔다. 다음 날 그의 방은 비어 있었고,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경찰은 자발적 실종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이안의 가족은 서윤에게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서윤 씨.”

태오가 인터컴으로 불렀다. 지금은 방송 중이다. 돌아갈 수 없다. 서윤은 떨리는 손을 책상 아래로 내리고 입을 열었다.

“달 님, 이 목소리를 어떻게 갖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오래된 테이프에서 찾았습니다. 제 목소리는 아니에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이름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목소리를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누구인지 묻고 싶었다. 언제, 어디서, 왜. 질문이 목 안쪽에서 서로 밀쳤다. 서윤은 손바닥으로 책상 모서리를 눌렀다. 방송에서 사연을 캐묻는 건 금지였다. 이름을 알아내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떤 기분이 드는지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미안해집니다.”

“그분에게요?”

“그 사람을 기다리는 나한테요.”

조정실 바깥에서 태오가 입 모양으로 ‘광고까지 삼 분’이라고 했다. 서윤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의 마지막 코너는 익명 사연을 읽고 신청곡을 트는 것이었다. 이안의 목소리를 전파에 태웠다는 사실을 이대로 넘길 수 없었다. 그 목소리가 정말 이안의 것이라면, 누군가가 그녀보다 먼저 그를 만났다는 뜻이었다.

“달 님, 그 테이프를 방송국으로 보내실 수 있을까요? 원본은 돌려드리고, 사본도 임의로 보관하지 않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과 관련한 기록을 함께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그렇게까지 하시죠?”

“제가 아는 목소리와 닮아서요.”

사실은 닮은 게 아니었다. 서윤은 자신이 알고 있던 문장과 웃음의 순서를 똑같이 들었다. 그러나 청취자에게 확신을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길게 숨이 새었다.

“내일 밤, 방송국 앞 우편함에 넣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약속해 주세요.”

“말씀하세요.”

“그 목소리를 찾더라도 이름부터 부르지 마세요. 그 사람은 이름을 들으면 도망가야 한다고 배웠으니까.”

통화가 끝났다. 서윤은 잠시 송출 버튼을 바라보았다. 프로그램 종료 음악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준비한 문장을 전부 접어 두었다.

“오늘 들려드린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기다리는 일은 때때로 누군가를 붙잡는 일이 되고, 때로는 그 사람을 놓아주는 일이 됩니다. 그 사이에서 길을 잃은 분이 있다면, 오늘 밤은 혼자 답을 내리지 않으셔도 좋겠습니다.”

방송 종료등이 꺼졌다. 태오가 헤드폰을 벗고 부스 문을 열었다.

“저 목소리, 나도 어디서 들은 것 같아.”

서윤은 원본 파일을 다시 열었다. 첨부된 음성은 9초였다. 화면에 자동으로 뜬 메타데이터는 더 짧았다. 파일 생성 시각은 여덟 해 전. 녹음 기기는 방송국 보관함에서 사라진 구형 장비 번호와 같았다.

“달이 내일 테이프를 가져온대.”

“경찰에 넘길 거야?”

“먼저 확인부터 해야지. 이안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목소리야.”

“그렇게 말하면서 벌써 이안이라고 생각하잖아.”

서윤은 대꾸하지 못했다. 태오가 종이컵을 건넸다. 미지근한 커피는 쓰고, 종이컵 벽은 손에 눌려 쉽게 찌그러졌다. 그녀는 그 감각을 붙잡았다. 오래된 목소리에 닿기 전에 오늘의 사실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방송국 복도에서 국장의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태오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내일 오전에 편성회의야. 오늘 방송은 평가표에 올라갈 거고.”

“그럼 평가표에 적으라고 해. 마지막 방송이라서 사연을 받았다고.”

“마지막이라고 정해진 적은 없어.”

“계약서에는 그렇게 적혔어.”

서윤은 화면을 닫았다. 그 순간 개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메시지에는 사진 한 장과 짧은 문장이 있었다.

테이프는 보내지 않겠습니다. 그 목소리를 아는 분이라면, 내일 자정 전에 남문역 3번 출구로 와 주세요.

사진 속엔 방송국 로고가 찍힌 낡은 카세트테이프가 놓여 있었다. 테이프 라벨에는 볼펜으로 ‘이안 4월 17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윤은 처음으로 그 이름을 읽었다. 그리고 방송에서 약속한 것처럼 부르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방송을 마친 뒤에도 서윤은 믹서의 미터를 바라봤다. 마지막 사연이 끝났다는 표시처럼 작은 초록 막대가 한 줄씩 꺼졌다. 태오는 부스 문턱에 선 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는 평소라면 퇴근 전 장비 로그를 정리했겠지만, 오늘은 서윤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파일 복사본은 만들지 않았어. 원본 서버에 접근한 기록만 남겨 뒀어.”

“내가 부탁하지 않았는데.”

“네가 혼자 듣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서윤은 감사하다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태오의 배려를 당연한 것처럼 받지 않으려면, 무엇을 도와 달라고 할지도 분명히 해야 했다.

“내일 장비 목록을 같이 확인해 줘. 대신 누구한테 연락할지는 내가 정할게.”

“좋아. 확인하고 나면 기록은 네 메일로 보내지. 방송국 계정은 쓰지 말자.”

“자료를 숨기자는 뜻이면 안 돼.”

“보존 절차를 밟을 때까지 접근자를 제한하자는 뜻이야. 네가 공개 결정권자가 아니란 건 나도 알아.”

그는 그 말을 듣고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말하지 않은 일이 쌓여 있었다. 태오는 이안이 떠난 날 자신이 뭘 봤는지, 서윤은 자신이 그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 침묵을 풀기보다,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일부터 나눴다.

퇴근할 때 비가 그쳐 있었다. 서윤은 역까지 걷다가 방송국 앞 우편함을 확인했다. 누군가 넣어 둔 봉투는 없었다. 대신 출입문 안쪽에 작은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볼펜 글씨로 ‘테이프가 아니라, 목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필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쪽지를 사진으로 남긴 뒤 떼어 보관했다.

휴대전화에는 본부장의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와 있었다. 서윤은 바로 걸지 않았다. 아침에 공식 기록을 확인하고 나서 대화하겠다고 메모했다. 지금 전화를 걸면 이안의 이름을 먼저 묻고, 본부장이 거짓말하는지부터 확인하고 싶어질 게 뻔했다. 그녀는 그 충동을 눌러 두었다. 아직 자신이 가진 건 목소리 하나와 오래된 장비 번호뿐이었다.

집에 돌아온 뒤 서윤은 파일을 다시 틀지 않았다. 대신 방송국 출입 기록과 첨부 파일의 전송 시각을 나란히 적었다. 달은 방송국 내부망이 아닌 외부 청취자 페이지로 파일을 보냈다. 누군가 장비를 조작해 그녀에게 들려준 게 아니라, 사연자가 직접 선택해 보낸 기록이었다. 그 차이가 이안을 증명해 주지는 않았지만, 서윤이 해야 할 첫 확인을 정해 주었다. 그녀는 다음 날 방송 전에 파일을 보낸 경로와 삭제 요청 절차를 청취자 안내문에 추가하기로 했다.
그녀는 안내문 마지막에 익명 사연을 누구와 공유할지 청취자가 고를 수 있다는 문장을 덧붙였다. 원고를 저장한 뒤에야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적어도 다음 사연자는 자신이 무엇을 맡기는지 알고 방송에 전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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