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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라디오에 전 애인이 산다3화

자정의 라디오에 전 애인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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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남겨 둔 목소리

서윤은 부스의 조명을 한 칸만 켰다. 녹음기 남자가 의자에 앉자 태오는 물을 놓고 문 옆에 섰다. 본부장에게 알리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누구를 보호할지 정하지 못한 채 기록부터 넘기면, 더 큰 침묵을 만들 수 있었다.

“방송은 안 합니다.” 서윤이 말했다. “오늘은 이야기만 듣고, 녹음 파일은 동의 없이 재생하지 않을게요.”

남자가 모자를 벗었다. 머리가 희끗했고 관자놀이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왼손 새끼손가락의 흰 자국이 조명 아래 드러났다. 서윤은 기억 속 손과 지금의 손을 겹쳐 보았다. 크기도, 흉터도 같았다.

“이안 씨라고 불러도 됩니까?”

“그 이름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그렇습니까?”

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서윤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안은 녹음기를 테이블 위에 놓고,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기계는 작게 떨리다 멈췄다.

“내가 사라진 건 네 탓이 아니야.”

“그 말부터 하려고 7년을 기다렸어?”

“네가 날 찾지 않기를 바랐어.”

“그게 나를 위한 일이었다고?”

“아니.”

그는 짧게 잘랐다. 변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윤은 더 묻고 싶었다.

“그럼 누구를 위한 일이었어?”

“내가 겁이 나서.”

이안은 방송국 지하 녹음실에서 일하던 외주 기술자였다. 그가 반출한 것은 오래된 장비 하나가 아니었다. 당시 프로그램에 출연한 청소년들의 음성이 들어간 원본 기록이었다. 편성팀은 방송을 홍보 영상으로 재편집하며 출연자의 동의 범위를 넘어 가족사와 실명을 공개했다. 이안은 원본을 빼돌려 당사자들에게 돌려주려 했다. 그중 한 명이 서윤의 동생과 같은 학교에 다녔고, 방송 뒤 협박을 받았다.

“내가 너한테 말했으면, 너도 그 일을 알게 됐을 거야. 네가 방송국에 남아 있었으니까.”

“그 말은 내가 아니라 네가 결정한 거야.”

“맞아.”

“나는 네가 사라진 뒤에 이안 씨 가족한테서 편지를 받았어. 너랑 계속 만나면 내가 문제를 키우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어.”

이안이 눈을 감았다. 서윤은 그가 편지를 보냈는지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떤 말이 바뀌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지금 확실한 건 이안이 살아서 돌아왔고, 오래전 침묵을 자신이 선택했다고 인정했다는 사실뿐이었다.

“네가 돌아온 이유는 뭐야?”

“달의 방송을 들었어. 네가 그 목소리를 알아봤다고 해서.”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네가 여전히 나를 기다리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서윤은 웃지 않았다. “그럼 잘못 찾아왔네.”

이안은 손가락으로 녹음기의 갈라진 모서리를 쓸었다. “알아.”

“난 기다렸어. 그리고 그 기다림을 네가 원했는지조차 몰랐어. 네가 나를 보호하려고 한 건지, 네가 돌아오기 쉽게 자리를 남겨 달라는 뜻이었는지도 몰랐고.”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럼 돌아오지 않아도 돼.”

방 안에 냉각 팬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태오는 문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서윤은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고마웠지만, 지금 그 고마움을 빌려 이안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가진 원본 자료가 누구의 것인지, 그 사람들에게 어떤 위험이 생길 수 있는지 확인하는 거야. 이름과 얼굴이 그대로 들어 있으면 지워야 해. 기록을 보존해야 한다면 당사자 동의를 받아야 하고.”

“그 사람은 지금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어.”

“그럼 더더욱 네 판단으로 공개하면 안 돼.”

“원본에 네 목소리도 있어.”

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옛날 야외 녹음에서 그녀가 이안에게 장난처럼 했던 말들이 들어 있다면, 그것도 그 사람의 동의 없이 공개될 수 있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파일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파일을 틀면 누군가의 사적인 음성이 다시 방송국 안에 퍼진다.

“재생하지 않을게.”

“확인해야 하잖아.”

“자료 보존 담당자와 법무팀이 함께할 때. 당사자에게 연락할 방법을 먼저 찾고, 공개 범위를 정한 다음.”

이안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원본을 맡길게. 대신 그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 마.”

“당사자에게 확인을 구하는 것과 추적하는 건 달라. 그 사람의 안전을 기준으로 방법을 정할 거야.”

“결국 네가 결정하겠다는 거네.”

“아니. 나 혼자 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는 녹음기를 테이블 가운데로 밀었다. 하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내가 그 사람 대신 사과하고 싶었어.”

“그럴 수 없어.”

“알아.”

서윤은 녹음기와 이안의 손 사이에 빈 공간을 남겨 두었다. 태오가 종이와 펜을 건넸다. 셋은 장비를 넘기는 절차부터 적었다. 장비의 외형, 시각, 전달자, 보관 범위, 열람 조건. 이안은 서명 옆에 연락 가능한 우편 주소를 적었다. 주소가 실제인지 확인하는 동안 누구도 그를 붙잡지 않기로 했다.

“내일 담당자가 전화할 겁니다.” 서윤이 말했다. “그때도 원본을 맡기겠다고 하면 공식 보관으로 넘길게요.”

“네가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말이 그 사람을 다시 힘들게 할 수 있어.”

그 말은 이안이 자주 하던 걱정의 문장과 같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메모지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자신이 쓴 것은 짧았다.

그때 네가 사라진 일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 하지만 오늘 여기서 들은 말은 기록해 둘게. 답장을 기대하지 말고, 다음 연락은 네가 선택해.

이안은 종이를 접었다. “네가 나를 용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아니야. 내가 용서할지 말지는 지금 정할 일이 아니야.”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출입문 앞에서 한 번 돌아봤지만, 서윤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태오가 엘리베이터를 잡아 주었다. 문이 닫힌 뒤에도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괜찮아?” 태오가 물었다.

“아니. 그래도 오늘은 내가 확인한 것과 모르는 걸 구분했어.”

“그게 충분해?”

“오늘은.”

서윤은 다음 방송의 원고를 펼쳤다. 프로그램 폐국 날짜를 알리는 공지가 이미 편성팀에서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문장을 읽고, 뒤에 한 줄을 덧붙였다. 청취자들이 보내 준 사연의 원본을 함부로 보관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기록을 보호하되, 침묵으로 덮지 않겠다고도 썼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 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목소리를 찾았나요?

서윤은 한참 뒤에 답했다.

그 목소리를 낸 사람은 만났어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할 권리는 그 사람에게 남겨 두었습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그럼 다음에는 제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제 이름은 유경이고, 그 목소리를 녹음한 사람의 딸입니다.

서윤은 화면을 태오에게 보여 주었다. 그가 놀라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테이프를 가진 사람은 이안이 아니었다. 이안의 목소리를 지켜 온 사람은 그의 딸이었다. 그리고 이안이 지키려 했던 당사자의 이름은 여전히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서윤은 마이크를 켰다.

“오늘은 이름 대신, 먼저 허락을 구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다음 날, 자료 보존 담당자와 법무팀 직원이 함께 녹음기를 인수했다. 이안은 장비를 넘기면서도 열람 동의서의 문장을 하나씩 확인했다. 기록은 봉인하고, 당사자의 연락 의사를 묻기 전까지 파일을 재생하거나 복제하지 않는다. 방송국은 공개 목적으로 쓸 수 없다. 서윤은 자신의 이름을 책임자 칸에 적지 않았다. 보존 책임은 담당자가 맡고, 자신은 발견 경위를 진술하는 사람으로 남았다.

“이렇게까지 하면 아무도 못 듣겠네요.” 법무팀 직원이 말했다.

“당사자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않는 게 맞아요.” 서윤이 답했다.

이안은 서류가 봉인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떠날 때 그는 서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고마움으로 끝내면 다시 서로 빚을 지게 될 것 같았다. 그들은 연락을 약속하지 않고, 연락하지 않을 권리도 확인했다.

달에게서 온 메시지는 방송이 끝난 뒤에야 열었다. 유경은 이안의 딸이며, 파일 속 목소리는 아버지가 스무 살 무렵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긴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 목소리를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오래전 부탁했고, 유경은 자신도 그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썼다. 다만 혼자 간직할 자신이 없어 방송에 사연을 보냈다고 덧붙였다.

서윤은 답장을 천천히 썼다. ‘이름과 사연을 방송에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원하시면 방송국 외부에서 함께 들을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을 찾겠습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보낸 뒤에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유경의 선택이 오기 전까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그날 밤 방송국은 폐국 일정을 공식 공지했다. 자정의 창은 한 달 뒤 마지막 회를 맞는다. 서윤은 공지를 읽으며 자신이 프로그램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남은 방송에서 사연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보관하고 돌려줄지 설명하겠다고 했다. 청취자에게 받은 음성은 동의한 기간이 지나면 삭제하고, 공개 허락이 없으면 방송 자료로 남기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방송 후 태오는 조정실에서 기다렸다.

“이제 그만둘 거야?”

“아니. 한 달 동안은 계속할 거야.”

“누구를 위해서?”

서윤은 마이크의 전원을 끄고 대답했다. “여기서 목소리를 맡겨 준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내 목소리를 내가 고르기 위해서.”

유경의 답장은 새벽에 도착했다. ‘저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대신 그 녹음이 정말 안전하게 보관되는지 알고 싶어요.’ 서윤은 만남을 권하지 않았다. 요청한 확인 절차와 보존 담당자의 연락처만 전달했다.

잠시 후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본부장이었다.

“서윤 작가, 그 녹음기를 누가 가져왔나?”

“공식 인수 기록에 전달자 이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지 말게.”

“이유를 문서로 주십시오.”

전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 본부장은 전화를 끊었다. 서윤은 통화 기록을 보존하고, 통화 시각과 발언을 업무 메모에 옮겼다. 그가 누구를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숨기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질문은 방송 바깥에서도 계속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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