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무기 도색공은 마력의 흠집을 본다

2화: 길드가 지운 수리 날짜
쪽지는 새벽까지 공방 바닥에 놓여 있었다. 해원은 장갑을 낀 채 문장과 푸른 안료를 촬영하고, 종이를 투명 보관 봉투에 넣었다. 검은 금고 안에 잠갔다. 경찰에 신고하면 누가 보냈는지 밝혀질까. 그 전에 검이 장비팀 손에 들어갈 가능성은 없을까.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아침이 밝았다.
유경은 길드 본부로 돌아가지 않았다. 백야가 퇴직 절차를 미루며 출입증을 회수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녀는 장비실의 구조와 교대 시간을 알려 주겠다고 했지만, 해원은 그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검은 감정 대상이지, 잠입 도구가 아니에요.”
“들어갈 수 있을 때 기록을 확인해야 해. 내 출입증은 오늘까지만 살아 있어.”
“기록을 훔치자는 건가요?”
“기록을 훔기려는 사람이 이미 따로 있어.” 유경이 셔터 쪽을 바라봤다. “어젯밤 쪽지를 보낸 사람도 그중 하나겠지.”
해원은 말없이 동생의 검을 떠올렸다. 그녀가 확보한 건 균열과 수정액뿐이었다. 장비팀이 ‘사고 후 손상’이라고 주장하면, 칼날의 푸른 선은 죽은 헌터의 마지막 흔적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유경이 말한 지하 수리실의 기록은 검을 맡긴 날짜를 확인할 유일한 단서였다.
두 사람은 오전에 길드 본부로 갔다. 해원은 정식 방문증을 받았고 유경은 반납 예정인 출입증을 목에 걸었다. 유경의 무릎 보조대가 계단에서 작게 삐걱거렸다. 그녀가 엘리베이터로 가려 하자, 해원은 먼저 버튼을 눌렀다. 유경이 빚진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해원은 시선을 피했다.
장비실 앞에는 문태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도색 의뢰를 하러 온 사람처럼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품 검은 아직 안 돌려주셨죠.”
“돌려줄 사람은 유족이에요.” 해원이 말했다.
“그럼 감정 동의서에 서명하십시오. 무기 상태를 확인해야 사망 사고 정산을 끝낼 수 있습니다.”
“장비팀 기록부터 열람하게 해 주세요.”
태혁은 웃지 않았다. “외주 도색공에게 내부 기록을 보여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사고 정산도 유족 동의 없이 하시면 안 되죠.”
잠깐 정적이 생겼다. 태혁은 방문증을 확인했다. “오늘만 안내하겠습니다. 문서 열람은 감독자 입회하에 가능하고, 사진 촬영은 금지입니다.”
그는 두 사람을 장비실로 데려가면서 계속 말했다. 침착한 목소리로 규정을 나열했지만, 손은 카드키를 두 번이나 잘못 대었다. 해원은 그가 긴장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습관일 수도 있었다. 대신 카드를 댄 시각을 기억했다.
장비실에는 검과 방패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한쪽 벽의 정비 현황판은 최근 한 달치만 남아 있었다. 민재 이름이 적힌 칸은 비어 있었다. 해원은 빈 자리에 새 먼지가 덜 쌓인 것을 보았다. 누군가 종이를 떼어 냈다.
유경은 과거 동료인 정비기사 오도현을 불렀다. 도현은 작업용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해원을 보고 망설이다가 태혁을 보고 인사했다.
“민재 무기는 언제 들어왔습니까?” 해원이 물었다.
“저는 그 주에 휴가라서.”
유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도현 씨, 그때 야간 교대였잖아.”
“교대만 했습니다. 작업은 팀장님이 승인해야 들어가요.”
태혁이 끼어들었다. “정비 담당자가 추측으로 말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손에 쥔 렌치에 힘이 들어가 손등이 하얗게 변했다. 해원은 민재의 검 사진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날 장비실 문이 잠겨 있었나요?”라고 물었다.
도현은 렌치를 내려놓았다. “외부 수리실은 폐쇄됐습니다.”
“질문은 문이 잠겼느냐는 거였어요.”
“열려 있었습니다.”
태혁의 턱이 굳었다. 도현은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가 지나간 뒤 바닥에는 기름 묻은 작업표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해원이 주우려 하자 태혁이 먼저 신발로 덮었다.
“열람할 수 없는 자료입니다.”
“그럼 떨어뜨린 사람에게 돌려주죠.”
태혁은 작업표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해원은 그 짧은 동작을 봤다. 서류 내용보다 그가 숨긴 방식이 더 많은 말을 했다.
유경은 점심시간을 핑계로 해원을 옥상 쪽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 문이 닫히자 그녀는 난간을 붙잡고 숨을 골랐다. 무릎 통증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오늘은 괜찮다고 말하지 않을게.” 유경은 진통제를 삼켰다. “아까 도현 씨가 거짓말한 건 맞아. 하지만 태혁이 옆에 있으면 아무도 입을 못 열어.”
“그 사람이 민재 검을 직접 봤을까요?”
“봤겠지. 민재가 장비실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태혁은 수리실 폐쇄를 밀어붙였어. 이유는 안전 점검이라고 했지만, 그때부터 기록이 조금씩 없어졌어.”
해원은 더 묻지 않았다. 유경은 자기 이름을 걸고 증언할 수 없다고 했다. 해원은 그 말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유경의 손에서 약통이 떨어질 뻔한 것을 잡아 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당신이 가진 이야기는 당신 것이니까.”
그 말에 유경은 눈을 들었다. 경계하던 얼굴이 잠시 무너졌다. “민재한테도 그랬어야 했는데.”
“지금부터라도 같이 말해요. 혼자 말하라는 뜻은 아니에요.”
해원은 방문자 대기실로 돌아가 정식 열람 요청서를 제출했다. 요청 항목은 민재 검의 입고 기록, 작업 승인자, 외주 수리실 폐쇄 공지였다. 태혁은 접수증을 건네며 영업일 기준 일주일이 걸릴 거라고 했다. 해원은 기다리는 동안 검을 더 손상시키지 않도록 보관 환경을 확인하겠다고 답했다.
건물을 나서자 도현이 주차장 기둥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확인한 뒤 접힌 영수증을 내밀었다. “기록은 아니에요. 날짜만 확인하세요.”
영수증에는 폐쇄된 지하 수리실의 소모품 구매 내역이 찍혀 있었다. 민재가 검을 맡겼다고 말한 날, 회색 차폐 안료가 두 통 반출됐다. 승인자란은 비어 있었고 결제 계정은 장비팀 공용이었다.
“당신 이름도 있나요?” 해원이 물었다.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대신 누가 현장에서 그걸 썼는지는 압니다. 제가 말하면 팀 전체가 저를 버릴 거예요.”
그는 떠나기 전에 유경을 바라봤다. “누나가 아니라, 민재 씨가 마지막으로 수리실 문 앞에서 기다렸어요. 팀장님이 안으로 불렀습니다.”
해원은 그 말을 바로 믿지 않았다. 도현은 증언을 피하려 했고, 태혁에게 들킬까 계속 뒤를 살폈다. “민재가 들어가는 걸 봤나요?”
“문이 닫히는 건 봤습니다.”
“검도 같이 들어갔어요?”
“그건 못 봤어요.” 도현은 고개를 떨궜다. “그래도 민재 씨가 빈손으로 나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검을 들고 다니지 않았으니까.”
“그건 추측이에요. 본 것과 나눠서 말해 주세요.”
도현은 그녀를 잠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 사실만 남긴다는 말이 그에게는 숨을 곳을 만들어 준 것 같았다. 그는 영수증을 왜 보관했는지도 털어놓았다. 지하실 폐쇄 전날, 소모품 장부에만 남은 지출이 있었다. 누군가 현장 작업을 했는데 정비 이력에는 한 줄도 없었다. 자신은 그때 팀장에게 물었다가 “안료 폐기 처리”라는 답만 들었다.
“당신이 그걸 봤다는 걸 태혁도 알아요?”
“모를 겁니다. 제가 서랍에서 복사했어요.”
유경은 도현의 팔에 난 긁힌 상처를 보고 소독약을 꺼냈다. 도현이 괜찮다고 손을 뺐지만, 그녀는 붕대를 감았다. “다친 걸 숨기지 마. 너희 팀에서 그 말부터 배웠어?”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유경은 붕대 매듭을 짧게 묶었다. 해원은 영수증과 도현의 말을 별도 메모에 기록했다. 본 사실, 들은 말, 추측을 서로 다른 칸에 적었다. 한 장에 섞이지 않도록 종이를 바꿨다. 작은 구분이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게 만들었다.
유경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해원은 손에 든 영수증 모서리를 구겼다. 마른 종이가 손바닥을 찔렀다. 도현은 자신이 본 장면만 말했다. 검이 안으로 들어갔는지는 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날 밤 해원은 공방으로 돌아와 동생의 검을 다시 살폈다. 편광등 아래서 회색 안료가 균열 틈에 남긴 얇은 막이 보였다. 누군가 상처를 고치지 않고 빛만 막으려 했다. 칠을 벗기면 균열은 더 분명해지겠지만, 칼날의 표면을 손상할 위험도 있었다.
해원은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검은 증거이기 전에 민재가 쥐었던 물건이었다. 자신이 옳다는 걸 증명하려고 마지막 흔적까지 벗겨 낼 수는 없었다. 대신 안료 샘플을 채취할 각도와 조명을 적어 두었다. 내일은 금속을 깎지 않는 방식으로 비교 표본을 만들 생각이었다.
잠금장치가 울렸다. 해원은 몸을 굳혔다.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누군가 번호키를 눌러 보고 있었다. 틀린 번호를 세 번 입력한 뒤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녀는 CCTV 화면을 저장하고 유경에게 연락했다. 답은 곧 왔다. ‘도현 씨가 연락이 안 돼.’
동시에 해원의 화면에 알림이 떴다. 백야 길드가 민재 검의 장례 유품 인도 일정을 다음 날 오전으로 앞당겼다는 통보였다.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길드가 보관비와 손해액을 청구하겠다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해원은 검을 바라봤다. 지워진 날짜와 아직 남은 푸른 흠집. 그녀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회색 안료 샘플을 담을 유리병에 민재의 이름을 썼다.
밤이 깊어지자 공방 밖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유경의 전화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숨이 가빴다.
“도현 씨가 다쳤어. 지하 수리실 앞에서 발견됐대. 해원아, 그 사람이 네 이름을 찾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