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식 밤, 기사님이 내 판결문을 훔쳤다

1화: 달빛 아래 수정 명령
솔레아는 판결문의 마지막 줄을 읽다가 펜촉을 멈췄다. 사형 집행일이 오늘 밤에서 내일 월식 뒤로 바뀌어 있었다. 문장 위에 덧쓴 잉크는 검은색이었지만, 종이에는 달빛 잉크의 희미한 압흔이 남았다. 누군가 원래 날짜를 지웠다.
“이 명령에 왕녀님의 인장이 있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보관소 관리인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두루마리를 돌렸다. “인장은 정상입니다. 재심을 거쳐 형을 확정하라는 명령이죠.”
“월식 전에 재심 절차가 없었어요.”
“왕실은 월식 때 판결을 바꿀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와 기록은 다릅니다.”
솔레아는 문서칼 끝으로 종이 결을 건드리지 않고 덧칠된 부분을 살폈다. 달빛 잉크는 보통 한 번 바르면 흔적을 지운다. 그러나 이 종이에는 두 겹의 압흔이 겹쳐 있었다. 원래 문장은 ‘즉시 집행’이었다. 그 위에 날짜 변경이 덧씌워졌다.
“누가 고쳤죠?”
“기록실에서 보관할 문서가 아닙니다.” 관리인이 두루마리를 가져가려 했다.
솔레아는 손을 거뒀다. “그럼 인계 서명부터 해 주세요.”
관리인의 턱이 굳었다. 그는 서명을 거부하고 문을 나섰다. 솔레아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문서를 별도의 증거함에 넣었다. 원본을 건드리지 않고 압흔을 확인하려면 달빛 잉크가 필요했다. 그녀는 병마개를 열었다가 망설였다. 잉크를 오래 들여다보면 자기 기억이 흐려졌다. 지난번 사용 뒤 어머니가 자주 불러 주던 자장가의 마지막 소절이 사라졌다.
“오늘은 짧게 확인하자.”
그녀는 종이 모서리에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지워진 문장이 파랗게 떠올랐다. ‘월식 전 집행, 왕녀의 서명으로 재검토.’ 그 밑에는 서명 아닌 이름이 희미하게 남았다. 나린 왕녀의 이름이 아니었다. 오든 서기관장의 필체였다.
종루가 낮게 울렸다. 월식이 시작되기까지 세 시간이 남았다. 판결이 효력을 바꾸기 전까지 죄수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솔레아는 봉인함을 잠그고 열쇠를 꺼냈다. 문 앞에는 호위기사 이반이 서 있었다.
“원본을 어디로 옮깁니까?” 그가 물었다.
“왜 그걸 묻죠?”
“감옥 쪽으로 이동하는 병력이 두 배로 늘었습니다. 죄수는 이미 이송될 겁니다.”
“누가 명령했습니까?”
“왕녀의 문장이 찍힌 명령서입니다.”
“왕녀는 오늘 아침까지 재심을 요청했어요.”
이반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럼 누군가 명령을 바꾼 겁니다.”
“원본이 있어야 확인할 수 있어요.”
그가 문을 닫았다. “원본을 내게 주십시오.”
“당신은 호위기사입니다. 왜 문서를 원하죠?”
“죄수를 살리고 싶습니다.”
“누구 명령으로?”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솔레아는 열쇠를 손안에 감췄다. “그 말은 믿기 어렵네요.”
이반이 손을 내밀었다. “왕녀를 믿으세요. 그녀는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그럼 원본을 왜 숨겨야 하죠?”
그는 답을 찾지 못했다. 복도 끝에서 병사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솔레아는 둘 사이에 서류함을 두고, 숨겨 둔 문서칼을 꺼냈다.
“원본은 보관소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그렇다면 보관소 안에서 그를 죽이겠죠.”
“그를 구하고 싶다면 왕녀에게 직접 말하세요.”
“말할 기회가 없습니다. 왕녀는 궁정 탑에 격리됐어요.”
그 말에 솔레아가 멈칫했다. 이반은 사실을 숨기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문서함을 열어 원본을 꺼냈다. 문서 가장자리에 왕실 봉인이 보였다. 그러나 왁스 아래 얇은 실금이 있었다. 누군가 봉인을 다시 붙였다는 뜻이었다.
“이걸 가져가면 당신은 반역자가 됩니다.”
“이미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그 죄수를 당신이 아나요?”
이반은 시선을 내렸다. “그는 제 전우의 동생입니다. 내가 그를 구하지 못했어요.”
“그럼 이번에는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가 거짓말을 꾸미지 않자 솔레아는 더 화가 났다. “당신이 구하려는 사람의 판결문을 훔치면, 그 사람은 진실을 말할 기회를 잃어요.”
“원본을 돌려주면 집행될 겁니다.”
“재판의 절차를 멈추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훔치는 게 답은 아니에요.”
복도에서 경비가 문을 두드렸다. “서기관님, 인계 명령입니다.”
솔레아는 문서함을 이반에게 넘기지 않았다. 대신 벽난로에 가까이 가져갔다. “문을 열면 이걸 태우겠습니다.”
이반의 손이 칼자루로 향했다.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럼 당신이 먼저 나가요.”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솔레아도 불꽃에 종이를 밀어 넣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다음 행동을 읽지 못한 채 버텼다. 문이 한 번 더 흔들렸다.
“당신은 기록을 지키는 사람이잖아요.” 이반이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기록은 아무것도 못 해요.”
“그래서 원본을 훔치려는 겁니다.”
“그럼 왕녀를 데려와요. 제가 원본을 직접 보여 주겠습니다.”
이반은 문서함을 노려보다가 칼을 뽑았다. 솔레아는 숨을 삼켰다. 그는 칼날을 그녀에게 겨누지 않고, 문서함의 자물쇠를 잘랐다. 원본은 그대로 둔 채 금속 고리만 끊겼다.
“지금 함께 가면 진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궁정 서기관이지 도주자가 아니에요.”
“그럼 원본을 가져갑니다.”
그는 판결문을 집어 들었다. 솔레아가 손을 뻗었지만, 그는 한 발 물러나 창문을 열었다. 바깥 난간에서 경비병이 뛰어올라왔다. 이반은 판결문을 갑옷 안에 넣고 아래쪽 회랑으로 뛰어내렸다.
솔레아는 뒤쫓으며 종을 울렸다. “원본을 훔친 자가 있다!”
복도 모퉁이에서 문지기 하나가 그녀를 막아섰다. “왜 서기관장이 직접 인계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를 불러오세요.”
“이미 서기관장 명령으로 북쪽 문을 닫았습니다.”
솔레아는 문지기의 손목을 보았다. 왕실 인장이 아니라 기록실 열쇠를 달고 있었다. “당신도 보관소 직원이군요. 문을 열어 주세요. 판결문이 훼손되면 당신 이름도 인계 기록에 남을 겁니다.”
그는 망설이다 열쇠를 돌렸다. 짧은 틈이 생겼고, 이반의 발소리가 그 너머로 사라졌다. 솔레아는 그가 도망쳤다는 사실보다, 명령을 받은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비병들이 계단을 내려가고, 그녀는 숨이 턱에 찰 때까지 이반을 추격했다. 그는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문을 닫고, 통로를 막고, 병사들이 다치지 않도록 방패를 돌렸다. 그가 죄수를 구하려는 건 진심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판결문을 가져간 일이 옳아지는 건 아니었다.
달 그림자가 궁정 유리창을 덮기 시작했다. 이반이 하인 통로로 사라지기 직전 솔레아는 그의 망토 끝을 잡았다. 천이 찢어졌고, 그녀 손에 은색 단추가 남았다.
“이반, 멈춰요!”
“미안합니다.”
“돌아와서 설명하세요.”
“월식이 끝나기 전에요.”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솔레아는 찢긴 망토 조각과 단추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에 달빛 잉크가 묻어 있었다. 벽에 남은 희미한 문장 하나가 드러났다. ‘죄수의 이름은 원본에서 바뀌었다.’
솔레아는 숨을 고르고 단추의 뒷면을 살폈다. 금속 밑에 얇은 종이 조각이 끼어 있었다. 그 위에는 판결문의 필체와 다른 짧은 글이 눌려 있었다. ‘이중 봉인은 두 사람의 손으로.’ 문장이 끝나는 곳에 어머니의 낡은 서명이 있었다.
그녀는 그 글씨를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기록실에서 쫓겨난 뒤 남긴 편지에도 같은 꼬리가 달린 ‘ㅅ’자가 있었다. 솔레아는 편지함으로 달려갔다. 어머니가 남긴 종이들은 잠긴 서랍 안에 있었고, 먼지 하나 없이 정리돼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열어 본 흔적이었다.
서랍 안쪽에는 어머니의 증언 초안이 있었다. ‘월식 판결은 왕실의 재심권을 의미하지 않는다. 증인 없이 봉인된 판결은 효력이 없다.’ 아래쪽은 찢겨 나가 문장이 끝나지 않았다. 종이 끝에는 재무청이 아닌 왕녀의 개인 문장이 찍혀 있었다.
솔레아는 그 문장을 읽자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달빛 잉크를 쓴 탓에 어머니가 웃을 때 생기던 눈가의 주름이 선명하지 않았다. 기억이 멀어지는 걸 느끼자 그녀는 종이를 내려놨다. 오늘은 더 잉크를 쓰지 않을 것이다.
“서기관님!” 문 앞에서 젊은 기록관이 헐떡였다. “오든 서기관장이 원본 보관소를 봉쇄했습니다. 서명 없는 명령서로 문을 열라고 합니다.”
“왕녀의 인장도 없이요?”
“예. 경비대가 이미 움직였습니다.”
솔레아는 증언 초안을 품에 넣고 다시 복도로 나왔다. 이반이 가져간 원본을 되찾아야 했지만, 이제 그 문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왕녀의 진술, 죄수의 증언, 어머니가 남긴 이중 봉인 제안까지 함께 공개해야 했다.
그녀는 경비를 피하기 위해 정문이 아닌 제본실로 향했다. 종이 냄새가 진한 방에서 오래된 판결철을 꺼내자, 어머니 이름으로 등록된 문서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그중 가장 최근 기록에는 ‘기록물 위조 혐의, 증거 불충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판결일은 어머니가 궁정을 떠난 바로 그날이었다.
솔레아는 종이를 꽉 쥐었다. 어머니는 무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과거를 복수하는 게 아니었다. 죄수의 이름을 되찾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창밖에서 월식 전 마지막 종이 울렸다. 솔레아는 이반의 은색 단추를 목걸이 끈에 묶었다. 그를 찾으면 판결문을 돌려받고, 왜 어머니의 흔적을 남겼는지 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먼저, 원본을 훔치게 만든 구조 자체를 밝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