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1로 지구를 구하는 법

5화: 백 번의 출구
화염 마수의 이빨이 강현의 손목을 물고 있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은 없었다.
대신 날카로운 통증이 살갗을 물고 늘어졌다. 시스템은 아직 아무 문자도 띄우지 않았다. 물고 있는 힘만으로는 피해 판정이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제는 머리 위였다.
붉은턱 오우거의 그림자가 천장을 가렸다. 거대한 주먹이 바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강현은 손목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 빼낼 힘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팔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물었으면 책임져."
화염 마수가 당황해 턱을 비틀었다.
강현은 놈의 목덜미 갈기를 움켜쥐고 몸을 낮췄다. 오우거의 주먹이 방향을 바꿀 시간은 없었다.
쾅!
주먹이 화염 마수의 머리 옆을 후려쳤다. 충격으로 마수의 턱이 벌어지고 강현의 손목이 빠져나왔다. 그는 바닥을 굴렀다. 돌조각이 등줄기를 긁고 지나갔다.
[피해량: 1]
[현재 체력: 1/10]
숨이 멎을 뻔했다.
숫자 하나.
남은 것도 하나.
강현은 바닥에 엎드린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오우거와 화염 마수가 뒤엉켜 벽을 들이받는 소리가 동굴을 흔들었다. 둘 다 마력을 잃었지만 몸집은 재앙이었다.
"강현 씨!"
민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살아 있습니다."
강현은 겨우 대답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저쪽에서 뛰쳐나올 것 같았다.
그는 손목을 봤다. 피가 흘렀지만 손가락은 움직였다. 그래도 체력은 하나였다.
박도윤이 출구 근처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이야! 전부 빠져나가!"
검을 든 헌터 하나가 돌무더기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사람 하나 정도는 겨우 빠져나갈 수 있어 보였다.
강현은 고개를 들었다.
오우거가 화염 마수의 등을 짓누른 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수의 갈기에서는 작은 불씨가 다시 튀었다. 강현과 거리가 벌어지자 마력이 되살아나려는 시도였다.
"안 됩니다."
도윤이 미친 사람 보듯 돌아봤다.
"뭐가 안 돼!"
"저놈들 살아 있잖아요."
"밖으로 나가서 막으면 돼!"
"누가요?"
도윤은 답하지 못했다.
강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한 걸음 내딛자 무릎이 꺾였다. 체력 1은 살아 있다는 표시일 뿐이었다. 움직일 수 있다는 보증은 아니었다.
그때 민재가 벽을 짚고 일어났다.
"팀장님."
"넌 또 왜!"
"포션 주머니 주세요."
도윤의 손이 허리춤으로 갔다.
너무 빠른 반응이었다.
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강현도 봤다. 도윤의 허리 뒤에 매달린 작은 가죽 주머니를.
"없다며요."
강현이 말했다.
도윤의 입술이 씰룩였다.
"비상용이다. 팀장 권한으로 관리하는 물자야."
"그럼 지금이 비상입니다."
"너한테 줄 물자는 아니야!"
오우거가 몸을 털었다. 화염 마수가 바닥을 긁으며 빠져나오려 했다. 붉은 갈기에서 불씨가 커졌다.
민재가 움직였다.
그는 다친 팔 대신 발을 썼다. 벽에 기대어 몸을 밀고 도윤의 허리춤을 걷어찼다.
"야!"
가죽 주머니가 풀려 바닥을 굴렀다. 작은 포션 병 두 개가 돌가루 사이로 튀어나왔다.
민재가 비명을 삼키며 하나를 강현 쪽으로 찼다.
병이 바닥을 굴러 강현의 발끝에 닿았다.
강현은 주저하지 않았다. 병마개를 이로 뜯고 붉은 액체를 삼켰다.
[체력이 1 회복되었습니다]
[현재 체력: 2/10]
목숨 하나가 돌아왔다.
강현은 남은 병을 민재 쪽으로 밀어 찼다.
"가지고 있어요. 제가 부르면 던져요."
민재가 병을 붙잡았다. 도윤은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다가오지 못했다. 오우거가 다시 강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현은 금 간 단검을 들었다.
"민재 씨. 오우거 몇이죠."
"여든아홉입니다."
"끝까지 세요."
"정말 끝까지요?"
"네."
강현은 웃음 비슷한 숨을 뱉었다.
"제가 중간에 잊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오우거가 달려들었다.
강현은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놈의 오른쪽 무릎은 이미 여러 번 찔렸다. 몸을 낮추는 순간 무게중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는 돌바닥에 엎드리듯 미끄러져 무릎 뒤로 파고들었다. 단검이 내려갔다.
[피해량: 1]
[붉은턱 오우거의 체력: 88/100]
"여든여덟!"
다시.
[피해량: 1]
[붉은턱 오우거의 체력: 87/100]
"여든일곱!"
오우거의 손바닥이 옆을 찍었다. 강현은 칼을 빼며 굴렀다. 맞으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몸을 먼저 움직이게 했다.
그는 세지 않았다.
민재가 세었다.
"여든둘! 여든하나!"
강현은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숫자가 줄어드는 만큼 팔도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관절 틈을 노렸고 나중에는 닿는 곳이면 어디든 찔렀다.
[피해량: 1]
[붉은턱 오우거의 체력: 70/100]
"칠십!"
오우거가 포효했다.
마력 없는 포효도 귀를 찢고 다리를 굳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강현은 한 박자 늦었다.
오우거의 팔꿈치가 옆구리를 스쳤다.
[피해량: 1]
[현재 체력: 1/10]
시야가 하얗게 튀었다.
"포션!"
민재가 병을 던졌다.
강현은 몸으로 받았다. 병이 가슴에 부딪혀 떨어지려는 순간 그는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마개를 뜯는 손이 떨렸다.
붉은 액체가 반쯤 목으로 넘어갔다.
[체력이 1 회복되었습니다]
[현재 체력: 2/10]
"비싼 거 아껴 마셔야 하는데."
그가 중얼거리자 민재가 울 듯한 얼굴로 웃었다.
"지금 농담 나옵니까?"
"안 나오면 죽을 것 같아서요."
강현은 다시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든다는 말은 너무 멋졌다. 실제로는 비틀거리며 붙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리고 돌무더기 뒤로 숨고 화염 마수의 몸통을 방패처럼 썼다.
화염 마수는 그때마다 불을 피우려 했다.
강현이 곁을 스치면 불씨가 꺼졌다.
그는 오우거를 찌르고 화염 마수의 턱을 발로 밀고 다시 오우거에게 붙었다. 두 괴물은 서로의 몸집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쉰!"
민재의 목소리가 쉬었다.
"마흔아홉!"
단검의 금이 손잡이까지 번졌다.
강현은 그것을 봤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죽었다. 부러지면 그때 생각하면 됐다.
"서른!"
오우거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마력이 없는 상태에서 상처가 누적되자 거대한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것이다.
강현은 그 변화에 매달렸다.
"스물!"
그 순간 단검이 부러졌다.
챙그랑.
칼날 절반이 오우거의 허벅지에 박힌 채 떨어졌다. 강현의 손에는 짧은 손잡이와 날 조각만 남았다.
도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끝났네."
강현은 손잡이를 내려다봤다.
끝났나.
오우거가 비틀거리며 팔을 들었다.
강현은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철 조각이 손가락 사이에서 흔들렸다.
"아직 손이 남았죠."
그는 오우거의 찢어진 눈가를 향해 손잡이를 내리찍었다.
[피해량: 1]
[붉은턱 오우거의 체력: 19/100]
민재가 숨을 삼켰다.
"열아홉!"
강현도 잠깐 멈췄다.
무기가 제대로 된 형태가 아니어도 들어갔다. 칼보다 직접 때렸다는 사실이 중요한 모양이었다.
"좋네."
그는 돌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장비값 굳었다."
그 뒤는 더 지저분했다.
강현은 손잡이로 찍고 돌로 때리고 무릎으로 밀었다. 시스템은 매번 같은 문자를 띄웠다.
[피해량: 1]
"열!"
[피해량: 1]
"아홉!"
오우거의 손이 강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가락이 조여 오자 뼈가 삐걱였다.
[피해량: 1]
[현재 체력: 1/10]
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남은 포션은 없었다. 마지막 반 모금은 조금 전 이미 비워졌다.
"강현 씨!"
"괜찮아요."
안 괜찮았다.
그는 오우거의 손가락 사이로 몸을 틀어 빠져나왔다. 어깨가 빠질 듯 아팠지만 체력은 더 줄지 않았다.
"여덟!"
민재가 계속 세었다.
숫자가 강현을 붙잡았다.
일곱.
여섯.
다섯.
오우거는 더 이상 포효하지 못했다. 무릎이 꺾이고 턱이 바닥에 닿았다. 강현은 놈의 콧등 위에 올라타 손잡이를 내려찍었다.
[피해량: 1]
[붉은턱 오우거의 체력: 1/100]
"하나!"
강현은 숨을 들이켰다.
마지막은 주먹이었다.
그는 갈라진 손등으로 오우거의 이마를 툭 쳤다.
[피해량: 1]
[붉은턱 오우거의 체력: 0/100]
[붉은턱 오우거가 처치되었습니다]
거대한 몸이 무너졌다.
동굴이 다시 흔들렸다. 오우거의 시체가 재처럼 흩어지고 남은 마력 찌꺼기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강현은 그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끝이 아니었다.
화염 마수가 출구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놈의 갈기에서 붉은 불씨가 커지고 있었다.
"불 붙습니다!"
민재가 외쳤다.
강현은 대답할 힘도 아까웠다.
그는 화염 마수에게 걸어갔다. 한 걸음마다 발바닥이 돌에 붙는 것 같았다. 체력 1. 포션 없음. 단검 없음.
그래도 마수는 강현보다 더 망가져 있었다. 강현이 가까워지자 붉은 불씨가 흔들렸다.
두 걸음.
불씨가 작아졌다.
한 걸음.
치익.
불이 꺼졌다.
강현은 마수의 옆구리에 손을 올렸다.
[대상 현재 마력: 1/1]
"도망은 안 되지."
화염 마수가 고개를 돌려 그를 물려 했다. 강현은 피하는 대신 남은 힘으로 턱 아래에 몸을 붙였다.
이빨이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현은 기어이 놈의 코앞에 주먹을 박았다.
[피해량: 1]
화염 마수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한 번!"
민재가 외쳤다.
그 뒤의 싸움은 싸움이라기보다 노역이었다.
화염 마수는 불을 쓰지 못했고 강현은 제대로 때릴 힘이 없었다. 그는 돌조각을 쥐고 마수의 코와 눈가와 앞발을 계속 찍었다.
한 번.
또 한 번.
민재는 더 이상 정확한 체력을 보지 못했다. 대신 강현이 때릴 때마다 뜨는 [피해량: 1]을 외쳤다.
"스물셋!"
"스물넷!"
도윤은 출구 틈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숨긴 포션 주머니와 강현을 버리려던 지시를 민재가 모두 들었다.
화염 마수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강현은 몇 번이나 넘어졌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손을 뻗었다. 손이 닿으면 불이 꺼졌다.
마지막에는 돌조각도 부서졌다.
강현은 맨주먹을 들었다.
"이거까지 되면 진짜 사기인데."
주먹이 마수의 코끝에 닿았다.
[피해량: 1]
화염 마수의 몸이 크게 떨렸다.
놈의 붉은 갈기가 검은 재로 변했다. 거대한 몸이 무너져 바닥에 엎어졌다.
[붉은갈기 화염 마수가 처치되었습니다]
동굴 전체를 채우던 붉은 금이 빛을 잃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던 돌가루가 멎고 출구 쪽의 불안정한 균열도 천천히 닫혔다. 던전 브레이크가 끝나는 소리였다.
강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은 피투성이였고 옷은 걸레가 됐다. 상태창은 여전히 얄밉게 단순했다.
[레벨: 1]
[현재 체력: 1/10]
[근력: 1]
[민첩: 1]
[체력: 1]
[마력: 1]
"보상은요?"
아무 창도 뜨지 않았다.
"경험치도 없고?"
역시 아무 창도 없었다.
강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너무하네."
그때 출구 바깥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손전등 빛이 무너진 틈 사이로 들어왔다.
"생존자 확인! 안쪽에 생존자 있습니다!"
협회 구조대의 목소리였다.
민재가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도윤은 창백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강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구조대원들의 불빛이 그를 비췄다. 두 보스가 사라진 동굴 한가운데에 피투성이 F급 짐꾼이 앉아 있었다.
누군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혼자 잡은 겁니까?"
강현은 상태창을 다시 봤다.
레벨 1.
스탯 1.
체력 1.
던전 밖으로 나가면 저 숫자를 다시 검사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부러진 단검 손잡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강현은 갈라진 입술로 말했다.
"포션값부터 청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