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현장의 마지막 1분을 재생합니다

2화: 왼손의 궤적
늦가을의 해는 짧았다. 공장 지붕의 깨진 틈새로 비쳐 들던 잿빛 햇살마저 잦아들자 현장은 금세 음산한 냉기로 가득 찼다.
임시 지휘 텐트로 개조된 기동대 버스 안에서는 관할서 강력팀장 오 경감의 목소리가 찌렁찌렁 울리고 있었다.
"윤 팀장님, 아무리 본청 미제팀이라도 이건 선을 넘는 겁니다. 뜯겨 나간 사무실 금고를 보세요. 쇠지렛대로 아주 박살을 내놨습니다. 노숙자든 외지 부랑아든 돈 될 거 찾아서 들어왔다가 경비 영감한테 들키니까 후려치고 튄 게 뻔한 그림 아닙니까?"
오 경감은 턱을 치켜들며 모니터에 띄워진 금고 사진을 가리켰다. 철판이 흉하게 뒤틀려 있었고 내부 서류는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윤해진 팀장은 얇은 종이컵에 담긴 식은 녹차를 홀짝이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언제나 상대의 조급함을 끌어내는 무기였다.
"금고가 털렸으니 강도다. 지극히 평면적인 시각이군요. 오 경감님."
해진이 컵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결론을 미리 정해 두고 현장을 꿰맞추지 않습니다. 강 경위, 분석 결과 설명하세요."
버스 구석에 서 있던 강도윤이 태블릿을 조작했다. 화면에 공장 바닥의 혈흔 분포도와 사무실 출입구의 확대 사진이 나란히 떴다.
도윤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몇 시간 전 김성철의 피에 닿았을 때 전신을 찢고 지나갔던 그 60초의 고통과 공포가 아직 신경 끝에 잔열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금고가 파손된 시간은 살인이 벌어진 직후가 아닙니다."
도윤이 화면 속 족적과 마찰흔을 펜 끝으로 짚었다.
"피해자 김성철 씨는 공구 창고 앞쪽에서 후두부를 가격당하고 질식사했습니다. 그런데 시신 주변의 비산 혈흔이 건조된 뒤에 찍힌 신발 자국이 사무실 바닥으로 이어집니다. 그것도 아주 느리고 침착한 보폭입니다."
오 경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 죽여놓고 금고 털러 가는 거야 당연한 수순이지."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강도라면 극도의 흥분과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당장 달아나기 바쁘거나 금고로 달려가면서 바닥의 혈액을 밟고 미끄러진 흔적이 남아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이 침입자는 피해자가 완전히 숨을 거둘 때까지 기다린 뒤 천천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도윤은 다음 사진으로 화면을 넘겼다. 흉하게 뒤틀린 금고 자물쇠 부근의 접사였다.
"더 결정적인 건 금고 문에 남은 도구 흔적입니다. 쇠지렛대로 억지로 젖힌 흠집 아래쪽에 정밀한 열쇠 긁힘 자국이 있습니다. 침입자는 애초에 금고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한 뒤에 굳이 지렛대로 문짝을 부숴 강도의 소행처럼 꾸민 겁니다."
텐트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듣고 있던 박지후 형사가 낮게 헛기침을 삼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강도가 아니라 내부 사정을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강도처럼 보이려고 연출을 한 놈이란 말이죠?"
"예. 낡은 금고 안에 현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파손했습니다. 이 공장의 내부 구조와 피해자의 동선을 꿰뚫고 있는 사람입니다."
도윤의 서늘한 설명에 오 경감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다 헛기침을 뱉었다.
"그, 그래도 밖에서 흘러들어온 놈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오 경감님."
해진이 말을 끊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거스를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문고리 내측에서 발견된 낡은 작업용 가죽 장갑 섬유와 유분, 왼손잡이의 타격 궤적. 여기에 금고 위장 공작까지 더해졌습니다. 이제 초점을 좁혀야 할 때입니다."
해진은 시선을 지후와 도윤에게 돌렸다.
"이 공장이 문을 닫은 지 2년입니다. 최근까지 피해자와 연락을 주고받았거나 공장 내부 자재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명단을 추려요."
"벌써 털어놨습니다, 팀장님."
지후가 기다렸다는 듯 두툼한 파일철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부도 당시 남았던 잔여 설비와 자재를 처분하면서 김성철 씨와 얽힌 인물이 총 열두 명입니다. 그중에서 최근 한 달간 공장 근처 기지국에 통화 기록이 잡혔거나 피해자와 금전 거래가 있었던 놈은 딱 세 명으로 압축됩니다."
지후의 손가락이 세 장의 프로필 사진을 차례로 찍었다.
"첫 번째는 전직 총무과장이자 자재 처분을 도맡았던 최태섭. 두 번째는 폐기물과 고철을 정기적으로 실어 나르던 화물 기사 배진만. 세 번째는 피해자의 전임 야간 교대자였던 강학수입니다. 셋 다 공장 구석구석을 자기 집 안방처럼 아는 인간들입니다."
도윤은 탁자 위에 놓인 세 장의 사진을 천천히 응시했다.
시선이 머무는 순간 머릿속 한편에서 희미한 이명이 스쳤다.
'딱, 딱, 뚝.'
어둠 속에서 피해자의 숨통을 죄어 오던 그 서늘한 금속성 리듬.
도윤은 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오른손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 손가락 끝에 남아 있던 김성철의 체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규칙에 따르면 재생으로 본 기억의 세부는 스물네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흐려진다.
그전에 찾아내야 했다. 어둠 속에서 거침없이 걷던 그 침착한 발걸음과 왼손으로 문을 비틀어 열던 완력의 주인을.
공장에서 차로 이십 분 떨어진 도로 위. 덜컹거리는 구형 승합차 안에서 지후가 담배를 입에 물려다 도윤의 눈치를 보고 도로 집어넣었다.
"강 경위, 아까 버스에서 브리핑할 때 진짜 멋있더라. 오 경감 그 양반 얼굴 똥 씹은 표정 되는 거 보니까 체증이 다 내려가던데."
"사실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 사실을 짚어내는 눈이 귀신같다는 거지. 감식반 애들도 혀를 내두르더만. 근데 말이야."
지후가 운전대를 툭툭 치며 물었다.
"아까 범인이 왼손잡이라는 거 말인데. 문고리 잡은 손이 왼손이라는 건 알겠는데 둔기 휘두른 것도 왼손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했어? 급하면 오른손잡이도 왼손으로 문 밀 수 있잖아."
도윤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황량한 국도변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답했다.
"문이 열리는 구조 때문입니다."
"구조?"
"공구 창고의 철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밀어 넣으며 닫히는 미닫이 형태였습니다. 오른손잡이라면 본능적으로 오른손으로 문짝을 밀고 왼손으로 둔기를 잡기 어렵습니다. 타격의 각도가 시신의 오른쪽 후두부에 치우쳐 있었고 상흔의 깊이가 좌측으로 깊게 파였습니다. 왼손으로 체중을 실어 휘두른 궤적입니다."
도윤은 말을 아꼈다. 실제로 그가 본 것은 문틈을 억세게 틀어쥐었던 왼손 가죽 장갑의 무자비한 악력이었다. 피해자가 온 힘을 다해 버티던 문을 단 한 번의 비틀림으로 열어젖힌 손.
그 힘은 결코 보조 손의 완력이 아니었다.
"하긴,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지후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첫 번째 타깃은 전직 총무과장 최태섭이야. 이 인간, 부도 직전까지 공장 자금 빼돌렸다는 의혹으로 피해자 김성철 씨랑 멱살잡이까지 한 전적이 있거든. 지금은 인근 고철 야적장에서 자재 관리 일을 하고 있대."
승합차는 거대한 고철 더미가 산처럼 쌓인 야적장 입구에 멈춰 섰다. 굴착기가 쇳덩이를 집어 올릴 때마다 귀를 찢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기름때 묻은 컨테이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담배 연기 속에서 쉰 살가량의 마른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누런 조끼를 걸친 사내의 눈빛이 형사 배지를 보자마자 사납게 흔들렸다.
"경찰이 여긴 또 웬일입니까? 난 성철이 형 죽은 거랑 아무 상관없다고 관할서에 다 말했는데."
사내 최태섭이 신경질적으로 담뱃재를 털었다.
도윤의 시선이 즉각 사내의 손으로 향했다.
담배를 쥐고 있는 손은 오른손이었다. 재떨이를 당기는 손도 오른손이었다.
"최태섭 씨, 어제저녁 여덟 시부터 자정 사이에 어디 계셨습니까?"
지후가 책상을 짚으며 묵직하게 물었다.
"여기 있었어요, 여기! 야간 자재 반출 장부 정리하느라 밤새 사무실에 처박혀 있었다고요. 장부 보여줘요?"
최태섭이 서랍에서 볼펜을 꺼내 들었다. 장부를 가리키는 손과 볼펜을 쥐는 손 모두 오른손이었다.
도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오른손잡이다.'
일상적인 동작에서 전혀 왼손을 사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태섭의 체구는 마르고 왜소했다. 김성철처럼 체격이 건장한 사내를 한 손으로 제압하고 문을 뜯어낼 만한 완력으로 보이지 않았다.
"성철이 형이 공구 창고에 숨겨둔 특수 합금 모재 말이죠? 그거 노리고 누가 들어간 거 아닙니까? 형이 그거 부도나기 전에 몰래 빼돌려 뒀거든요. 값이 꽤 나가는 물건인데."
최태섭이 억울하다는 듯 떠들어댔다.
"그 창고에 합금이 있었다는 걸 최태섭 씨 말고 또 누가 압니까?"
지후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야 공장 오래 다닌 놈들은 대충 알죠. 배진만 그 자식도 알 테고…… 아, 그 화물차 기사 놈 말입니다. 그놈도 성철이 형한테 떼인 운송비 달라고 며칠 전부터 험악하게 굴었다고요!"
도윤은 사내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의 손목과 옷차림 그리고 책상 위를 훑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제 현장에서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그 메트로놈 같은 금속성 박자음.
최태섭의 손목에는 낡은 가죽끈의 전자시계가 채워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아무런 기계 장치도 없었다.
도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태섭 씨."
"예? 왜 그럽니까?"
"어제 입으셨던 겉옷과 작업 장갑은 어디 있습니까?"
최태섭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굴렀다.
"그, 그건 왜 묻는데요? 기름이 너무 많이 묻어서 오늘 아침에 세탁소에 맡겼습니다만."
"세탁소요? 고철판 굴리는 양반이 작업복을 세탁소에 맡겨요?"
지후가 헛웃음을 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거 냄새가 슬슬 나는데. 강 경위, 얘 긴급동행 걸어서 털어볼까?"
지후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관할서가 놓친 알리바이의 균열을 찾았다는 흥분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뭐? 왜?"
지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도윤은 최태섭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사내의 눈에는 당혹감과 도벽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사람을 때려죽인 살인자 특유의 잔혹한 침착성은 없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신체적 조건이었다.
"최태섭 씨의 손가락 관절을 보면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 굳은살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전형적인 우수자입니다. 문고리를 부수듯 비틀어 열었던 왼손의 주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 어? 아니, 장갑을 세탁소에 보냈다잖아!"
"숨길 게 있어서 옷을 치운 건 맞겠지만 그게 살인의 증거는 아닙니다. 아마 횡령한 자재 전표를 숨기려 했겠지요."
도윤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최태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건……."
도윤은 더 이상 최태섭을 추궁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가시죠, 박 형사님. 다음 사람을 확인해야 합니다."
야적장을 빠져나온 지후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난 진짜 저 자식인 줄 알았는데. 장갑 숨긴 것까지 딱 맞아떨어지는 줄 알았더니."
"범인은 훨씬 침착하고 신체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도윤은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관자놀이 부근이 욱신거리며 맥박에 맞춰 통증이 밀려왔다. 현장에서 혈흔을 만진 대가였다.
'사망 직전 60초.'
도윤은 눈을 감고 그 감각을 다시 되살렸다.
피해자는 바닥에 쓰러져 목이 졸리면서도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림자.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명확하게 각인된 것이 있었다.
범인은 어둠에 익숙했다.
공장 내부의 스위치를 찾으려 벽을 더듬거리지도 않았고 바닥에 흩어진 고철 파편을 단 한 번도 걷어차지 않았다. 익숙한 동선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서늘한 소리.
딱, 딱, 뚝.
단순한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가 아니었다. 톱니바퀴가 물리며 스프링이 튕겨 나가는 듯한 정밀한 기계음. 끝 음에서만 둔탁하게 멈칫하는 기묘한 3박자.
"다음은 누구입니까?"
도윤이 눈을 뜨며 물었다.
지후가 태블릿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화물차 기사 배진만이야. 마침 공장 근처 기사식당 쪽에 화물차를 대놓고 쉬고 있대. 관할서 쪽에 위치 확인 요청해 뒀어."
"그 사람에 대해 더 파악된 게 있습니까?"
"어, 배진만은 원래 그 공장에서 십 년 넘게 설비 보수 반장으로 일했던 놈이야. 공장이 망하고 나서는 고철 화물차를 몰기 시작했는데 성격이 불같아서 김성철 씨랑 주먹다짐 직전까지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래."
'설비 보수 반장.'
도윤의 눈빛이 번뜩였다.
공장의 모든 기계 구조와 배관 그리고 어두운 통로의 위험 요소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직책.
"그 사람, 어느 손을 씁니까?"
지후가 기록을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운전면허 적성검사 서류에는 양손 다 정상으로 되어 있는데 현장 탐문 기록에 이런 말이 있네. 옛날에 기계에 오른손 손가락 두 개가 끼어서 다친 적이 있대. 그래서 무거운 공구를 다룰 때는 왼손을 주로 쓴다고."
순간 도윤의 등줄기로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왼손잡이. 혹은 오른손 부상으로 인해 왼손의 완력이 극도로 발달한 사람.
공장의 어두운 지리를 눈감고도 걸을 수 있는 설비 반장 출신.
"빨리 가야 합니다. 박 형사님."
"어? 어, 알았어!"
지후가 급하게 핸들을 꺾으며 사이렌을 울렸다.
차량이 거칠게 속도를 올리는 동안 도윤은 가슴속에서 차갑게 요동치는 예감을 붙들었다.
퍼즐 조각들이 서서히 맞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왜 하필 공구 창고였을까.
피해자는 왜 도망치지 않고 그 낡은 문고리를 잡고 버텼을까.
단순히 특수 합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좁고 녹슨 방 안에 숨겨져 있던 다른 무언가를 지키려 했던 것일까.
늦은 밤의 도로 위로 승합차의 전조등이 길게 뻗어 나갔다. 어둠 속에서 진실의 궤적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