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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빌려 주는 왕국2화

그림자를 빌려 주는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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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만료된 계약의 밤

금고 문은 안쪽에서 두드려졌다.

라미는 문양의 중앙에 은색 인장을 댔다. 정상적인 요청이라면 관리인에게 접근 허가를 보내고, 문은 승인 뒤에만 열린다. 인장은 차가웠다. 안쪽의 두드림은 멎지 않았다.

“회수관 라미. 계약 불일치 조사 요청입니다.”

그녀는 정해진 문구를 말했다. 인장에 붉은 선이 하나 더 생겼다. 직무정지 심사가 시작됐다는 뜻이었다. 금고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라미는 낮에 작성한 이의 신청서를 다시 확인했다. 에르반의 납부 기록은 분명했다. 계약은 오늘 자정 만료되며, 남은 원금이 없었다. 하지만 회수 명령에는 연체금이 추가되어 있었다. 숫자의 위치는 바뀌었고, 잉크의 농도는 원본과 달랐다.

“누군가 계약을 고쳤어.”

그림자는 대답 대신 문 아래의 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라미가 무릎을 굽히자 안쪽에서 더 많은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빛이 없는 곳인데도 바닥은 어둡게 출렁였다.

“너도 여기 있었어?”

그림자는 손바닥을 대리석에 눌렀다. 그때 문 뒤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금고 관리인이 문을 열었다.

“회수관은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계약 만료자가 안에 있습니다.”

“계약이 만료되지 않았습니다. 원금과 연체금이 남아 있습니다.”

“납부 기록이 있습니다.”

관리인은 라미의 인장보다 장부를 먼저 확인했다. “본부 전산에는 체납으로 나옵니다. 원본은 계약 감정실에 있습니다.”

“그럼 감정실로 가죠.”

관리인은 문을 닫으려 했다. 라미가 발을 틈에 넣자 그림자가 먼저 문 안으로 스며들었다. 관리인은 그 모습을 보고 한발 물러섰다.

“그림자를 통제하지 못하면 회수관 자격을 잃습니다.”

“그림자는 제 계약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그림자는 등록 대상입니다.”

라미는 그 말에 잠시 멈췄다. 자신의 그림자가 왜 금고 문을 알고 있는지, 왜 다른 그림자들이 그에게 몰려드는지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이 밤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계약 감정실에 접근해 원본 서류를 대조하는 것.

그녀는 관리인을 따라 지하 복도로 내려갔다. 벽의 등불은 간격을 두고 켜져 있었다. 등불이 꺼진 구간을 지날 때마다 라미의 그림자가 몸과 멀어졌다. 반대로 금고 문 가까이에서는 그림자가 발밑에 달라붙었다.

계약 감정실에는 오든이 있었다. 금테 안경을 쓴 중년 남자는 원본 장부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숫자를 비교하고 있었다.

“라미, 이의 신청은 접수됐어요. 그런데 여기 들어올 권한은 없는데.”

“에르반의 계약이 만료됐어요. 명령서의 금액이 조작됐습니다.”

오든은 종이를 들어 빛에 비춰 보았다. “원본 필체와 다르군. 하지만 본부 기록에는 아직 반영되지 않았어.”

“누가 바꿨죠?”

“모르겠소. 이 날짜에는 여러 계약이 한꺼번에 연장됐어. 모두 같은 방식으로.”

그는 서랍에서 얇은 기록표를 꺼냈다. 계약 번호, 담보 그림자의 등록번호, 상환일이 적혀 있었다. 라미는 에르반의 번호를 찾았다. 계약 만료 칸에는 붉은 먹으로 줄이 그어져 있었고, 연체금 항목은 나중에 덧붙인 흔적이 있었다.

“이 서류는 수정된 게 아닙니다.” 오든이 말했다. “원본 두 장이 달라요.”

“한 장은 금고, 한 장은 기록소에 있어야 하잖아요.”

“둘 다 정식 인장이 찍혀 있어. 누군가 인장을 복제했거나, 내부자가 원본을 바꿨겠지.”

라미는 그에게 그림자의 이상 행동을 말하지 않았다. 오든은 법률과 기록에 밝았지만, 누구를 믿어야 할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그때 계약 감정실의 등불 아래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지나갔다. 아이의 크기였다.

“금고 안에 아이가 있습니까?”

오든의 표정이 굳었다. “미성년자의 그림자는 담보로 받지 않아.”

“그럼 저건 누구죠?”

그림자는 감정실의 벽으로 올라가 금고 층을 가리켰다. 라미가 등불을 옮기자 흔적은 사라졌다. 오든은 문을 닫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계약이 끝났는데 돌아오지 않은 그림자들이 있어. 나는 숫자가 맞지 않는다고 여러 번 보고했지만, 본부는 장부를 닫아 버렸소.”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증거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보고한 뒤 내 직책이 사라질까 두려웠소.”

오든은 서랍 가장 깊은 곳에서 낡은 원본 장부 사본을 꺼냈다. 계약이 만료된 그림자들이 모두 다른 번호로 재등록되어 있었다. 새 계약자의 이름은 없고, 담보 그림자의 번호만 이어졌다. 빚이 없는 그림자가 계속 일하고 있었다.

“이건 불법입니다.” 라미가 말했다.

“계약 기간이 지나면 담보를 돌려줘야 해. 그림자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금고에서 나갈 때 인장을 다시 받아야 하니, 누군가 출구 기록을 지웠다면…”

“계약 종료를 확인할 방법이 사라지겠죠.”

오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림자도 전에 등록된 번호가 있어?”

라미는 자신의 인장을 확인했다. 회수관의 인장 아래 아주 작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계약 전에 그림자를 담보로 맡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번호는 금고 장부에만 있는 예전 등록번호와 같았다.

“이 번호를 어디서 찾았죠?”

“내 인장에 있어요. 저는 계약한 적이 없습니다.”

오든은 번호를 장부에 대조했다. 오래된 기록 한 줄이 나타났다. 이름 칸은 비어 있었고, 반환 날짜는 십오 년 전이었다. 그 날짜는 라미가 왕도 고아원에 들어온 날과 같았다.

라미는 장부를 놓지 않았다. 고아원 기록에는 자신이 성문 밖에서 발견됐다고 적혀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비에 젖은 돌바닥과 낯선 손에 대한 감각뿐이었다. 인장번호는 자신보다 먼저 왕실 금고에 등록되어 있었다.

“이 번호가 제 것이라면, 누군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제 그림자를 맡겼다는 뜻인가요?”

“번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결론 내릴 수는 없소. 담보자가 사망하거나 계약을 양도할 때 번호가 바뀌기도 해.”

“그럼 누구 이름으로 등록됐는지 찾아야겠네요.”

“기록소에 신청해야 해. 원본을 공개하려면 법원의 허가가 필요하오.”

라미는 고아원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가 자신에게 없다는 걸 알았다. 회수관이 되기 전의 삶은 장부에 몇 줄뿐이었다. 계약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면 자신이 왜 그림자 흔적을 읽는지도 알 수 있을지 몰랐다.

오든은 그녀의 표정을 읽었지만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등록부를 꺼내 번호가 언제 처음 발급됐는지 확인했다. 표지는 닳았고, 첫 장의 인장은 왕실 문장이 바뀌기 전의 것이었다.

“이 등록부는 금고의 별관에 보관되어 있어. 지금은 출입이 통제된 구역이야.”

“어떻게 들어가죠?”

“정식 허가를 신청하는 게 원칙이오.”

“그 신청이 승인될 때까지 그림자는 계속 갇혀 있겠죠.”

오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등록부의 페이지 번호와 보관함 위치를 종이에 적어 라미에게 건넸다. “나는 이 기록을 본 적이 없소.”

“이건 당신 이름이 아닐 수 있어.” 오든이 말했다. “기록을 확인하기 전까지 단정하지 마.”

“제 그림자가 금고로 가고 있어요. 안쪽에서 누군가 저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오든은 장부를 덮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 네가 누군지 모르는 채로 계약을 다시 쓰게 될 수도 있어.”

“계약서 원본을 가져가겠습니다.”

“그건 불법 반출이야.”

“장부에 증거가 남아 있으면 삭제될 수 있어요.”

오든은 한참 고민하다가 원본 대신 공증 사본을 만들었다. 그는 복사본에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그러면 원본을 훼손하지 않고도 조작을 증명할 수 있었다.

“내가 서명한 건 남는다. 이걸 공개하면 나도 처벌받을 수 있어.”

“그래도 해 주셨네요.”

“진실을 기록하는 일과 용기를 내는 일은 다르오. 난 이제 기록을 했을 뿐이야.”

오든은 공증 사본 두 부에 각각 사건번호와 시각을 찍었다. 한 장은 법원 보관함에 넣고, 다른 한 장은 라미에게 주었다. 그는 사본의 모서리를 접지 말라고 했다. 작은 표시가 훼손되면 원본과 비교할 때 효력을 의심받을 수 있었다.

“이 서류를 가지고 금고 별관에 가면 보관번호를 확인할 수 있어요?”

“공식적으로는 못 들어가. 하지만 보관 목록이 공개되는 시간은 매주 두 번이야. 오늘 밤은 아닐 거다.”

“그럼 오늘 밤 안에 들어갈 방법은요?”

오든은 입을 다물었다. 감정실 문 바깥에서 금속 열쇠가 흔들렸다. 경비가 교대하러 오는 소리였다. 그는 등록부 페이지를 적은 종이를 서류철 안쪽에 넣고, 사건 사본과 분리했다.

“그림자가 금고 안에서 네게 무언가 보여 주려는 거라면, 그 이유부터 확인해야 해. 그림자의 행동이 곧 네 의사라고 생각하면 안 돼.”

라미는 자기 그림자를 떠올렸다. 어릴 적부터 밤길에서 자기 발걸음과 조금 다르게 움직이는 순간이 있었다. 그녀는 피곤해서 그렇게 보인다고 여겼다. 회수관 교육을 받으며 그림자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법을 배웠지만, 자기 그림자만은 가까이 보지 않았다.

“제가 그동안 보지 않았을 수도 있겠네요.”

“그 사실도 기록해 두는 게 좋겠소.”

계약 감정실을 나올 때 복도 등불이 한꺼번에 꺼졌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그림자가 벽을 타고 움직였다. 라미의 그림자는 그녀의 몸 앞에 섰다. 손바닥을 펼쳐 안쪽 문을 가리켰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 라미의 어린 시절 이름을 불렀다.

“라민아.”

그 이름은 지금의 이름과 달랐다. 라미는 자신이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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