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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빌려 주는 왕국3화

그림자를 빌려 주는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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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림자 시장의 길잡이

“라민아.”

이름은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라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름은 라미였고, 그 이름으로 회수관 인장을 받은 지 일곱 해였다. 그런데 낡은 등록부의 번호는 고아원에 들어온 날과 연결되어 있었다.

등불이 다시 켜지자 복도에는 오든과 관리인만 남아 있었다. 수십 개의 그림자도 사라졌다. 그녀의 그림자는 발밑에 붙어 있었지만, 왕궁의 지하 별관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허가 없이 별관에 들어가면 네 직무는 끝날 거야.” 오든이 말했다.

“허가를 기다리면 기록이 사라질 수 있어요.”

“그럼 먼저 누구를 믿을지 정해.”

라미는 그의 공증 사본을 옷 안쪽에 넣었다. “당신은 공식 조사를 신청해 주세요. 저는 금고에 가겠습니다.”

“혼자 가는 건 위험해.”

“그림자가 길을 알고 있어요.”

오든은 그녀를 막지 않았다. 다만 사본의 두 번째 장을 자신이 보관하겠다고 했다. 만약 라미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침에 법원에 제출할 생각이었다.

라미는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문 밖에는 순찰대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림자가 벽의 어두운 부분을 따라 움직이며 감시가 닿지 않는 길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회수 장부의 여백에 방향과 시각을 적었다. 기록을 남기면 누군가 그녀를 추적할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명할 수 없었다.

계단은 야시장 아래의 오래된 수로로 이어졌다. 이곳은 공식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았다. 천장에는 그림자 담보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 남긴 은색 번호가 줄지어 새겨져 있었다. 일부 번호 옆에는 만료일이 적혔고, 다른 번호는 지워져 있었다.

수로 끝에는 검은 천으로 가린 작은 시장이 열려 있었다. 사람들은 등불 대신 낮은 반사판을 사용했다. 그림자가 없는 상인들이 약초와 도구, 오래된 계약서 사본을 팔았다. 누구도 자기 이름을 크게 부르지 않았다.

시장 입구에는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의 통행표가 쌓여 있었다. 통행표마다 계약 번호와 만료일이 적혀 있었지만, 이름 칸은 비어 있었다. 길을 지나려면 다른 사람의 그림자와 함께 있어야 했고, 그림자를 가진 안내자는 대가로 동전이나 물자를 받았다.

“오늘 밤은 세 번이나 검문이 있었어.” 약초 상인이 말했다. “어떤 회수관이 계약 종료 확인서를 요구했다더군.”

“누가 요구했죠?” 라미가 물었다.

“젊은 여성이었다고 들었지. 자기 그림자를 잃어버렸다나.”

라미는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이곳에서는 회수관이 보이면 거래를 중단하고 사람들이 흩어질 수 있었다. 그녀는 그림자를 잃은 사람들이 어떻게 밤을 지나는지 관찰했다. 한 노인은 아이의 그림자 뒤에 붙어 걸었고, 다른 상인은 반사판을 옮겨 임시로 자기 발밑에 어두운 선을 만들었다. 그 선은 몸이 움직일 때마다 끊어졌다.

“그림자는 담보로 맡기면 밤에만 불편한 겁니까?”

“밤에 자기 길을 못 고르지.” 약초 상인이 대답했다. “낮에는 해가 몸을 따라오니 괜찮지만, 밤에는 다른 사람의 빛을 빌려야 해. 그림자가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 집도 있고.”

상인은 작은 동전 하나를 반사판 위에 올렸다. “이건 은이 아니라 그림자 동전이야. 빛을 받으면 앞면이 보이고, 어둠에 놓으면 뒷면이 나타나. 빚을 갚을 때 어느 면을 내느냐에 따라 이자가 달라져.”

라미는 동전을 만지지 않았다. 계약에 물건으로 기록되지 않는 대가를 붙이는 방식은 법정에서 다툼의 여지가 있었다. 어둠 속 면이 더 가치 있다면, 그림자를 맡긴 사람은 처음부터 정확한 값을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거래는 누가 관리하죠?”

“아무도. 왕궁 금고가 우리 그림자를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골목에서 서로를 지키는 건 우리가 해.”

시장의 사람들은 이름 대신 물건의 모양과 약속으로 서로를 불렀다. ‘검은 약초를 파는 사람’, ‘세 번 두드리는 문을 지키는 사람’. 라미는 이름을 잃어도 관계와 기억이 남을 수 있다는 걸 보았다. 동시에 그 기억이 법적 증거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당신은 회수관이죠.” 자주색 두건을 쓴 여자가 말했다.

“나리 씨?”

“장부에서 내 이름을 봤나 보네. 계약은 끝났지만 그림자는 아직 금고에 있어.”

“그림자를 되찾고 싶습니까?”

“아이와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그림자를 데려오면 검문소에 걸려. 계약이 끝났다는 걸 증명할 종이가 없거든.”

나리는 라미를 시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발밑에는 짧은 그림자만 남아 있었다. 담보 계약 때문에 밤길을 혼자 걷지 못한다고 했다. 시장의 사람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빌려 길을 확인했다. 그림자를 가진 사람이 앞에 서고, 그림자 없는 사람들은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금고는 여기서 멀지 않아.” 나리가 말했다. “하지만 정문으로는 못 들어가. 만료된 그림자들은 별관의 수로를 통해 안으로 옮겨져.”

“어떻게 알아요?”

“내 그림자를 가져간 뒤에도 반 년 동안 금고에서 일했어. 계약서에는 조사 기간이라고 적혀 있었지. 사실상 공짜 노동이었어.”

라미는 그녀를 의심했다. “계약이 끝난 뒤에도 일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나리는 작은 금속표를 꺼냈다. 담보 그림자 번호와 작업 구역이 새겨져 있었다. 표의 뒷면에는 출입 날짜가 매일 기록돼 있었다.

“이걸 누구에게 보여 줬죠?”

“오든에게. 그는 확인해 주겠다고 했지만, 기록소에 제출한 적은 없어.”

라미는 오든을 떠올렸다. 그가 거짓말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이 누군가를 계속 금고에 묶어 두고 있었다.

“내가 금고에 들어가면 이 표를 공식 증거로 접수하겠습니다.”

“돌려받는다고 약속하지 마. 난 그림자 없이 살아온 시간이 길어. 갑자기 되찾아도 예전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그럼 무엇을 원하세요?”

“내가 직접 선택할 권리. 돌려받을지, 다른 곳으로 갈지.”

나리는 시장 구석의 낡은 배수문을 열었다. 좁은 물길은 왕궁 별관의 기초 아래로 이어졌다. 문에는 왕실 인장이 찍혀 있었지만, 나리가 가진 금속표의 번호와 같은 기호가 긁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네가 혼자 가야 해. 내 번호가 기록되면 아이도 추적당할 거야.”

라미는 그녀에게 회수 장부의 사본을 건넸다.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 기록을 오든에게 전달해 주세요.”

“왜 나를 믿지?”

“아직 믿는 게 아니에요.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을 나누는 겁니다.”

나리는 사본을 받아 옷 안에 넣었다. “회수관답네.”

“나리 씨의 계약 번호를 알려 주면 종료 기록을 대조할 수 있어요.”

“번호를 말하는 순간 왕궁이 내 위치를 알게 돼. 전에 한 번 시도했어. 회수관 사무소에서 번호를 조회한 다음 날, 내 아이가 다니던 학교에 사람이 찾아왔지.”

라미는 질문을 거두었다. “그럼 번호는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증거 없이 어떻게 내 그림자를 찾아?”

“당신이 원하지 않는 정보는 수집하지 않겠어요. 금고에서 그림자들이 계속 일하는 모습을 확인하면, 그 자체로 조사를 시작할 수 있어요.”

나리는 그녀를 오래 바라봤다. “회수관들이 늘 그렇게 말해. 절차를 지키고 있다고.”

“저는 장부에 남기는 걸 약속할 수 있어요. 결과까지 약속할 수는 없어요.”

“그게 적어도 솔직하네.”

나리는 통로 문을 열기 전에 작은 유리 조각을 건넸다. 반사판처럼 보였지만 뒷면에는 자물쇠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래에서 네 그림자가 길을 잃으면 이걸 보여 줘. 금고 안의 그림자들은 빛보다 약속에 먼저 반응해.”

라미는 유리 조각을 받아 들었다. “왜 도와주는 거죠?”

“내 그림자를 되찾고 싶다고 했잖아. 네가 그 권리를 인정하면, 나도 네가 돌아올 길을 남겨 주는 거야.”

나리는 수로의 벽에 손을 대고 숨은 경첩을 찾았다. 돌문은 위로 열리지 않고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아래 물은 무릎까지 차올랐다. 금고 쪽에서 끌고 가는 듯한 힘이 있어, 혼자 들어가면 수로의 흐름에 떠밀릴 수 있었다.

“여기서부턴 벽을 잡고 가. 물이 허리까지 오르면 돌아와.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수 있어.”

“들어간 사람도 못 나온 적이 있나요?”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들어가면, 나올 때 그림자까지 없어지기도 해.”

라미는 물길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그림자가 먼저 어둠 속으로 미끄러졌다. 나리는 통로의 문을 잡아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크게 부르지 않고, 손등을 두 번 두드려 신호를 정했다.

라미는 수로로 들어갔다. 그림자가 앞서 물길을 따라갔다. 별관 아래에는 철창문이 있었고, 그 너머에서 수많은 발걸음이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몸이 없는 발걸음이었다.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자 넓은 방에 그림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광석 상자를 나르고, 문서함을 옮기고, 밤마다 왕궁의 등불을 닦았다. 누구의 몸에도 연결되지 않은 채 움직였다.

라미의 그림자가 철창 안쪽으로 뻗어 나갔다. 무리 속의 한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라미와 같은 자세로 서 있었지만 얼굴이 달랐다. 그림자는 손바닥에 이름 하나를 새겨 보였다.

‘라민.’

라미는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림자의 손바닥에는 어린아이 크기의 손자국도 찍혀 있었다. 그녀는 자기 그림자에게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수로 입구에서 나리와 정한 신호였다.

그림자는 라미를 돌아보고 같은 횟수로 바닥을 쳤다. 아직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뜻이었다. 라미는 유리 조각을 철창에 대어 보았다. 자물쇠 모양이 잠깐 밝아졌다가 꺼졌다.

철창 뒤에서 경비가 돌아섰다. 그가 라미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경보 줄을 당겼다.

수로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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