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빌려 주는 왕국

1화: 몸보다 먼저 도망친 그림자
라미의 그림자가 먼저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로등 아래, 벽돌길 위에 길게 늘어진 검은 형체만 스스로 일어섰다. 그림자는 라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세 걸음 앞서더니 오른쪽 골목으로 꺾였다.
“잠깐.”
라미는 손에 든 계약 회수 장부를 놓치지 않은 채 그림자를 따라갔다. 밤 열한 시가 넘은 왕도에서는 그림자가 주인의 뜻 없이 움직이는 일이 중죄였다. 야간 통행 허가가 없는 시민이라면 그림자 단독 이탈만으로도 금고에 끌려갈 수 있었다.
그녀 자신이 채무 회수관이었다. 규칙을 모를 리 없었다.
“돌아와.”
그림자는 멈추지 않았다. 허름한 빵집 문 앞에 도착하자 손을 뻗듯 벽을 짚고 안으로 사라졌다. 라미는 가로등 빛 아래 몸을 세웠다. 그녀의 발밑에 그림자는 없었다.
“인장 확인.”
순찰대가 골목 입구를 막았다. 라미는 은색 계약 인장을 내보였다. 회수관의 허가증을 확인한 대원이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림자가 없는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도주한 채무자를 추적 중입니다.”
“회수 대상이 누구입니까?”
라미는 장부를 펼쳤다. 이번 회수 대상은 에르반이라는 빵집 주인이었다. 세 달 전 치료비를 빌리고 그림자를 담보로 맡겼다. 계약 기간은 오늘 자정에 끝나지만, 원금이 남아 있어 그림자의 노동을 하루 더 연장할 수 있다는 조항이 붙어 있었다.
“그림자가 먼저 도망쳤다면 계약 위반이겠군요.”
“그림자는 계약 당사자가 아닙니다. 소유자는 빵집 주인입니다.”
“그럼 주인을 찾으십시오. 거리에서 그림자를 쫓아다니다간 허가가 취소됩니다.”
라미는 골목의 빵집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불빛이 움직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에르반은 집 안에 없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온 빵 냄새는 따뜻했지만, 오븐 불은 꺼져 있었다.
그림자는 가게 뒤편으로 돌아갔다. 라미는 순찰대의 시선을 피하려고 빵집 옆의 좁은 통로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발밑의 흔적이 잠깐 사라졌다가 하수구 덮개 위에 나타났다. 그림자는 덮개 틈으로 손가락을 넣고 두 번 두드렸다.
“지하 통로를 알고 있어?”
라미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림자는 소유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담보물로 등록되어 있었다. 주인이 손을 들면 그림자도 손을 들고, 주인이 멈추면 그림자도 멈춰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라미의 몸과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계약 장부에는 이런 상태를 설명하는 조항이 없었다.
하수구 덮개를 열자 안쪽 벽에 은색 계약번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숫자 중 하나는 에르반의 번호였다. 그 아래에는 만료 표시가 찍혀 있었지만, 최근 누군가 그 위에 새 인장을 덧그렸다. 라미는 장부와 번호를 대조해 흔적을 기록했다.
뒤에서 순찰대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덮개를 덮고 다시 빵집 문으로 돌아왔다. 문손잡이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안쪽 잠금쇠 주변에는 새 긁힘이 있었다. 문이 안에서 잠긴 게 아니라, 누군가 밖에서 급히 잠근 흔적이었다.
“회수관님, 혼자 움직이면 안 됩니다.” 대원이 말했다.
“계약 이행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대상자가 도망쳤다면 회수 명령을 집행해야죠.”
“대상자가 계약 만료를 주장하면 확인해야 합니다. 절차는 귀하도 알고 있을 텐데요.”
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는 부츠 아래에서 라미 쪽으로 한 뼘 더 뻗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라미는 문 앞에 쪼그려 앉아 바닥의 그림자 흔적을 살폈다. 그림자가 지나간 곳마다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끊겨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벽돌 사이를 훑었다. 어두운 자국은 골목 깊숙한 곳이 아니라 길 건너 왕궁 방향으로 이어졌다.
“이게 네 흔적이야?”
그림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빵집 안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라미가 문을 열자 잠금쇠가 안에서 풀려 있었다. 안쪽에는 빵집 주인 에르반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흐릿한 그림자 테두리만 남아 있었다.
“의식 있어요?”
에르반이 눈을 떴다. “그림자가… 금고로 갔어.”
“자정 전에 계약을 연장하겠다고 하셨습니까?”
“아니. 오늘 끝났어. 원금도 갚았어.”
라미는 장부의 납부 기록을 확인했다. 두 달 전에 마지막 상환이 완료되어 있었다. 만료 날짜는 오늘 자정이었다. 그런데 회수 명령서에는 빚이 남아 있다고 적혀 있었다.
“서류에 오류가 있네요.”
“오류가 아니야. 누가 날짜를 바꿨어. 내 그림자는 십 년 동안 일했어. 더는 빼앗길 수 없어.”
“계약 감정사를 불러 확인하겠습니다.”
“그동안 금고는 그림자를 돌려주지 않아.”
라미는 에르반의 손에 물잔을 쥐여 주었다. 그가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회수 대상은 도망자가 아니었다. 서류가 바뀌어 그를 다시 채무자로 만들었다.
“그림자는 왜 왕궁으로 간 거죠?”
“이름을 찾으러.”
“그림자에 이름이 있어요?”
에르반은 고개를 저었다. “내 그림자는 오래전에 자기 이름을 잊었어. 그런데 오늘, 금고에서 누군가 이름을 불렀대.”
라미는 장부를 펼쳐 납부 기록과 그림자 등록번호를 다시 비교했다. 마지막 상환은 계약 만료 열흘 전 완료되었다. 거래소의 도장이 있었고, 현금 수령자의 서명도 남아 있었다. 연체금은 만료 당일 아침에 갑자기 생겼다.
“누가 이 서류를 가져왔습니까?”
“회수 명령을 내린 사람은 얼굴을 가렸어. 하지만 계약번호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
“다른 회수관이었을 가능성은요?”
“그 사람 그림자가 없었어.”
라미는 기록에 그 말을 적었다. 그림자를 담보로 맡긴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되찾으러 와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금고 직원이나 계약자일 수 있었다.
“그때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죠?”
“내 그림자가 없어졌는데 누가 내 말을 믿겠어? 열 해 동안 일한 그림자를 도둑맞았다고 하면, 계약 위반으로 내 빚만 늘어날 거야.”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에르반은 그녀의 은색 인장을 바라봤다. “회수관도 계약서에 서명했잖아. 네가 우리 편이라고 어떻게 믿지?”
라미는 자신의 장부에 이의 신청을 적었다. “믿지 않아도 됩니다.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기겠습니다.”
라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그림자가 다시 골목 끝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가로등 아래서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림자의 머리가 왕궁을 향해 돌아갔다.
순찰대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라미는 회수 장부를 덮고 공식 조사 요청서를 작성했다. 그녀가 허가 없이 금고에 접근하면 직무정지를 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약 만료가 확인된 사람을 다시 빚쟁이로 취급할 수도 없었다.
“제가 확인할 동안 에르반 씨를 보호해 주세요.”
“회수관이 피회수자를 보호한다고?” 대원이 물었다.
“계약이 끝났다면 그는 더는 피회수자가 아니니까요.”
라미는 장부에 이의를 적고 서명했다. 인장에 붉은 선이 켜졌다. 공식 기록에 이의를 제기한 회수관은 조사 대상이 되었다.
인장의 열기가 손바닥에 남았다. 라미는 회수관 사무소로 돌아가면 자격을 정지당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에르반의 납부 영수증을 두 장 복사해 하나는 그에게 건넸다. 원본은 자신이 보관하고, 사본에는 순찰대원의 입회 서명을 받았다.
“이 문서를 잃어버리면 계약이 끝났다는 사실을 다시 증명할 수 있어요.”
에르반은 종이를 받아 앞치마 안에 넣었다. “당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 기록은 사무소에도 들어갑니다. 제가 사라져도 조사 흔적은 남아요.”
“사무소가 당신 편이 아니라면요?”
라미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기록을 본 사람이 누구인지 또 적겠습니다.”
그녀는 공식 호출판에 계약 감정실 검토를 요청했다. 판에는 회수관의 이름과 사건 번호가 공개로 새겨졌다. 절차를 밟을수록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누가 무엇을 했는지 지우기도 어려워졌다.
거리의 순찰대는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진 걸 보고 길을 막지 않았다. 대신 야간 통행증을 확인했다. “그림자 없이 걷는 건 위험합니다. 금고에 갈 생각이라면 다른 회수관을 부르세요.”
“다른 회수관은 이 사건에 배정되지 않았어요.”
“그럼 움직이지 마십시오.”
라미는 통행증을 보여 줬다. “계약자의 안전을 확인하는 건 제 권한입니다. 이의 신청도 접수했습니다.”
대원은 통행증과 인장의 붉은 선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길을 막지 않았지만, 뒤따라가겠다고 했다. 라미는 거부하지 않았다. 공개된 추적자라면 오히려 목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왕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는 그보다 앞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라미가 손을 내밀자 그림자가 그 손 아래에 겹쳤다. 하지만 발끝은 계속 왕궁을 가리켰다.
금고 문 앞에 도착하자 그림자가 바닥의 대리석 틈을 두드렸다. 그 틈 아래에서 수십 개의 그림자가 동시에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문 위에 새겨진 왕실 문장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라미의 그림자가 그 문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라미는 손을 뻗었지만 그림자는 대리석 안으로 스며들지 않았다. 문틈에서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오래된 종이 냄새가 새어 나왔다. 왕실 경비가 계단 위에서 접근하는 동안, 라미는 인장과 장부를 들어 보였다. 오늘의 이의 신청은 공개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문을 억지로 열지 않고, 누가 열쇠를 가져오는지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