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으로 간 천재 외과의사

8화: 장막 너머의 손길
동궁전을 나서는 발걸음은 잴 새도 없이 빨라졌다.
세자의 안질을 치료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잠시였다. 중궁전 상궁의 파리하게 질린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는 궁궐 전체를 차가운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다.
"산후의 피가 멎지 아니하고 열이 불덩이 같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시옵니다……."
세종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중전이 사경을 헤맨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의들은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세종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중궁전으로 내달렸다. 세자 또한 아픈 몸을 추스르며 뒤를 따랐다.
이진은 발목의 통증을 누르며 복이를 돌아보았다.
"복아. 동궁에 두었던 놋대야와 소금 단지를 챙겨라. 삶아둔 새 무명천과 끓여 식힌 물도 넉넉히 가져와야 한다."
"예, 나으리! 곧장 뒤따르겠사옵니다!"
복이가 뛰어가자 이진도 숨을 몰아쉬며 중궁전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후 출혈과 고열이라니. 급성 산욕 패혈증이거나 자궁 이완성 대량 출혈일 가능성이 높다. 항생제도 수혈도 없는 이 시대에서는 분초를 다투는 응급 질환이다.'
중궁전 마당에 당도하자 서늘한 바람 대신 시큼하고 비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침전 앞에는 내의원 의관들과 나인들이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침전 문밖에는 붉은 명주실 한 가닥이 문틈을 통해 길게 빠져나와 있었다. 늙은 수석 어의가 기둥 뒤에 엎드려 명주실을 매만지며 식은땀을 흘렸다. 실을 통해 맥을 짚는 사진(絲診)이었다.
"어찌 되었느냐! 중전의 상태가 어떠하냐!"
세종의 호통에 어의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전하,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의 맥이 가늘어 곧 끊어질 듯 위태롭사옵니다. 궐음경이 닫혀 궁귀탕을 올리려 하였으나 삼키지 못하시옵니다……."
"탕약도 못 삼키는데 실 따위나 만지작거리고 있단 말이냐! 당장 들어가 직접 옥체를 살피지 않고!"
세종이 분노하자 정 의원이 사색이 되어 가로막았다.
"전하! 중전마마의 침전은 내명부의 지엄한 구역이옵니다. 남성 의관이 어찌 감히 국모의 침상에 다가가 손을 댈 수 있겠사옵니까! 내외의 법도를 어기면 왕실의 위의가 무너지옵니다!"
"법도? 국모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법도가 사람의 숨보다 귀하단 말이냐!"
세종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던 그 순간 이진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잠시 멈추어 주십시오."
이진의 서늘한 목소리가 마당을 갈랐다. 정 의원이 이진을 노려보았다.
"진성군!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드시오? 서자의 신분으로 내외법을 어기고 안으로 들겠다는 속셈이오?"
이진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제가 침상으로 다가가지 않겠습니다. 옥체에 직접 손을 대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종이 멈칫하며 이진을 돌아보았다.
"직접 손을 대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
"침전 가운데에 명주 발을 치고 저는 장막 너머에 머물겠습니다. 옥체를 살피고 처치하는 일은 중궁전의 의녀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제가 밖에서 병증을 읽고 소리로서 그 손을 움직이게 할 터이니 안으로 들게 해 주십시오."
세종은 지체 없이 결단을 내렸다.
"허락한다! 진성군을 침전 장막 너머로 들이라! 방 안의 의녀들은 오직 진성군의 명만을 받들라!"
정 의원의 만류를 뒤로한 채 이진은 침전문으로 향했다.
침전 안은 발바닥이 델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모든 문창호는 틈새 하나 없이 닫혔고 화로에서는 쑥과 유황이 타들어가며 매캐한 연기를 토해냈다.
그 열기 한가운데에 소헌왕후가 누워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으나 두 뺨만 붉게 달아올라 밭은숨을 몰아쉬었다. 이불 밑으로는 흑갈색 피가 배어 나와 요를 적시고 있었다.
이진은 명주 발 뒤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집중했다.
[스캔 대상: 소헌왕후 심씨 (30대)]
[주요 진단: 중증 산욕열(급성 자궁내막염) 및 산후 이완성 출혈.]
[상태 분석: 분만 후 자궁 퇴축 부전. 자궁 저부 이완으로 인한 지속적 정맥총 출혈. 거대 혈종 및 부패한 잔류 오로 정체 확인.]
[체온: 39.8도. 빈맥 138회/분. 혈압 급강하.]
[환경 위험도 극상: 밀폐 고온실로 인한 급성 탈수. 불결한 재와 쑥 도포로 인한 세균 감염 폭증.]
이진의 눈이 차가워졌다. 산후풍을 막는다며 방을 가마솥처럼 덥혀 산모를 탈수로 몰아넣고 불결한 재를 쑤셔 넣어 감염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중궁전 수석 의녀는 듣거라!"
침상 곁에서 떨고 있던 의녀 월선이 깜짝 놀라 발 쪽을 보았다.
"예, 대군마마!"
"지금 당장 화로를 치워라. 창문을 주먹 하나 크기로 열어 바람길을 내고 옥체를 덮은 두꺼운 솜이불을 얇은 모시천으로 바꾸어라!"
월선이 경악했다.
"마마, 산모에게 찬바람이 들면 산후풍으로 목숨을 잃사옵니다!"
"목숨을 잃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펄펄 끓는 열 때문입니다! 지금 옥체는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피가 마르고 있습니다. 환자가 숨을 쉬어야 피도 멎습니다. 지체 없이 따르십시오!"
서릿발 같은 호통에 월선은 화로를 치우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들이치자 소헌왕후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복이가 놋대야와 삶은 무명천, 소주병을 들고 들어왔다.
"월선 의녀와 침전의 의녀들은 모두 대야 앞으로 가라. 복이가 하는 대로 소주와 끓인 물로 손톱 밑까지 깨끗이 씻어내라. 손을 씻지 않은 자는 옥체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의녀들은 복이의 손놀림을 보며 손을 씻었다.
이진은 장막 너머의 월선을 응시했다.
"월선 의녀, 내 말을 그대로 행하라. 손끝의 감각에 집중해야 한다."
"예……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옥체의 아랫배를 드러내라. 배꼽에서 손가락 세 개 너비 아래를 가만히 짚어 보아라. 손끝에 무엇이 만져지느냐?"
월선이 소헌왕후의 하복부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물렁물렁하옵니다. 단단하게 뭉친 것은 없고 물을 담은 가죽 주머니처럼 꺼져 들어갑니다."
"그것이 피가 멈추지 않는 원인이다."
이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기를 낳고 나면 자궁은 단단한 주먹처럼 굳어져야 한다. 그래야 혈관이 닫혀 피가 멎는다. 지금 마마의 늘어진 자궁 속에는 썩은 피와 고름이 갇혀 있다. 그것을 짜내야 출혈과 고열을 잡을 수 있다."
"피를…… 짜낸단 말씀이옵니까?"
"오른손 주먹을 쥐고 아랫배 가장 아래쪽 치골 바로 위를 손바닥으로 받쳐라. 방광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월선이 하복부 밑동을 단단히 고정했다.
"이제 왼손 손바닥을 펴서 배꼽 아래 물렁한 자궁 윗부분을 덮어라. 그 부위를 둥글게 원을 그리듯 힘껏 쥐어짜며 아래로 밀어내라! 단단한 멍울이 잡힐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눌러야 한다!"
월선은 눈을 질끈 감고 체중을 실어 소헌왕후의 아랫배를 강하게 압박했다.
"으…… 으아아악!"
혼절해 있던 소헌왕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왈칵하는 소리와 함께 썩은 냄새를 풍기는 거대한 검붉은 핏덩이와 오로가 쏟아져 나왔다.
"피가…… 썩은 피가 쏟아져 나오옵니다!"
"멈추지 마라! 손바닥을 떼지 말고 원을 그리며 계속 문질러라!"
이진의 외침에 월선은 멈추지 않고 아랫배를 마사지했다.
잠시 후 쏟아지던 피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월선의 손바닥 아래에서 물렁거리던 하복부가 단단한 차돌처럼 뭉쳐 솟아올랐다.
"마마! 배 안쪽에서 단단한 덩어리가 만져지옵니다!"
[자궁 저부 수축 성공.]
[활동성 대량 출혈 급감.]
[위험 징후: 긴급 단계에서 관찰 단계로 하향.]
이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궁 수축이 유도되었고 고여 있던 잔류 혈종이 빠져나왔다.
"월선 의녀, 이제 손을 떼도 좋다."
이진은 다음 단계를 지시했다.
"끓여 식힌 따뜻한 소금물로 환부 주변의 핏자국과 재를 깨끗이 닦아내라. 쑥이나 재는 남김없이 없애야 한다."
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따뜻한 염수로 닦아내자 악취가 사라졌다. 삶아 말린 새 무명천을 여러 겹 덧대어 고정했다.
"복아, 꿀과 소금을 아주 옅게 탄 미음을 주어라. 월선 의녀는 그 미음으로 마마의 입술을 적시고 조금씩 넘겨 드려라. 피를 쏟아 몸이 말랐으니 수분을 채워야 맥이 돌아온다."
월선이 미음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미음이 목젖을 타고 넘어가기 시작했다.
반 시진이 흘렀을 무렵 소헌왕후의 호흡이 고르게 바뀌었다. 이마의 열감도 맑은 땀과 함께 식어 내렸다.
[체온: 38.2도로 하강.]
[의식 수준: 명료 회복.]
마침내 소헌왕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전하…… 세자……."
"마마께서 눈을 뜨셨사옵니다!"
의녀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세종과 세자가 뛰어 들어왔다.
"중전! 정신이 드는가!"
세종이 소헌왕후의 손을 부여잡았다. 창백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전하…… 제가 깊은 어둠 속에 빠졌다가 살아 돌아왔사옵니다……."
세종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자 역시 어머니의 손을 쥐며 감격했다.
소헌왕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뒤 명주 발 너머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장막 너머에 있는 자는 누구이옵니까?"
월선이 아뢰었다.
"진성군마마이시옵니다. 대군마마께서 장막 너머에서 소리로서 신첩들의 손을 이끄시어 마마의 목숨을 구하셨사옵니다!"
소헌왕후의 눈빛에 떨림이 일었다.
"진이…… 네가 세자의 눈을 밝히더니 이제는 이 어미의 목숨마저 건져 주었구나."
이진은 발 너머에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소자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했을 뿐이옵니다. 마마께서 버텨주신 덕분이옵니다."
소헌왕후는 떨리는 손을 뻗어 장막 쪽을 향했다.
"내 결코 너의 은혜를 잊지 않으마. 너는 왕실의 은인이자 내 소중한 아들이다."
세종이 몸을 일으켜 이진을 바라보았다. 왕의 눈에는 무한한 신뢰가 차 있었다.
"진아. 네가 오늘 행한 의술은 단순한 재주가 아니다. 법도를 지키면서도 목숨을 살려낸 참된 지혜다."
세종은 문밖에서 넋을 잃은 정 의원을 꾸짖었다.
"보았느냐! 손 하나 대지 않고도 사람을 살려냈다. 허울 좋은 법도 뒤에 숨어 환자를 죽음으로 몰던 너희가 부끄럽지도 않으냐!"
정 의원은 바닥에 엎드려 떨 뿐 대답하지 못했다.
이진은 손을 씻는 의녀 월선과 복이를 바라보았다.
장막 너머의 원격 지휘로 국모를 구했으나 이것은 임시방편이었다. 내외법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수많은 여인들이 치료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 여인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제대로 훈련받은 여성 의원들뿐이었다.
'의녀들을 가르쳐야 한다. 손을 씻는 법부터 시작하여 사람의 몸을 제대로 아는 의사로 길러내야 한다.'
이진의 가슴속에서 조선의 의학을 바꿀 새로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