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잔 점소이의 무공 훔쳐보기

3화: 흉내 낸 대가
하북 관도를 집어삼킬 듯 쏟아붓던 폭우는 새벽이 깊어지며 점차 가늘어졌다.
거친 비바람이 물러간 자리에는 눅눅한 흙냄새와 새벽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청연객잔 처마 끝에서 굵은 빗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며 무거운 소리를 냈다.
객잔 1층 홀은 폭풍이 쓸고 간 것처럼 참혹한 꼴이었다.
경첩이 통째로 뜯겨 나간 정문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깨진 술독에서 흘러나온 시큼한 탁주 냄새가 빗물과 뒤엉켜 코를 찔렀다. 널브러진 탁자 조각과 톱밥이 발밑에서 질척거렸다.
쿵! 쿵!
카운터 앞에서는 장백수가 굵은 쇠못을 문틀에 대고 무쇠 망치로 연거푸 내려치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망치를 내리찍는 손아귀 힘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부서진 판자문 대신 거친 가마니와 창고에서 꺼내 온 덧널판자를 덧대어 찬바람을 막는 중이었다.
"조 형님인지 뭔지 하는 그 흉측한 도적 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람. 문짝 값은 누구한테 받아내야 해?"
서하린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투덜거리며 깨진 사기잔과 술병 조각들을 쓸어 담았다.
삼베 치마폭은 온통 흙탕물로 젖어 있었지만 손놀림은 억척스러웠다. 잔뜩 부풀어 오른 뺨에는 분통과 피로가 짙게 묻어났다.
"하린아, 투덜댈 힘이 있으면 바닥에 쏟아진 술기름이나 먼저 닦아내라. 손님이라도 들면 미끄러져 코 깨질라."
"이 새벽에 올 손님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다리 끊겼다는 소문이 파다할 텐데."
하린이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마른걸레를 집어 들었다.
그 소란 속에서 연적은 홀 구석 평상에 힘없이 기대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그저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연적의 온몸은 마치 굵은 몽둥이로 난타당한 것처럼 쑤셔왔다.
'손가락이 안 쥐어져.'
연적이 떨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엄지와 중지를 굽히려고 힘을 주는 순간 손목 안쪽의 힘줄이 타는 듯한 통증을 뿜어냈다. 어젯밤 하린이 발라준 백초유의 서늘한 기운이 살갗에 남아 있었으나 뼛속 깊은 곳에서 욱신거리는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노인의 세 번 두드림.
그리고 놋쟁반을 비스듬히 세워 흉악한 오환도의 칼날을 흘려보냈던 그 찰나의 동작.
눈앞에 보였던 푸른 궤적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인데 그 대가는 혹독했다. 어깨죽지부터 팔꿈치, 손목으로 이어지는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 맥박이 뛸 때마다 찌릿한 경련이 일었다.
스스로 걸어서 평상에 앉은 것조차 기적에 가까웠다.
'내가 식구들을 지켰어. 하지만…… 몸이 부서질 것 같아.'
연적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식구들이 부서진 객잔을 수습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데 혼자 구석에 앉아 쉴 수는 없었다. 점소이란 손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녀야 밥값을 하는 법이었다.
연적은 왼손으로 옆에 놓여 있던 대나무 빗자루를 쥐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러나 발을 떼려는 순간 오른쪽 허벅지 안쪽 근육이 심하게 뒤틀렸다.
"윽……!"
다리에 힘이 풀리며 손에 쥐었던 빗자루가 바닥으로 요란하게 굴러떨어졌다.
탁!
요란한 소리에 하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바닥을 짚으며 주저앉으려는 연적을 발견한 하린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연적아!"
하린이 들고 있던 걸레를 팽개치고 달려왔다.
그녀는 연적의 겨드랑이를 부축해 평상 위로 도로 앉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미쳤니?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팔다리가 굳어서 숟가락도 못 쥐는 놈이 어딜 기어 나오려고 그래!"
"아이고 누님.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귀 떨어지겠어요."
"귀 떨어지는 게 대수야? 뼈마디가 상해서 평생 불구가 되면 어쩌려고 이래!"
하린이 씩씩거리며 연적의 오른팔 소매를 걷어 올렸다.
단단하게 부어오른 손목과 푸르스름하게 멍이 든 팔뚝이 드러났다. 살갗을 살짝 누르기만 해도 연적의 입에서 저절로 바람 빠지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거 봐라, 이 바보야. 부어오른 것 좀 봐. 뼈라도 다쳤으면 네 밥벌이는 누가 대신해 주는데?"
하린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걱정이 앞서 쏘아붙이는 그 투박한 말투 속에 담긴 온기를 알기에 연적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안 나섰으면 누님이 칼에 맞을 뻔했잖아요. 문짝은 부서졌어도 식구들 무사한 게 어디예요."
"너 말대꾸할 힘은 남아 있나 보네? 아주 입만 살아가지고……."
하린이 연적의 이마를 쥐어박으려던 참이었다.
쿵.
장백수가 들고 있던 무쇠 망치를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못질을 마친 장백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절뚝이는 걸음으로 평상 쪽을 향해 다가왔다.
희끗희끗한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노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카운터에서 늘 헐렁한 눈으로 주판이나 튕기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린아, 주방에 가서 끓인 물 한 대접 가져오너라."
장백수의 나직한 목소리에 하린이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장부님?"
"가서 물이나 떠와. 잔소리는 나중에 하고."
장백수의 단호한 기색에 하린은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부님. 연적아, 너 꼼짝 말고 있어."
하린이 주방 안쪽으로 사라지자 홀 안에는 장백수와 연적 둘만이 남았다.
새벽바람이 임시로 덧댄 가마니 틈을 흔들며 서늘하게 불어 들었다.
장백수는 연적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노인은 품속에서 낡고 거친 마포 붕대 한 타래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팔 내밀어 봐라."
"예……."
연적이 조심스럽게 부어오른 오른팔을 내밀었다.
장백수의 거칠고 메마른 손이 연적의 손목 안쪽을 덥석 움켜쥐었다.
꾸욱.
"크윽!"
장백수가 엄지손가락으로 손목 안쪽 맥문(脈門)을 강하게 누르는 순간 연적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팔꿈치부터 어깨를 거쳐 쇄골 아래까지 찌르는 듯한 격통이 번져나갔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솟구쳐 턱 끝으로 뚝뚝 떨어졌다.
장백수는 연적의 고통 어린 신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노인의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연적의 뼈마디와 뒤틀린 힘줄을 능숙하게 짚어나갔다. 그 메마른 손길을 타고 미약하지만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어 끓어오르던 근육의 열기를 조금씩 가라앉혔다.
한참 동안 연적의 팔을 살피던 장백수가 마침내 손을 떼며 낮게 읊조렸다.
"경맥이 심하게 뒤틀렸어. 내공줄이 없는 맨몸으로 그 짓을 했으니 근육이 터져 나가지 않은 게 용하구나."
"장부님……."
"어젯밤 그 칼잡이 놈의 도날을 흘려낸 거, 쟁반으로 받아친 그 각도 말이다."
장백수가 고개를 들어 연적을 똑바로 응시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속에서 형형한 기운이 번뜩였다.
"누구한테 배운 거냐."
연적은 숨을 들이켰다.
장백수의 시선은 사람의 뱃속까지 꿰뚫어 보는 것처럼 서늘하고 무거웠다. 그 눈빛 앞에서 거짓을 꾸며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아무한테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배우지 않았다고?"
"어젯밤 그 피투성이 노인 어르신이요. 차를 드실 때 찻잔을 쥐고 숨을 고르시는 걸 봤습니다. 엄지와 중지로 잔을 잡고 바닥을 세 번 두드리는데…… 그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어요."
연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칼잡이가 도를 내리찍는데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노인의 손목 각도와 숨을 내쉬던 박자가 눈앞에 그대로 떠올라서 쟁반으로 비틀어 받았을 뿐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가마니 틈으로 스며드는 새벽바람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장백수는 아무 말 없이 연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인의 시선이 연적의 목덜미 아래로 살짝 드러난 닳아빠진 노끈과 반쪽짜리 비취 옥패에 잠깐 머물렀다. 그 눈가에 스쳐 지나간 것은 경탄이 아니라 지독한 고뇌와 짙은 우려였다.
장백수가 무릎 위에 놓아두었던 마포 붕대를 집어 들었다.
그는 연적의 손목과 팔뚝을 마포로 칭칭 감아 단단하게 고정하기 시작했다. 거친 천이 살갗을 압박할 때마다 욱신거렸지만 흔들리던 관절이 단단하게 잡혀갔다.
붕대를 묶는 장백수의 손길은 투박했으나 놀라울 만큼 정교했다.
"연적아."
"예, 장부님."
"무공은 칼이나 몽둥이 같은 쇠붙이가 아니다. 그릇이다."
장백수가 붕대 끝을 단단히 매듭지으며 차갑게 말했다.
"그릇이란 안쪽에 단단한 바탕이 갖춰져야 비로소 물이든 술이든 담을 수 있는 법이다. 그 바탕이 바로 단전에 쌓는 내공이야. 헌데 바탕도 없는 흙덩이에 펄펄 끓는 쇳물을 들이부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릇이…… 깨집니다."
"그래, 산산조각이 나지. 그리고 그 쇳물은 그릇을 쥔 놈의 손과 발을 모조리 태워버린다."
장백수가 붕대를 감은 연적의 손목을 툭 쳤다.
"어젯밤 그 늙은이가 쓴 호흡과 힘의 분산은 평생을 피 냄새 속에 살아온 고수가 제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닦은 절학이다. 십 년, 이십 년 내공을 다진 자라야 감당할 수 있는 흐름이란 말이다. 헌데 넌 단전의 단 자도 모르는 하룻강아지 점소이야."
노인의 목소리가 점점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호흡의 뿌리도 없이 겉껍데기 초식만 억지로 베끼면 경맥이 뒤틀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 어젯밤은 천운으로 뼈만 안 부러진 거다. 한 번 더 그 따위 흉내를 냈다간 네 팔다리 힘줄이 모조리 끊어져 평생 불구가 될 게다."
뼈를 후벼 파는 듯한 경고였다.
연적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젯밤 찾아왔던 그 끔찍한 근육의 마비와 통증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잔상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은 거저 얻는 힘이 아니었다. 제 몸을 불사르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장부님……."
연적이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놈들이 하린 누님을 베려 했습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누님이 죽었을 텐데요."
"그래서 네 목숨을 내던지려 했느냐?"
장백수의 눈썹이 무섭게 치켜올라갔다.
"점소이는 밥값을 하고 살면 족하다. 식탁을 닦고 국밥을 나르며 손님 비위나 맞추면 되는 거야. 강호의 칼잡이들이 칼을 휘두르든 피를 흘리든 그건 그놈들의 업보다. 거기에 어설프게 발을 들이미는 순간 다시는 평범한 점소이로 돌아오지 못해."
장백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노인은 절뚝거리는 다리로 돌아서며 쐐기를 박듯 마지막 말을 던졌다.
"다시는 남의 무공을 흉내 내지 마라. 눈에 보이는 게 아무리 신기해도 머릿속에서 당장 지워버려. 쟁반을 들든 빗자루를 들든 점소이의 손으로만 살아라. 내 말을 어기고 또다시 흉내를 내는 날엔 이 객잔에서 네놈을 내쫓을 테니 그리 알아라."
서늘한 훈계를 남긴 장백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운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뒷모습은 언제나처럼 굽어 있었지만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바위산처럼 무거웠다.
연적은 단단히 감긴 오른손의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따라 하지 마라…….'
장백수의 말은 옳았다.
내공도 없는 몸으로 남의 절학을 베끼는 것은 제 몸을 갉아먹는 독약이었다. 하지만 식구들이 위협받는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면 그 무력감은 어떻게 견뎌야 한단 말인가.
그때 주방에서 하린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대접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장부님, 물 가져왔어요! 어머, 장부님 어디 가셨어? 붕대는 벌써 다 감은 거야?"
"누님, 장부님 저기 들어가셨어요."
연적이 붕대 감은 손을 흔들어 보이자 하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고약한 노인네, 말은 험하게 해도 붕대 매는 솜씨 하난 귀신같단 말이야. 물 식기 전에 얼굴이나 닦아라."
연적은 하린이 건넨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의 흙먼지와 식은땀을 닦아냈다.
뜨거운 온기가 닿자 굳어 있던 턱관절과 목덜미가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었다.
"누님, 저 마당 쓸고 올게요."
"야! 내가 가만히 있으랬잖아!"
"오른손 말고 왼손으로 슬슬 쓸면 돼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온몸이 더 쑤신단 말입니다."
연적은 하린이 더 말리기 전에 잽싸게 빗자루를 왼손에 쥐고 부서진 문틈을 빠져나갔다.
객잔 앞마당으로 나서자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새벽안개가 관도 위로 뽀얗게 깔려 있었고 동쪽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연적은 왼손으로 빗자루를 잡고 객잔 앞 진흙탕 길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오른손은 붕대로 감겨 욱신거렸지만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굳었던 다리 근육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흙탕물 위에는 어젯밤 도망친 칼잡이 세 놈의 흔적이 역력했다.
깊게 파인 발자국들이 북쪽 관도를 향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연적의 시선이 문득 길가 모퉁이로 향했다.
'그 어르신은…….'
어젯밤 피를 흘리며 빗속으로 사라졌던 그 노인.
연적은 빗자루를 든 채 노인이 걸어갔던 길목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객잔 문턱을 넘어선 자리까지는 핏방울이 진흙탕에 붉게 번져 있었다. 하지만 객잔 마당을 벗어나 관도로 이어지는 수양버들 나무 아래에 이르렀을 때 연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핏자국이 거짓말처럼 끊겨 있었다.
발자국조차 없었다.
밤새 폭우가 쏟아졌다고는 하나 칼잡이들의 발자국은 진흙탕에 깊숙이 패어 남아 있었다. 헌데 옆구리에 중상을 입고 피를 흘리던 노인의 흔적은 수양버들 아래를 기점으로 공기 중에 증발한 듯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흔적이 하나도 없지?'
연적이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빗물에 씻겨 나간 흔적이 아니었다. 흙탕물 위에 작은 디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날아간 것처럼 감쪽같았다.
그때 연적의 시선이 머리 위 수양버들 가지에 닿았다.
늘어진 버들가지 서너 가닥의 끝부분이 칼로 자른 듯 매끄럽게 베여 나가 있었다. 꺾인 것이 아니라 예리한 기운에 스쳐 단번에 잘려 나간 흔적이었다.
'나뭇가지를 밟고 날아간 건가? 피를 그렇게 흘리면서도?'
연적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 노인은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상처를 입고 쫓기는 와중에도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며 바람처럼 허공을 건너간 것이다.
그런 절정 고수의 호흡과 손목 동작을 자신이 하룻밤 사이에 훔쳐보았던 것이다. 장백수가 왜 그토록 서슬 퍼렇게 화를 내며 경고했는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때 북쪽 관도 쪽에서 방울 소리가 딸랑거리며 들려왔다.
안갯속을 헤치고 나귀 한 마리를 끈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따리를 짊어진 행색으로 보아 관도를 오가는 보부상이었다.
사내는 청연객잔의 박살 난 문짝과 가마니를 보더니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어이쿠 여보시오 젊은이! 객잔 꼴이 왜 이 모양이오? 간밤에 도적 떼라도 들었소?"
연적이 얼른 빗자루를 세우며 고개를 숙였다.
"손님, 어젯밤 비바람이 워낙 거칠어서 문짝이 좀 상했습니다. 식사나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아이고, 차 마실 새가 어디 있소. 북쪽 길목이 아주 난리가 났는데."
보부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땀을 훔쳤다. 연적의 눈썹이 꿈틀했다.
"북쪽 길목에요?"
"말도 마시오. 흑호채인지 뭔지 하는 험상궂은 칼잡이 놈들이 북쪽 관도 목을 떡하니 막아서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샅샅이 뒤지고 있더이다. 삿갓 쓴 늙은이를 찾는다면서 짐짝을 마구 헤집고 행패를 부리는데 아주 오금이 저려 혼났소."
보부상은 치를 떨며 나귀 고삐를 바짝 당겼다.
"관군도 손을 못 대는 사파 무리라더군. 당분간 북쪽 관도로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게 상책이오. 난 남쪽 장터로 피해야겠소."
보부상은 황급히 나귀를 몰아 남쪽 황톳길로 바쁘게 걸어갔다.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아침 안갯속으로 멀어져 갔다.
연적은 묵묵히 북쪽 관도를 바라보았다.
'노인 어르신을 잡으려고 길목을 완전히 봉쇄했구나.'
어젯밤 객잔으로 들이닥쳤던 조달 패거리는 그 수많은 무리 중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흑호채라는 사파 무리가 관도를 통째로 장악하고 노인을 쫓고 있었다.
비록 흔적을 감추고 사라진 노인이었지만 부상이 깊은 상태에서 그물망 같은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강호의 피비린내가 객잔 문턱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연적아! 마당 다 쓸었으면 들어와서 밥 먹어라!"
객잔 문간에서 하린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연적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젓고 빗자루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홀 안으로 들어서자 구수하고 진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홀 가운데 닦아놓은 탁자 위에 뚝배기 하나가 김을 펄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뽀얀 닭 육수에 잘게 찢은 닭가슴살과 멥쌀, 당귀와 황기를 넣고 푹 끓여 낸 약선 닭죽이었다.
"어서 앉아. 밥 먹어야 약기운도 돌고 피도 돌지."
하린이 놋숟가락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누님, 바쁜데 이런 건 언제 끓였어요?"
"새벽에 너 쓰러진 꼴 보고 가마솥에 불부터 지폈다. 약재 냄새 난다고 투덜대지 말고 국물 한 방울 남기지 말고 싹 긁어먹어. 너 앓아누우면 점소이 일감 다 내 차지란 말이야."
하린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죽 위에 얹힌 닭고기 고명은 그릇이 넘칠 만큼 푸짐했다.
연적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숟가락을 들었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쥐고 조심스럽게 한 술을 떠 입에 넣었다.
진한 닭고기의 감칠맛과 함께 은은한 약재 향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뜨거운 죽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에 닿는 순간 밤새 뼛속에 맺혀 있던 차가운 한기가 눈 녹듯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후끈한 기운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며 욱신거리던 손목의 통증도 한결 가라앉았다.
"맛있냐?"
"예, 누님. 천하제일 국밥집이 아니라 천하제일 죽집으로 바꿔도 대박 나겠습니다."
"능청 떨기는. 얼른 다 먹기나 해."
하린이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내자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이 맺히며 온몸에 활력이 차올랐다. 단순한 죽이 아니라 서하린의 지극한 정성이 담긴 약이었다.
식사를 마친 연적은 빈 그릇을 주방으로 나르고 마른걸레로 홀 탁자들을 훔치기 시작했다. 장백수는 카운터 뒤에서 여전히 묵묵히 주판알을 튕기며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창살 틈으로 스며들어 노인의 희끗한 귀밑머리를 비추었다.
연적은 손질이 끝난 탁자 위에 수저통을 채워 넣기 위해 주방에서 굵은 대나무 젓가락 한 묶음을 꺼내왔다.
물기를 말린 대나무 젓가락들이었다.
연적은 젓가락을 두 짝씩 짝을 맞추어 통에 꽂아 넣기 시작했다. 단단히 감긴 붕대 덕분에 오른손의 흔들림은 덜했지만 젓가락을 쥐는 순간 손가락 마디마디에 찌릿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
연적의 손끝이 멈칫 굳었다.
대나무 젓가락을 엄지와 검지, 중지로 비틀어 쥐는 그 각도. 어젯밤 노인이 찻잔을 쥘 때 취했던 손가락의 굽힘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장백수의 차가운 호통이 귓전을 맴돌았다.
'절대 남의 무공을 흉내 내지 마라. 머릿속에서 당장 지워버려.'
머리로는 그 경고를 되새기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에 닿은 차가운 대나무의 결은 어젯밤 눈에 각인되었던 그 푸른빛 궤적을 거세게 불러일으켰다.
심장이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옷섶 안쪽에 닿아 있던 반쪽짜리 비취 옥패가 은은하게 체온을 넘어서는 열기를 뿜어냈다. 연적의 눈앞에 노인의 손목이 다시금 그려졌다.
힘을 밖으로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모아 찻잔 바닥으로 흘려보내던 그 세 번의 호흡.
톡, 톡, 톡.
연적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신 채 멈추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쥔 젓가락 한 짝의 끝을 물푸레나무 탁자 모서리에 가볍게 가져다 대었다.
탁.
손목을 아주 미세하게 안쪽으로 비틀며 검지 끝으로 젓가락 윗머리를 튕겼다.
스스스.
찰나의 순간 연적의 손가락 끝에서 손목을 타고 기이한 진동이 벼락처럼 내달렸다.
나무 젓가락 끝을 통해 전해진 힘이 탁자의 나뭇결을 타고 바닥으로 스며들며 굵은 물푸레나무 상판 위로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일었다.
"연적아! 멍하니 서서 뭐 해? 저기 관도 쪽에서 손님 오신다!"
주방 문간에서 하린의 낭랑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 예, 누님! 지금 나갑니다!"
연적은 화들짝 놀라며 젓가락을 얼른 통에 꽂아 넣었다.
손끝에 남아 있는 찌릿한 저림과 가슴속 두근거림을 애써 억누르며 연적은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물러난 물푸레나무 탁자 모서리에는 젓가락 끝이 닿았던 자리에 바늘구멍만 한 깊고 날카로운 홈 하나가 선명하게 파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