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잔 점소이의 무공 훔쳐보기

2화: 문턱을 넘은 칼날
밤비를 뚫고 사라진 노인의 뒷모습 위로 칠흑 같은 어둠이 다시 내려앉았다.
깨진 덧창 틈으로 들이치는 비바람에 촛불이 꺼질 듯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홀 안에는 빗물과 피비린내 그리고 진한 차 향이 기묘하게 뒤섞여 감돌았다.
"연적아, 너 정말 괜찮은 거냐? 팔이라도 삔 것 아니야?"
주방 입구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서하린이 연적의 오른팔을 덥석 쥐었다.
"아이고 누님. 살살 좀 만지세요. 뼈는 멀쩡합니다."
연적이 멋쩍게 웃으며 손목을 뒤로 감추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했지만 손목 안쪽의 힘줄이 불에 덴 것처럼 후끈거렸다. 엄지와 중지를 굽힐 때마다 팔꿈치 안쪽까지 찌릿한 통증이 뻗쳐올랐다.
'방금 내 손이 멋대로 움직였어.'
노인의 손목 비틀기와 호흡을 눈으로 좇았을 뿐인데 몸이 그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 신기한 감각의 대가로 찾아온 근육통은 생각보다 지독했다.
장백수는 카운터 너머에서 아무 말 없이 곰방대를 털어냈다.
"하린아, 주방에 가서 기름 먹인 삿자리나 가져와라. 깨진 들창부터 막아야 빗물이 덜 칠 게다."
"예, 장부님. 연적아, 너 꼼짝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
하린이 혀를 차며 주방으로 총총걸음을 옮기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콰앙!
천둥소리보다 더 거친 굉음이 객잔의 정문을 박살 냈다.
비에 젖어 삐걱거리던 판자문이 경첩째 뜯겨 나가며 객잔 바닥으로 요란하게 나뒹굴었다.
들이닥친 거센 빗줄기와 함께 진흙 묻은 장화를 신은 사내 셋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퉤! 비가 아주 지랄맞게도 쏟아지는군."
앞장선 사내는 어깨에 시커먼 호랑이 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얼굴 왼편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와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멘 무거운 오환도(五環刀)가 서슬 퍼런 살기를 뿜어냈다.
그 뒤를 따르는 두 놈 역시 허리에 거친 날이 선 식칼 모양의 도를 차고 있었다.
"조 형님, 여기 핏자국이 있습니다!"
뒤따르던 왜소한 사내가 바닥의 빗물에 번진 붉은 핏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인이 앉아 있던 모퉁이 탁자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들이었다.
조달이라 불린 흉터투성이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역시 이 낡은 구멍가게로 기어들었군. 그 늙은 영감탱이가 어디로 숨었냐?"
조달이 오환도를 뽑아 바닥에 쿵 내리찍었다.
쇠고리 다섯 개가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울렸다.
"어서 불지 못해? 그 늙은이를 숨겨줬다간 이 쥐구멍 같은 객잔 식구들 목을 모조리 따버릴 테다!"
주방 문간에 서 있던 하린이 파얗게 질린 얼굴로 식도를 움켜쥐었다.
"우, 우리는 모릅니다! 웬 삿갓 쓴 손님이 차 한 잔 마시고 방금 나갔을 뿐이에요!"
"방금 나갔다고?"
조달이 성큼성큼 다가와 모퉁이 탁자를 걷어찼다.
콰직!
나무 탁자가 부서지며 노인이 남겨두고 간 엽전 세 닢이 쨍그랑 바닥을 굴렀다.
조달은 엽전을 힐끔 보더니 이내 하린의 얼굴을 음흉하게 훑어보았다.
"계집 목소리가 제법 앙칼지군. 늙은이를 쫓아가기 전에 뱃속부터 채워야겠는데 돈통 털고 고기랑 술부터 가져와라. 안 그러면 네 예쁜 얼굴에 칼자국을 내줄 테니."
조달이 손을 뻗어 하린의 멱살을 잡으려던 찰나였다.
"손님, 젖은 신발로 그렇게 올라오시면 청소하기가 아주 곤란합니다."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연적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연적이 놋쟁반을 양손으로 단정히 받쳐 든 채 조달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쟁반 위에는 뚝배기에 담긴 김이 펄펄 나는 장국과 술병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조달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올라갔다.
"이 맹랑한 점소이 새끼가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어?"
"어디서 오셨는지 몰라도 객잔의 규칙은 지키셔야죠. 밥과 술은 얼마든지 내어드릴 테니 흉기는 거두시지요."
"닥쳐라, 이 버러지 같은 놈이!"
격분한 조달이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무거운 오환도가 쇳소리를 울리며 연적의 어깨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내리꽂혔다.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술 기세의 흉포한 궤적이었다.
"연적아, 피해!"
하린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찰나 연적의 가슴팍이 다시금 뜨겁게 타올랐다.
노끈에 묶인 반쪽짜리 옥패가 고동치며 연적의 시야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 세상이 느려졌다.
조달이 도를 휘두르는 어깨 근육의 비틀림, 체중이 앞으로 쏠리는 하체의 각도 그리고 오환도의 날 끝이 허공을 가르는 탁하고 붉은 궤적이 연적의 눈에 낱낱이 분해되어 보였다.
'힘이 지나치게 앞으로 쏠려 있어.'
배운 적 없는 눈이 적의 허점을 짚어냈다.
단순한 도법이었다. 빠르고 사납지만 상체를 너무 기울여 중심이 무너져 있었다.
조달의 도날이 연적의 이마를 스치기 직전이었다.
스윽.
연적이 오른발을 대각선 뒤로 미끄러뜨렸다.
조금 전 노인이 찻잔을 받칠 때 취했던 무게 분산의 보법이었다.
동시에 양손으로 들고 있던 놋쟁반을 비스듬히 사선으로 세웠다.
깡-!
오환도의 묵직한 칼날이 놋쟁반의 매끄러운 굴곡을 비스듬히 타고 미끄러졌다.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 아니었다. 칼날의 무거운 파괴력이 쟁반의 사선을 타고 그대로 허공을 빗겨 나가 바닥의 판자를 강타했다.
콰앙!
조달의 칼날이 바닥에 깊게 박히며 튀어 오른 톱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신의 일격이 빗나갈 줄 꿈에도 몰랐던 조달은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크억?!"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연적의 몸이 유려하게 회전했다.
쟁반 위에 얹혀 있던 뚝배기가 미끄러지며 펄펄 끓는 진한 소고기 장국이 조달의 눈가와 가슴팍으로 정확하게 쏟아져 내렸다.
"아아악! 뜨거워! 내 눈!"
비명과 함께 조달이 얼굴을 감싸 쥐며 뒤로 자빠졌다.
"이 빌어먹을 점소이 놈이!"
뒤에 서 있던 졸개 둘이 경악하며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 연적에게 달려들었다.
"죽여버려!"
두 자루의 칼이 양옆에서 연적의 옆구리를 찔러왔다.
위험천만한 협공이었다.
그러나 연적은 당황하지 않았다.
바닥에 고인 빗물과 기름진 장국을 디딤돌 삼아 왼발을 미끄러뜨리며 몸을 낮추었다.
스스슥.
두 개의 칼날이 연적의 상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연적은 손에 든 빈 놋쟁반의 모서리로 오른쪽 졸개의 정강이를 톡 걷어찼다.
노인이 찻잔 밑바닥을 세 번 두드릴 때 썼던 짧고 날카로운 반동의 요결이었다.
퍽!
"커헉!"
정강이 뼈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중심을 잃었다.
연적은 쓰러지는 사내의 등을 받침대 삼아 가볍게 몸을 튕겨내며 왼쪽 졸개의 발목을 나무 의자로 걷어찼다.
덜컹! 콰장창!
두 명의 졸개가 엉겨 붙으며 홀 가운데 놓인 술 항아리 더미로 처박혔다.
진한 탁주가 터져 나오며 사방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셋이나 되는 무뢰배가 불과 서너 합 만에 바닥을 뒹굴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귀신 같은……."
얼굴을 데인 조달이 바닥을 기며 오환도를 다시 쥐려 했다.
그때 카운터 쪽에서 나직하고 메마른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장백수가 들고 있던 쇠 곰방대로 나무 계산대를 툭 쳤다.
탁.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홀 안의 빗소리와 바람 소리를 일순간에 집어삼키며 사내들의 귓전을 서늘하게 울렸다.
바닥에 고여 있던 빗물 웅덩이가 미세한 동심원을 그리며 떨렸다.
장백수가 반쯤 감긴 눈으로 조달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피 냄새를 풍기는 건 강호인의 사정이지만 남의 밥상을 엎는 건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십 리 밖 관도 다리가 끊기기 전에 썩 꺼지거라."
목소리에는 아무런 노기(怒氣)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담담함 속에 서린 묵직한 압력에 조달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이 늙은이…… 보통 놈이 아니야.'
게다가 저 귀신같이 움직이던 어린 점소이 놈까지.
이 객잔은 단순한 길목의 주막이 아니었다.
조달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훔쳐내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부하들을 걷어찼다.
"이, 일어나라! 밖으로 나간다!"
"형님, 이 놈들을 그냥 둡니까?"
"닥치고 나가! 늙은 놈 발자국 쫓는 게 먼저다!"
세 칼잡이는 부서진 문짝을 비틀거리며 빠져나가 어둠 속 빗길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말발굽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멀어져 갔다.
객잔 안에는 다시 거친 비바람 소리만이 맴돌았다.
"연적아……!"
하린이 식도를 내던지고 달려와 연적을 부둥켜안았다.
"너, 너 어디 다친 데 없어? 미쳤어, 정말? 칼 든 놈들 앞에 쟁반을 들고 끼어들면 어떡해!"
하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하하 누님. 말씀드렸잖습니까. 전 멀쩡…… 으윽!"
말을 끝맺기도 전에 연적의 다리가 힘없이 꺾였다.
털썩.
연적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힘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끊어질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쟁반을 쥐었던 오른팔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바닥을 미끄러지듯 디뎠던 양쪽 허벅지 근육은 쥐가 난 것처럼 뒤틀렸다.
'내공 없이…… 억지로 흉내를 내서 그런 건가?'
노인의 궤적을 보고 머리로 흉내 내는 것은 가능했지만 평범한 점소이의 육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반동이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며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장백수가 절뚝거리는 다리로 다가와 연적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노인은 거친 손으로 연적의 오른팔 혈도를 가볍게 짚었다.
따뜻한 기운이 팔뚝을 타고 스며들자 굳었던 근육이 가까스로 풀리며 숨통이 트였다.
장백수는 바닥에 흩어진 톱밥과 박살 난 쟁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칼날의 무게를 쟁반으로 흘리고 빗물로 중심을 털어냈다라……."
장백수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재주는 부렸으나 네 몸뚱이가 먼저 깨질 뻔했구나."
"장부님……."
"눈으로 본다고 해서 다 네 것이 되는 게 아니다. 뿌리 없는 나무는 바람 한 번에 뽑히는 법이지."
장백수는 연적의 가슴팍에 걸린 옥패를 슬쩍 응시한 뒤 몸을 일으켰다.
"하린아, 주방에 있는 백초유(百草油)를 가져와 이 녀석 팔다리에 듬뿍 발라주어라. 오늘 밤은 빗물이 다 들이치겠으니 홀 한쪽에 가마니라도 쌓아둬야겠다."
"예, 장부님. 연적아, 너 정말 내일 아침까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마."
하린이 훌쩍거리며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연적은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손끝에 남아 있는 그 서늘하고 날카로운 감각만큼은 지워지지 않았다.
강호의 칼날이 객잔의 문턱을 넘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눈은 이미 그 칼날의 길을 보아버렸다.
연적은 어둠이 짙게 깔린 객잔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밤비는 멈출 줄 모르고 처마를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