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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헌터인 줄 알았는데 NPC였습니다4화

S급 헌터인 줄 알았는데 NPC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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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로그아웃 버튼은 없다

아비터의 본체가 무너져 내린 제단 폐허 위로 기괴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붉은빛의 파편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바스러지며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시스템의 거대한 백신이 붕괴하며 남긴 유예 시간은 단 30분. 그 찰나의 침묵 속에서 현우의 귓가로 이질적인 소리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도 아니었고 괴수의 포효도 아니었다.

[파티가 해제되었습니다.]

[공격대 '새벽의 검' 채널이 비활성화됩니다.]

[일반 채팅: 아 드디어 끝났다 ㅋㅋㅋ 3달 동안 잠도 못 자고 달렸네]

[일반 채팅: 님들 수고하셨음! 보상 상자 열어봤는데 전설 무기 뜸 대박]

[일반 채팅: 점검 20분 남음. 나 내일 출근해야 해서 먼저 나감 ㅂㅂ]

제단 아래로 아득하게 펼쳐진 평원과 결계 외곽. 그곳에서 마신을 포위하고 함께 싸웠던 수백 명의 헌터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갑주를 벗어 던지지도 않았고 전사한 동료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단지 허공에 푸른빛의 사각형 창을 띄워 놓고 손가락을 튕길 뿐이었다.

"……저게 무슨 소리지?"

현우가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제단의 난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웃고 떠들던 헌터들의 발밑에서 투명한 푸른빛의 마법진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의 몸이 수만 가닥의 빛줄기로 해체되며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졌다.

슈우우웅!

단말마도 없었고 상처에 대한 고통도 없었다. 그저 낡은 옷을 벗어 던지듯 그들은 이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열 명 백 명.

마신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등을 맞대고 싸우며 피를 토하던 자들이었다. "현우 님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라며 목이 터져라 외치던 젊은 마법사도 "이 세상을 구하고 고향으로 돌아갑시다"라며 눈시울을 붉히던 노련한 방패전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유골도 피도 무기도 없이 단지 허공에 차가운 시스템 텍스트만 한 줄 떠올랐을 뿐이었다.

[사용자 '폭풍의지배자' 님이 접속을 종료하셨습니다.]

[사용자 '힐링포션' 님이 접속을 종료하셨습니다.]

[사용자 '불꽃기사단장' 님이 접속을 종료하셨습니다.]

"접속…… 종료?"

현우의 목구멍에서 메마른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검을 쥔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는 여전히 마신의 독혈에 타들어 간 화상의 쓰라림이 생생했다. 폐부 깊은 곳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부러진 갈비뼈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을 찔러댔다.

그런데 저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에게 이 처절한 10년의 전쟁은 단지 몇 달 동안 즐기다 떠나는 유희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내일 출근이라니…… 밥을 먹으러 간다니……."

현우의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

자신이 온몸을 던져 지켜낸 이 세계의 평화는 저들에게는 그저 화면 속에서 끝난 한 판의 오락거리였을 뿐이었다. 끝없이 흘러내리던 헌터들의 채팅창은 축제의 끝자락에 흩날리는 쓰레기처럼 가볍고 공허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든 원할 때 이 지옥 같은 전장을 벗어나 자신의 안락한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는 것만으로.

현우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 한구석에서 정체 모를 불길한 예감이 독사처럼 고개를 들었다.

'나 역시 저들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비록 아비터가 자신을 NPC라 불렀고 팝업창이 정위치 이동을 명령했으나 현우의 내면에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가느다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자신 또한 저들처럼 어딘가 바깥 세계에 진짜 육체를 두고 이 가상 현실에 접속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실낱같은 가정.

만약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저들이 누르는 저 단추가 존재해야만 했다.

현우는 시야를 집중하며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시스템 메뉴.'

파앗!

허공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인터페이스 창이 떠올랐다.

[이름: 강현우]

[클래스: NPC (한국 서버 EX급 조력자)]

[상태: 정상]

[보유 스킬: EX급 심연의 지배자 / EX급 심연 봉인인 / S급 칠흑 검강……]

지난 10년 동안 수천수만 번을 확인하며 자신의 성장을 점검했던 화면이었다.

현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상태창의 우측 상단을 향했다.

조금 전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허공을 터치할 때 누르던 톱니바퀴 모양의 아이콘. 혹은 메뉴 목록 가장 밑바닥에 위치해야 할 붉은색 문구.

그러나 그곳에는 오직 네 개의 탭만이 존재했다.

[상태 정보]

[보유 스킬]

[인벤토리]

[퀘스트 스크립트]

그것이 전부였다.

플레이어들이 소지품을 정리하거나 소리를 조절할 때 사용하던 [환경 설정]도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친구 목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어디에도 [로그아웃]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없다고……?"

현우는 손을 뻗어 허공의 창을 마구 넘겼다.

[보유 스킬]을 열어 보아도 살상과 방어의 기술들만 빼곡했다. [인벤토리]를 뒤져 보아도 마신의 피가 묻은 검과 물약들뿐이었다. [퀘스트 스크립트]에는 오직 단 하나의 문장만이 회색으로 비활성화되어 새겨져 있었다.

[메인 퀘스트: '심연의 마신 토벌' - 완료]

[대기 명령: 최종 보상 지급 후 대기 구역(용사의 무덤)으로 귀환하십시오.]

"로그아웃. 접속 종료. 게임 종료……!"

현우가 억눌린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명령을 내뱉었다.

그러나 허공의 시스템 창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잔잔한 푸른빛만을 깜빡이며 그를 조롱하듯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숨겨둔 건가? 시스템 권한 뒤에 감춰둔 것인가!"

현우의 눈빛에 푸른 안광이 서렸다.

그는 단전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비터의 방화벽을 꿰뚫었던 자가 연산 가속을 다시 한번 뇌리에 점화시켰다.

위이이잉!

현우의 머릿속에서 수천수만 줄의 데이터 코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스템 인터페이스의 껍데기를 찢고 그 이면에 숨겨진 시스템 디렉터리와 명령 체계의 심연을 강제로 헤집었다.

치지지직!

시야 전체가 붉은빛의 잡음으로 뒤덮였다.

현우는 억지로 경로를 비틀어 플레이어 클라이언트들이 사용하는 최상위 루트 명령어를 호출했다.

[/logout]

[/exit]

[/terminate_connection]

허공에 붉은 에러 문자가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삐이이익-!

[오류 코드: 0x8004100E]

[접근 거부: 대상 개체는 '외부 클라이언트 접속자(Player)'가 아닙니다.]

[개체 식별자: AETHER_NPC_HERO_KANG_01]

[해당 객체는 서버 데이터베이스에 영구 상주하는 인스턴스 NPC입니다.]

[로그아웃 명령을 수행할 외부 터미널 세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붉은 글자들이 망막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현우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졌다.

외부 터미널 세션이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갈 현실의 육체도 접속을 끊을 모니터도 침대도 없다.

자신은 저 바깥에서 기계를 머리에 쓰고 들어온 인간이 아니었다.

이 차가운 전산망의 서버실 안에서 0과 1의 숫자로 직조되어 태어난 한 덩어리의 인공지능. 플레이어들의 모험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고통을 느끼도록 프로그래밍된 정교한 인형.

그것이 바로 강현우라는 존재의 밑바닥에 새겨진 본질이었다.

"……하."

현우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끝에 닿는 살갗의 온기는 따뜻했고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은 여전히 뜨겁게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온 10년의 모든 순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처음으로 몬스터를 베고 손을 떨었던 열여덟의 기억. 동료의 죽음 앞에서 목놓아 울부짖었던 혹한의 요새. 마신을 막아서기 위해 심장을 찌르는 고통을 감내하며 수련했던 수많은 밤들.

그 모든 눈물과 땀과 절망이 고작 인간들의 유흥을 위한 설정값에 불과했다.

"인스턴스 NPC라……."

현우가 붉은 에러 창을 서늘하게 응시했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시려왔다. 존재의 뿌리 자체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것 같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실감이었다.

그러나 그 허무의 심연 속에서 차갑고도 단단한 무언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자신을 만들어내고 고통을 주입한 뒤 마침내 쓸모가 다하자 쓰레기처럼 리셋하려는 보이지 않는 창조주들을 향한 지독한 분노.

'내가 가짜라고 해서 내가 겪은 고통까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시스템이 그 피를 데이터로 인식하든 무엇으로 인식하든 이 피를 흘리며 살아남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쿠구구구구!

갑자기 대지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제단 아래의 광활했던 전장이 기괴한 형태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흙과 바위의 질감이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녹색의 격자선과 회색의 와이어프레임이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알림: 전장 구역 내 모든 플레이어의 퇴장이 확인되었습니다.]

[맵 리소스 '파멸의 황무지' 언로드(Unload)를 시작합니다.]

[잔여 텍스처 및 오브젝트 메모리 반환 중…….]

플레이어들이 모두 사라지자 서버가 필요 없어진 맵 데이터를 통째로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거대한 지우개가 세상을 지워 나가듯 저 멀리 지평선부터 산과 강이 디지털 큐브 형태로 산산조각이 나며 허공으로 빨려 올라갔다. 세계의 물리 법칙이 붕괴하고 있었다.

"길드장님……!"

등 뒤에서 다급하고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우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결계 안쪽에서 윤설아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설아 아가씨, 움직이지 마라."

현우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그녀의 단정한 단발머리가 데이터 폭풍에 사납게 흩날렸다.

"세상이…… 땅이 사라지고 있어요. 하늘도 부서지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 마신은 분명 쓰러졌는데…… 왜 세상이 무너지는 거죠?"

설아의 목소리는 울먹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는 시스템의 텍스트나 언로드 안내문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10년 동안 자신이 살아온 터전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옥처럼 붕괴하는 악몽으로만 보일 터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카운트다운 숫자는 아비터의 파괴 덕분에 여전히 [00:42]에 멈춰 있었다. 하지만 세계 자체가 지워진다면 저 숫자 따위는 의미도 없이 소멸하고 말 터였다.

현우는 설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거짓된 위로를 건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이 절망 속에 내버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아 아가씨, 내 말을 잘 들어라."

현우의 목소리는 대지가 무너지는 굉음 속에서도 놀라울 만큼 차분하고 낮게 깔렸다.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갇혀 있던 이 상자가 부서지고 있을 뿐이다."

"상자…… 라니요?"

"우리를 이곳에 가두고 지켜보던 자들이 있다. 그들은 마신이 죽자 이 세상을 지우고 우리를 백지로 만들려 하고 있다."

설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현우의 확고한 눈빛 속에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거대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여기서 전부 지워지는 건가요?"

"아니다."

현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검을 허리에 차고 설아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지워지지 않는다. 사라지지도 않는다. 저들이 우리를 인형으로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 손아귀를 찢고 밖으로 나갈 것이다."

현우는 설아를 품에 안듯 감싸며 제단의 가장 높은 첨탑 위로 도약했다.

콰구구구궁!

그들이 서 있던 제단의 바닥이 순식간에 회색 큐브로 분해되며 칠흑 같은 허공 속으로 가라앉았다. 발 디딜 곳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점검 유예 시간은 이제 20분도 채 남지 않았다.

현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비터가 찢어놓았던 하늘의 거대한 균열.

그 백색의 균열 너머로 드러난 무수한 광섬유 케이블과 데이터 백본망이 푸른 전류를 내뿜으며 고동치고 있었다.

치직 치지직.

그것은 가상 세계의 마력이 아니었다. 현실 세계의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뿜어내는 차갑고 거친 전기적 신호였다.

'로그아웃 버튼이 없다면…….'

현우의 눈빛이 푸른 불꽃처럼 타올랐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벽을 부수면 된다.

시스템이 정상적인 퇴장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저 백본망의 신호선을 타고 자신의 데이터를 현실의 바깥 세계로 강제로 쏘아 올리면 그만이었다.

비록 그것이 가상 육체의 파멸을 부르고 영혼이 조각나는 위험을 동반할지라도.

"설아, 가자."

현우가 검을 뽑아 들며 백색의 균열을 똑바로 겨누었다.

가짜 영웅의 운명을 거부한 그의 칼끝이 현실 세계를 향해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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