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헌터인 줄 알았는데 NPC였습니다

3화: 백신의 등장
쿠구구구구!
하늘의 붉은 균열이 산산이 벌어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제단 폐허를 집어삼켰다.
그것은 조금 전 현우가 베어 넘긴 탐색체 따위와는 격이 달랐다. 하늘의 반을 가린 아비터의 본체는 거대한 산악이나 기괴한 성채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수백 개의 붉은 눈동자가 일제히 굴러가며 오직 강현우 한 사람을 응시했다.
[회수 대상 강현우.]
[대상 개체의 스킬 슬롯 및 기억 데이터를 격리합니다.]
[보안 레벨 1단계 방화벽을 전개합니다.]
기계음이 공간 전체를 울리는 순간 제단 사방에서 거대한 붉은 장벽이 솟구쳐 올랐다.
키이이잉!
빛으로 이루어진 벽면에는 빼곡하게 알 수 없는 코드와 격자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높이는 하늘 끝까지 닿아 있었고 바닥은 대지 깊숙이 뿌리를 박았다. 완전한 육면체의 감옥이었다.
현우는 숨을 들이마시며 상태창을 응시했다.
시야 한구석에 떠 있던 반투명한 인터페이스가 붉은 잡음과 함께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고: 외부 시스템에 의해 스킬 접근 권한이 제한됩니다.]
[패시브 스킬: EX급 심연의 지배자 - 일시 비활성화]
[액티브 스킬: EX급 심연 봉인인 - 일시 비활성화]
[액티브 스킬: S급 칠흑 검강 - 접근 차단]
글자들이 회색으로 죽어 나가더니 그 위로 사슬 모양의 붉은 빗장이 덜컥 채워졌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세차게 뛰던 마력의 맥동이 턱 하고 가로막혔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검은 오라가 강제로 억눌리며 심장과 단전이 쥐어짜이듯 비틀렸다.
"크윽……!"
현우는 검을 바닥에 짚으며 이를 악물었다.
스킬이 잠기자 오른팔의 상처에서 지독한 한기가 스며 나왔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던 기둥 하나가 통째로 뽑혀 나간 것 같은 지독한 박탈감이었다.
[데이터 격리율 14%.]
[보조 개체의 잔여 기억 정리를 속행합니다.]
"길드…… 장……."
기둥 뒤편에서 윤설아의 신음이 들려왔다.
현우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기둥에 기댄 설아의 전신에서 푸른빛 가루가 희미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오른 카운트다운 숫자가 무서운 속도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잔여 기억 정리까지 02:40]
이대로 방화벽 안에 갇힌 채 시간이 지나면 설아는 완벽한 백지가 된다. 그리고 현우 자신 또한 기억과 힘을 모두 빼앗긴 채 어딘가로 회수되어 분해될 터였다.
'스킬을 잠갔다고?'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시스템이 스킬의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빗장을 걸어 잠갔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헌터로서 아무런 기술도 발동할 수 없는 무력화 상태였다.
하지만 현우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이 10년의 세월 동안 겪었던 사투는 고작 상태창의 단추를 누르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괴수의 발톱이 쇄골을 으스러뜨리던 순간 검을 어떻게 비틀어 찔러 넣었는지, 마력이 고갈되어 숨이 턱 끝까지 찼을 때 어떻게 피를 태워 검기를 끌어올렸는지는 그의 뼈와 근육이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스템이 입력해 준 데이터일지는 몰라도 그 고통을 견디며 완성한 것은 강현우 자신이었다.
"시스템 팝업창 따위가 내 손발을 묶을 수 있을 줄 아느냐."
현우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단전에 억지로 채워진 붉은 빗장을 향해 온몸의 의지를 집중시켰다. 마력이 흐르지 않는다면 혈관을 찢어서라도 길을 뚫으면 그만이었다.
두근!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현우는 단전의 핵을 강제로 수축시켰다. 마력의 흐름을 억누르는 시스템의 간섭 코드를 향해 자신의 생명력을 장작 삼아 순수 의지력을 밀어 넣었다.
쩌적!
귓가에서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야 구석의 상태창에서 붉은 에러 문구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경고: 스크립트 강제 우회 시도 감지!]
[규격 외 마력 가속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연산 코어 과열 위험!]
"닥쳐라."
현우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장검 위로 꺼져 가던 칠흑의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회색으로 잠겨 있던 스킬 창이 번쩍거리며 빗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스킬의 실행 명령을 거부한다면 명령 체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마력을 형상화하면 된다. 10년 동안 갈고닦은 마력 제어의 감각은 프로그램의 규칙보다 훨씬 빠르고 정교했다.
위이이잉!
아비터의 거대한 본체가 이상을 감지하고 붉은빛을 번뜩였다.
[오류 개체의 자가 연산 가속을 확인.]
[방화벽 압축 및 강제 파쇄 프로토콜을 가동합니다.]
제단을 둘러싸고 있던 붉은 벽면들이 일제히 안쪽으로 좁혀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빛의 벽면이 다가오며 닿는 모든 돌무더기를 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삼켜 버렸다.
동시에 하늘의 아비터 본체에서 수십 줄기의 붉은 광선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슈아아악!
공간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삭멸의 빛줄기들이 현우의 전신을 덮쳤다.
현우는 땅을 박찼다.
파바박!
그가 서 있던 바닥이 벌집처럼 뚫리며 칠흑의 심연으로 꺼져 들어갔다.
현우는 좁혀오는 방화벽 사이를 유려하게 내달렸다. 빗발치는 광선의 궤적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가며 방화벽의 가장자리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붉은 벽면을 샅샅이 훑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이지만 그것 역시 절대적인 무결점의 공간은 아니었다.
벽면의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붉은 실선들이 교차하며 에너지를 공급받는 결절점이 보였다. 아비터의 본체로부터 내려온 데이터 흐름이 그 결절점을 통해 벽을 유지하고 있었다.
'흐름이 있다면 끊을 수 있다.'
현우는 검을 쥔 손에 마력을 한계까지 응축시켰다.
검신이 마력의 고열을 이기지 못하고 붉게 달아오르다 마침내 완벽한 칠흑의 오라로 뒤덮였다.
쿠구구!
아비터가 현우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세 겹의 격벽을 전방에 연달아 세웠다. 두께만 수 미터에 달하는 단단한 데이터의 장벽이었다.
[돌파 불가능한 격벽입니다.]
[처분을 받아들이십시오.]
"처분은 내가 너에게 내린다."
현우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의 검이 허공에서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심연 봉인인 - 단절(斷絶)]
상태창의 버튼이 아닌 현우 자신의 의식과 마력 제어로 직접 빚어낸 오리지널 참격이었다.
검은 검강이 초승달 형태로 허공을 갈랐다. 검강은 단순한 물리적 파괴력을 넘어 방화벽을 구성하는 데이터 결절점들의 연결 구조 자체를 비틀어 베어 버렸다.
서그럭!
붉은 격벽의 중심에 검은 선 하나가 그어졌다.
그리고 찰나의 정적 뒤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균열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견고하던 세 겹의 방화벽이 유리창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붉은 파편들이 허공에서 타오르다 잿빛 연기가 되어 증발했다.
[치명적 시스템 충돌 발생!]
[방화벽 섹터 01 내지 03 완전 파괴!]
[복구 프로세스 응답 없음.]
아비터의 본체가 거대하게 흔들렸다. 방화벽이 부서진 반동으로 본체 곳곳에서 스파크와 같은 붉은 전류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네놈이다."
현우는 파괴된 격벽의 잔해를 발판 삼아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아비터의 본체 중심부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아비터의 본체 표면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뻗어 나와 현우를 휘감으려 했다. 하지만 현우는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번뜩였다.
채챙! 콰직!
다가오는 촉수들이 검은 검강에 모조리 토막 나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침내 아비터의 심장부에 도달한 현우의 눈에 거대한 붉은 코어가 보였다. 조금 전의 탐색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정교한 백신 시스템의 중추핵이었다.
그 코어의 중심에서 낯선 기계음이 다급하게 울리고 있었다.
[위험: 오류 개체의 접근을 차단하십시오.]
[관리자 권한 강제 호출 중…… 응답 지연 발생.]
"더는 지체할 시간 없다."
현우는 두 손으로 검자루를 거머쥐었다.
자신의 몸속에 남은 마지막 마력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검신에 쏟아부었다. 칠흑의 오라가 거대한 검의 형상을 이루며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마신을 벨 때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극한의 일격이었다.
자신의 10년을 거짓으로 치부하려는 시스템을 향해,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인형처럼 조종하려던 세상을 향해 현우는 검을 내리꽂았다.
"부서져라!"
콰아아아아앙!
검은 벼락 같은 참격이 아비터의 거대한 붉은 코어를 정면으로 관통했다.
세상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아비터의 본체 전체가 쪼개지며 붉은빛의 폭풍을 일으켰다. 거대한 성채 같던 형체가 무너지며 수만 개의 폴리곤 파편으로 산화해 떨어져 내렸다.
[긴급: 백신 백본 아비터 시스템 다운.]
[관리자 로그 전송 실패.]
[복구 모드로 전환…… 대기 시간 30분 소요.]
붉은 경고창들이 허공에서 일제히 깨져 나가며 사라졌다.
쿵!
현우는 제단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의 숨결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입가와 오른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셨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선명했다.
스킬 창을 옭아매고 있던 붉은 빗장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패시브 스킬: EX급 심연의 지배자 - 정상 복구]
[액티브 스킬: EX급 심연 봉인인 - 정상 복구]
[액티브 스킬: S급 칠흑 검강 - 정상 복구]
시스템이 부여한 권한을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아 온 것이다.
현우는 곧바로 몸을 돌려 기둥 뒤로 달려갔다.
"설아 아가씨!"
설아는 기둥 밑에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카운트다운은 멈춰 있었다.
[잔여 기억 정리까지 00:42 (일시 정지)]
아비터의 본체가 파괴되면서 시스템의 강제 초기화 프로세스 역시 일시적으로 먹통이 된 상태였다.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설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력을 섬세하게 조율하여 그녀의 주변에 [심연 봉인인]의 결계를 쳤다.
검은 오라가 얇은 막을 형성하며 설아의 몸을 감쌌다. 외부 시스템의 추가 스캔과 명령 신호를 차단하기 위한 임시 방호벽이었다.
"길드…… 장님……."
설아가 힘없이 눈을 깜빡였다. 완전히 자아를 되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계처럼 딱딱한 안내 대사는 멈춘 상태였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방법을 찾을 테니."
현우는 설아를 안전한 기둥 안쪽에 기대어 두고 일어섰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비터의 거대한 본체가 사라진 자리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거대하고 선명한 균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붉은 하늘 바깥으로 드러난 백색의 공간.
그곳에는 거대한 빛의 케이블들이 마치 신경망처럼 얽혀 저 멀리 알 수 없는 차원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 빛줄기를 타고 기괴한 전자 신호와 데이터의 파동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현우는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제 의문은 확실해졌다.
저 너머에 진짜 세계가 있다.
자신들을 가두고 조롱하며 리셋하려는 자들이 존재하는 저 바깥의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진정한 자유는 없다.
현우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가짜 영웅의 탈을 벗어 던진 그의 시선이 하늘 너머의 백색 통로를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