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앞 차원 통로 관리인입니다

9화: 방구석 마왕의 첫 방송
카이안의 검무 영상은 하룻밤 사이에 홍대 인근 SNS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홍대 갓검사', '길거리 팝핀 검무 레전드'라는 제목으로 퍼져나간 숏폼 영상은 조회수 30만을 가볍게 돌파했다. 댓글창에는 공연 크루의 정체와 장발 남자의 SNS 계정을 묻는 질문이 수천 개씩 쏟아지고 있었다.
한결은 카운터 뒤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며 연신 식은땀을 닦아냈다.
다행히 영상의 초점은 카이안의 현란한 동작과 댄서의 호응에 집중되어 있었다. 뒷배경의 골목 풍경은 어둡고 흐릿하게 뭉개져 있어 스테이 이계의 간판이나 위치가 특정될 위험은 낮았다.
"후…… 진짜 십년감수했네."
한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창가 쪽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카이안은 햇살이 내리쬐는 테이블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아리엘이 정성스레 우려준 허브차를 음미하는 그의 표정은 어제 옥상에서 보았던 날 선 무력감 대신 잔잔한 평온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력을 잃은 전사는 지구의 따스한 일상에 천천히 닻을 내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게스트하우스의 평화는 언제나 반쪽짜리였다.
쿵! 쿵! 콰앙!
2층 복도 끝에서 둔탁하고 살벌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는 무언가를 거칠게 집어던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바닥을 부술 듯 발을 구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카이안의 귀가 쫑긋 솟았고 창가 화분 속에 숨어 있던 정령들이 파르르 떨었다.
한결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계단으로 달려갔다.
"벨제아 씨! 또 방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한결이 202호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방 안은 암막 커튼으로 빛이 차단되어 한낮인데도 한밤중처럼 어두컴컴했다. 바닥에는 편의점에서 사 온 고카페인 에너지 드링크 캔과 과자 봉지, 뜯겨 나간 젤리 껍질이 어지럽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혼돈의 중심에서 벨제아가 책상 앞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붉은 눈동자는 모니터를 뚫어버릴 듯 살벌한 살기를 뿜어냈다.
모니터 화면 속에서는 국내 최대 라이브 스트리밍 플랫폼인 '초코'의 방송이 재생되고 있었다. 화면 속 스트리머는 극악의 난이도로 유명한 다크 판타지 액션 게임 '에테르 소울'의 보스전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YOU DIED]
붉은 글씨가 화면을 가득 채우자 벨제아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앙!
"저런 얼간이가 마검사 칭호를 달고 수만 명 앞에서 재롱을 떨고 있다니! 적의 칼끝이 왼쪽으로 3도 기울었는데 왜 구르기를 하지 않고 방패를 내리는 것이냐! 마계 하급 해골 병사도 저딴 식으로 칼질하진 않는다!"
한결은 턱을 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남의 게임 방송 보면서 화내는 거예요?"
벨제아가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핏발 선 눈이 번뜩였다.
"관리인! 네놈이 사 온 이 네모난 마법 상자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이 미천한 족속들은 왜 검 한 번 제대로 쥐어보지 못한 얼간이의 패배를 보며 시시덕거리고 있는 것이지?!"
"그건 게임 스트리밍 방송이에요. 그냥 남이 게임하는 거 보면서 응원도 하고 놀리기도 하는 문화라고요."
"놀려? 저게 놀리는 것으로 보이느냐!"
벨제아가 모니터 옆의 채팅창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채팅: ㅋㅋㅋ 또 죽었네 100트 가자]
[채팅: 할머니가 발가락으로 해도 저것보단 잘 피함]
[채팅: 님 손가락에 깁스함? 훈수 좀 듣자 제발]
"저 건방진 관중 놈들의 주둥이를 봐라! 정작 저 화면 속 놈은 혓바닥만 길어서 변명이나 지껄이고 있지 않느냐! 당장 저 방에 들어가서 저놈의 머통수를 마법으로 후려치고 싶구나!"
벨제아의 손끝에서 검붉은 스파크가 파지직 튀었다.
한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곧장 달려들어 벨제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팟.
한결의 체질이 닿자마자 손끝을 맴돌던 마력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벨제아는 허탈한 눈으로 자신의 손과 한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모니터 부수지 마요! 그거 할아버지가 남겨둔 멀쩡한 컴퓨터란 말이에요!"
"놓아라, 관리인! 내 속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다!"
"그럼 안 보면 되잖아요! 번아웃 와서 쉰다는 마왕님이 왜 지구 게임 방송을 밤새 보면서 혈압을 올려요?!"
"안 볼 수가 없단 말이다!"
벨제아가 분에 겨워 가슴을 헐떡였다.
한결은 그녀의 붉은 눈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왕이라는 거창한 이름 뒤에 숨겨져 있었지만 지금의 벨제아는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에 짓눌려 모든 의욕을 잃었던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무언가에 격렬한 분노와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비록 그 대상이 지구 게이머의 한심한 게임 실력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벨제아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검은색 게임 패드를 낚아채더니 모니터를 향해 겨누었다.
"짐이 직접 저 괴물의 목을 베겠다. 저 입만 산 지구 놈들의 주둥이를 단숨에 닥치게 만들어 주지."
"게임을 직접 하시겠다고요?"
"그래! 방송이라는 것도 켜라! 저 관중 놈들이 보는 앞에서 진정한 전장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각인시켜 줄 테니!"
한결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말려야 마땅했지만 벨제아의 눈빛은 이미 타오르는 마계의 용암 같았다. 여기서 무작정 막았다간 숙소 벽이 먼저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차원 은닉의 테두리 안에서 통제하는 편이 안전했다.
"조건이 있어요."
"조건?"
"첫째, 얼굴은 절대 화면에 비추지 마요. 노캠으로만 합니다. 둘째, 마계나 마왕 같은 단어는 일절 금지예요. 컨셉이라도 너무 구체적인 이세계 얘기는 꺼내지 마세요. 셋째, 마력 쓰지 말고 순수하게 손가락으로만 플레이하세요. 지킬 수 있어요?"
벨제아가 코웃음을 쳤다.
"시시하군. 하등한 필멸자 따위에게 내 고귀한 용안을 보여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마력 없이도 저따위 장난감 괴물은 새끼손가락만으로 도륙할 수 있으니 당장 켜라."
한결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는 초코 플랫폼에 새로운 계정을 생성하고 스트리밍 프로그램을 세팅했다. 웹캠은 아예 선을 뽑아 바닥에 던져두었고 음성 마이크만 연결했다.
방송 제목을 입력하는 칸 앞에서 한결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채널 이름은 뭘로 할래요?"
"마왕의 패링 교실."
"……그냥 패링 교실로 하죠."
"마왕을 빼면 패링의 위엄이 살지 않는다!"
결국 타협 끝에 결정된 방제는 하나였다.
[마왕님의 방구석 패링 교실: 뉴비의 첫 보스 도장깨기]
한결이 심호흡을 하며 마우스 클릭 버튼을 눌렀다.
"송출 시작했어요. 이제 진짜 방송 나갑니다."
화면에는 게임의 메인 로비 화면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카메라는 꺼져 있었고 화면 좌측 하단에 자그마한 채팅창만 깜빡였다.
시청자 수는 1명, 2명.
신입 스트리머 탐방을 즐기던 유저 몇 명이 흘러들어왔다.
[초코쿠키]: 뭐야 노캠 신입이네?
망겜수호자: 방제 보소 ㅋㅋㅋ 에테르 소울 1일차에 패링 교실? 훈수 마려운데 한번 쳐맞아 보실?
[푸른달]: 목소리 여자인가? 마이크 켜져 있네
채팅이 올라오자 벨제아가 헤드셋 마이크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방금 훈수를 지껄인 망겜수호자라는 놈."
헤드셋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오만했다.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귓전을 긁는 서늘한 독설이었다.
"네놈의 가소로운 혓바닥은 마계 하수구에 구르는 민달팽이보다 둔하구나. 입 다물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아라. 칼은 네놈의 썩은 뇌수처럼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초코쿠키]: 와 독설 폼 미쳤네 ㅋㅋㅋ 중2병 컨셉인가?
[푸른달]: 딕션 개쩐다 성우 지망생임?
채팅창이 물음표로 도배되는 사이 벨제아의 손가락이 게임 패드 위를 달렸다.
그녀가 입장한 구역은 에테르 소울 1막의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지역이었다. 붉은 화염으로 뒤덮인 성채 앞마당에서 거대한 대검을 든 보스 '칠흑의 기사단장'이 대지를 가르며 쇄도해 왔다.
쾅!
보스의 대검이 지면을 내리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일반적인 유저라면 공포에 질려 뒤로 구르기를 연타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벨제아의 캐릭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스의 칼날이 목덜미를 스치기 직전인 0.05초의 찰나.
챙—!
맑고 날카로운 금속 파열음이 스피커를 찢을 듯 울렸다. 완벽한 타이밍에 터져 나온 저스트 패링이었다.
보스의 자세가 허망하게 무너지며 붉은 빈틈이 드러났다.
푸욱!
벨제아는 망설임 없이 보스의 심장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치명타 대미지가 화면을 붉게 물들였다.
"첫 번째."
벨제아의 나직한 읊조림이 마이크를 타고 흘렀다.
보스가 괴성을 지르며 회전 베기를 시도했다. 불규칙한 페인트 모션이 섞인 3연속 횡베기였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패링 타이밍을 잡지 못해 갈려 나갔던 악명 높은 패턴이었다.
챙! 챙! 챙—!
세 번의 칼날이 허공에서 완벽하게 튕겨 나갔다.
벨제아의 손가락은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부드럽고 정확하게 패드를 튕기고 있었다. 마력은 전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수백 년간 전장에서 수만 번의 칼끝을 마주했던 마왕의 동체시력과 반응속도는 모니터 속 픽셀 따위에 속아 넘어갈 리 없었다.
"호흡이 엉망이군. 고작 이따위 인공물에 목숨을 잃고 징징대던 지구 놈들의 수준이 처참할 따름이다."
콰아아앙!
보스의 광폭화 패턴마저 허공을 찌르는 헛발질로 끝났다. 벨제아는 단 한 걸음의 낭비도 없이 공격을 흘려내며 마지막 일격을 보스의 목에 꽂아 넣었다.
[TARGET SLAIN]
보스가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58초였다.
체력 게이지는 단 1밀리미터도 깎이지 않은 완벽한 노히트 클리어였다.
채팅창이 순간 멈췄다.
그리고 3초 뒤 폭포수처럼 채팅이 터져 나왔다.
[초코쿠키]: 와 미쳤다 방금 뭐냐????
[푸른달]: 칠흑의 기사단장 1분 컷 노히트 실화임?
[게임폐인]: 핵 아님? 저 패턴을 다 쳐낸다고? 손캠 켜봐 미친
망겜수호자: 누님 아니 마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벨제아가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야 네놈들의 비루한 눈이 열린 모양이군."
폭풍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작되었다.
[초코 방송 핫클립: 에테르 소울 기사단장 58초 노히트 도륙하는 신인 노캠 여왕님]
글이 올라온 지 10분 만에 대형 게임 커뮤니티의 추천 수가 1,000개를 돌파했다. 입소문을 탄 시청자들이 물밀듯이 초코 방송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청자 수는 50명에서 300명으로, 다시 1,000명으로 폭증하더니 순식간에 3,000명을 가볍게 넘어섰다.
한결은 의자 뒤에 서서 빠르게 올라가는 시청자 숫자를 보며 턱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이게 왜 이렇게 많이 들어와?"
채팅창은 이미 육안으로 읽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소울마스터]: 성지순례 왔습니다
[단팥빵]: 목소리 톤 개차가운데 플레이는 더 차가움 ㄷㄷㄷ
[키보드워리어]: 다음 보스 '피눈물의 마녀' 갈 수 있나요? 그거 깨면 초코 1,000개 쏜다
그때 경쾌한 알림음이 스피커를 울렸다.
띵동—!
[소울마스터님이 초코 500개를 후원했습니다!]
[메시지: 마왕님, 마녀 보스도 노히트 가능합니까? 성공하시면 5만 원 더 쏩니다.]
스피커에서 튀어나온 기계음 음성에 벨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초코 500개? 그게 무엇이냐?"
한결이 벨제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지구 돈으로 5만 원이에요. 저 사람들이 벨제아 씨 잘한다고 돈을 주는 거라고요."
벨제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고작 5만 원으로 짐의 위엄을 시험하려 드는 것이냐? 가소로운 필멸자 놈."
벨제아가 마이크에 대고 냉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 오만한 도발은 제법 마음에 드는구나. 소울마스터라는 놈, 눈 깜빡이지 말고 지켜보아라. 네놈이 평생 모아 온 하찮은 재물을 어디에 바쳐야 하는지 똑똑히 깨닫게 해 줄 테니."
벨제아의 캐릭터가 2막의 설원 던전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피눈물의 마녀'는 순간이동과 화면 전체를 뒤덮는 탄막 마법으로 악명 높은 보스였다.
"더럽게 어지러운 빛을 쏘아대는군."
벨제아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패드를 부드럽게 기울였다. 캐릭터는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을 타듯 마법 탄환의 궤적 사이를 종이 한 장 차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순간이동으로 등 뒤를 노린 마녀의 단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챙—!
뒤통수에 눈이 달린 듯한 패링이 터졌다.
마녀의 비명이 울려 퍼지며 화면 가득 피보라가 튀었다. 벨제아는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약점 부위를 난도질했다.
클리어 타임 42초. 이번에도 단 한 대도 맞지 않은 퍼펙트 클리어였다.
띵동—! 띵동—! 띵동—!
후원 알림이 연달아 폭발했다.
[소울마스터님이 초코 1,000개를 후원했습니다: "진짜 신이다…… 마왕님 제발 욕 한 번만 더 해주세요"]
[익명의도파민님이 초코 300개를 후원했습니다: "포상 달달하다 제발 저도 밟아주세요"]
[홍대게이머님이 초코 500개를 후원했습니다: "이 방 도파민 미쳤네 ㅋㅋㅋㅋ 구독 박습니다"]
채팅창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채팅: ㅋㅋㅋㅋㅋ 돈 내고 욕먹는 방 실화냐]
[채팅: 시청자들 전부 M으로 만들어버리는 마왕님]
[채팅: 딕션 진짜 서늘해서 뼈 맞음 ㅋㅋㅋ]
벨제아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돈을 바치며 모욕을 청하다니 지구인들은 진정 변태들의 종족인가? 하, 좋다. 천 원짜리 하등생물 놈들아. 모니터 앞에 꿇어앉아 네놈들의 한심함을 평생 반성해라."
[채팅: 캬 극락이다 ㅋㅋㅋㅋㅋ]
[채팅: 천 원짜리 하등생물 ㅋㅋㅋㅋㅋ]
[채팅: 마왕님 평생 방송해줘 ㅠㅠ]
202호 문간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카이안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적의 빈틈을 파고드는 타이밍이 지독하게 잔인하군. 역시 마왕의 감각은 녹슬지 않았어."
한결은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방송은 막을 내렸다.
최종 보스까지 단 하루 만에 전부 도륙한 벨제아의 첫 방송은 최고 시청자 4,500명을 돌파하며 초코 플랫폼 전체 랭킹 3위에 올랐다.
한결이 방송 종료 버튼을 누르자 방 안에는 오랜만에 적막이 찾아왔다.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본체의 냉각팬 소리만이 귓전을 맴돌았다.
벨제아는 헤드셋을 벗어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후우우.
그녀의 입술 사이로 길고 뜨거운 날숨이 터져 나왔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지난 며칠간 보아왔던 흐리멍덩한 권태와 번아웃의 흔적이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기분 좋은 피로와 생생한 승리의 열기만이 가득했다.
"……시원하군."
벨제아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끝없이 쌓이던 전후 복구 서류, 배급량을 둘러싼 영주들의 볼멘소리, 항복한 귀족들의 처분을 둘러싼 골치 아픈 암투. 그 모든 숨 막히는 족쇄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의 감각과 손끝만으로 적을 베어 넘기던 시간이었다.
비록 화면 속 가상의 데이터 쪼가리였을지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완벽하게 끝마쳤다는 효능감이 가슴속 깊은 응어리를 시원하게 씻어내리고 있었다.
벨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화면에는 초코 플랫폼의 실시간 정산 예정 금액이 떠 있었다.
"관리인. 저 숫자가 네놈들이 쓰는 돈이 맞느냐?"
"네. 수수료 떼도 100만 원이 훌쩍 넘어요. 첫 방송에서 이 정도면 기적이에요."
벨제아가 피식 웃었다.
"그럼 그중 절반은 숙박비와 건물 수리비로 가져가라. 임시 관리인 놈이 돈 때문에 징징거리는 꼴을 더는 보기 싫으니까."
"정말요?"
"대신 내일 편의점에 가서 가장 비싸고 달콤한 초콜릿과 푸딩을 상자째로 사 와라. 내 당분이 떨어지면 언제든 이 방을 날려버릴 테니."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벨제아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 순간 한결의 시야에 투명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등록 투숙객 002 벨제아의 장기 번아웃 증후군 완화 확인.]
[자아 효능감 회복 및 정서 안정도 수치 대폭 상승.]
[숙소 미납 관리비 일부 납부 처리 확인.]
한결은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안도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안의 버스킹에 이어 벨제아의 인터넷 방송까지. 이 기묘한 투숙객들이 지구라는 세상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숨 쉴 구멍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결은 벨제아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넨 뒤 1층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는 불이 꺼져 고요했다. 그런데 창가 쪽에 하얀 실루엣 하나가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아리엘이었다.
그녀는 창문을 살포시 열어둔 채 밤바람을 맞고 있었다. 품에 안긴 화분 속 정령들이 초록색 빛을 반짝이며 바깥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한결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리엘 씨, 아직 안 주무셨어요?"
아리엘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설명하기 힘든 아련한 수심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밤바람을 타고 날아온 작은 풀잎 하나가 바르르 떨렸다.
"한결 님…… 저 멀리 작은 숲길에서, 바람의 아이들이 슬프게 울고 있어요."
아리엘의 시선은 홍대 번화가 너머, 연남동 숲길 쪽의 어두운 밤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속삭임과 함께 로비 창가로 서늘하고 짙은 흙냄새가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