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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가 오자 내 지하실만 따뜻함2화

빙하기가 오자 내 지하실만 따뜻함

빙하기가 오자 내 지하실만 따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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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첫 번째 발아 트레이]

벽을 울린 세 번의 금속음 뒤로 지독한 침묵이 이어졌다.

도윤은 손전등과 청음 봉을 쥐고 설비 구역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윤이 뒤를 따르려 하자 그는 왼손을 들어 저지했다.

“바닥의 황색 선을 넘지 마세요.”

“사람이 두드린 소리일 수도 있잖아요. 밖에 누가 있으면…….”

“지하 3층입니다. 지표면에서 9미터 아래예요. 밖에서 사람이 맨손으로 두드릴 수 있는 깊이가 아닙니다.”

도윤은 벽체 속으로 들어가는 배관 매립부에 청음 봉 끝을 바짝 댔다. 귀를 기울이자 차가운 진동이 뼈를 타고 전해졌다. 규칙적인 박동은 아니었다. 무언가 긁히고 굳어가는 미세한 마찰음이 관벽을 타고 울렸다.

그는 열화상 진단기를 켰다. 화면에 뜬 배관 단면은 기이한 색을 띠고 있었다.

지열 코어에서 올라오는 순환수는 붉은빛이었지만 지상과 이어진 공기 흡배기 덕트 하단은 시퍼런 얼음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영하 42도. 단열재 안쪽까지 바깥 냉기가 파고들고 있었다.

“어떤 상태인가요?”

선반에 기댄 서윤이 낮게 물었다. 그녀는 안전선 밖에서 굳은 얼굴로 배관을 응시했다. 민재는 구석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종자 봉투를 꼭 올려두고 있었다.

“외부 배기관입니다. 지하의 폐열과 수분이 지상 배기구로 빠져나가다가 영하 80도의 바깥 공기를 만나면서 덕트 안쪽에 고드름을 만든 겁니다.”

도윤이 진단기 화면의 결빙 부위를 가리켰다.

“방금 소리는 덩어리진 얼음이 덕트 곡관부로 떨어지며 금속 댐퍼를 때린 겁니다. 사람이 아니라 얼음이에요.”

서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도윤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안도할 일이 아닙니다. 배기관 댐퍼가 얼어붙어 막히면 지하실 환기가 중단됩니다. 폐열이 빠져나가지 못해 기계가 과열되거나 이산화탄소가 차올라 질식할 수 있어요.”

도윤은 렌치로 배관 점검창 볼트를 풀었다. 틈새로 얼음 알갱이가 튀며 서늘한 바람이 새어 나왔다. 덕트 외벽에 감긴 결빙 방지 열선의 저항값을 테스터기로 찍자 수치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지열 순환 펌프만 돌리고 환기 덕트 예열선을 꺼 둔 게 원인입니다. 배기관 결빙 방지선을 상시 2단계로 올려야 합니다.”

도윤은 분전반 스위치를 올렸다. 미세한 유도음과 함께 덕트 주변 온도가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배관 내부에서 뚝뚝 녹아내리는 물방울 소리가 났다.

문제는 수습되었지만 관리자 패널의 전력 소비 막대그래프가 눈에 띄게 치솟았다.

환기 보온 전력으로 시간당 1.2킬로와트가 추가 배정되었다. 그만큼 비상 배터리의 여유 시간이 줄어들었다.

도윤은 작업복 소매로 이마를 닦고 거주 구역 테이블로 돌아왔다.

탁자 맞은편에 앉은 서윤이 도윤의 연필 끝을 보았다.

“계산이 틀어졌나요?”

“환기 열선을 켜지 않으면 우리가 질식합니다. 덕분에 여유 전력이 바닥났습니다.”

“아까 적은 생존표는요?”

도윤은 종이 장부에 적힌 항목들을 짚었다.

“난방, 식용수 정화, 통신, 농업. 이 넷 중에서 하나를 줄이지 않으면 닷새를 채우기 전에 배터리가 방전됩니다. 지열 코어가 전력을 일부 만들어 내지만 열저장층 압력 이상으로 발전량을 더 늘릴 수는 없습니다.”

서윤의 시선이 통신 항목에 멎었다.

“외부 통신을 끄겠다는 건 아니겠죠?”

“24시간 상시 수신 대기로 돌려놓으면 하루에 배터리의 9퍼센트가 날아갑니다. 지금 우리에겐 무의미한 소모입니다.”

“무의미하다고요? 아파트 계단실에 사람이 남아 있어요. 구조 신호를 언제 보낼지 모르는데 그걸 끄겠다고요?”

서윤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높아졌다. 민재가 놀라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도윤은 차분하게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한서윤 씨. 당장 지하실 안의 셋이 살아야 다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방전되어 얼어 죽으면 그 사람들에게도 응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눈과 귀를 닫아버리면 고립되어 말라 죽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완전히 닫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윤은 연필을 내려놓고 서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시 수신 대신 스케줄링을 적용합니다. 4시간마다 정각에 3분간만 통신 콘솔을 켭니다. 0시, 4시, 8시, 12시. 그 3분 동안 채널 3을 확인하고 아무 신호가 없으면 전원을 내립니다. 이렇게 하면 통신 소비 전력을 90퍼센트 줄일 수 있습니다.”

서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계산상 반박할 틈이 없었지만 표정에는 고뇌가 깊었다.

“상대방이 그 시간을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다음 통신이 연결될 때 약속을 전달하면 됩니다. 그들도 배터리를 아껴야 살 수 있으니 정시 교신이 오히려 생존 확률을 높입니다.”

서윤은 한참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통신은 그렇게 하죠. 그럼 농업 모듈은요? 지금 상태로 켤 수 있습니까?”

도윤은 장부의 난방 수치를 지우고 새 숫자를 적었다.

“거주 구역 온도를 18도에서 16.5도로 1.5도 낮춥니다. 침실과 격리 구역만 단열 커튼을 치고 내복과 방한복을 껴입으세요. 체온을 유지하는 데는 16도면 충분합니다. 거기서 아낀 열량과 통신 절감분을 합쳐서 스마트팜 1번 트레이에 투입합니다.”

듣고 있던 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그럼 씨앗 심는 거예요?”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추위 속에서도 씨앗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얼굴이 환해져 있었다.

“심는다기보다는 싹을 틔우는 거지. 트레이 하나만 가동할 거다.”

“제가 도울 수 있어요. 씨앗은 제가 잘 알아요.”

서윤도 엷은 미소를 지었다.

“민재 손이 야무져요. 시키는 건 무엇이든 잘 해낼 겁니다.”

도윤은 장부를 덮고 수납장에서 조립 공구함을 꺼냈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죠. 따라오세요.”

지하 3층 동쪽 끝의 농업 구역은 서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공간 한가운데에는 조립되지 않은 알루미늄 프로파일과 배관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바닥에는 배수 트렌치가 파여 있었고 벽면에는 정화수 배관과 전력 단자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도윤은 수평계를 들고 바닥 기울기부터 쟀다.

“수경재배는 물의 흐름이 전부입니다. 물이 고이거나 한쪽으로 쏠리면 뿌리가 썩어요.”

도윤이 육각 렌치로 사각 프레임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기둥 네 개를 세우고 하부 양액 탱크를 거치했다. 이어 경사를 맞춘 베드 트레이를 얹었다.

그의 손놀림은 빨랐다. 시설관리자로서 숱하게 다뤄온 배관과 설비였기에 도면 없이도 순서가 머릿속에 잡혀 있었다.

“민재는 이거 해 봐라.”

도윤이 압축 스펀지 큐브들이 담긴 바구니를 민재 앞에 놓았다.

“정화수에 소독액을 0.1퍼센트 탄 물이다. 스펀지를 적신 다음 핀셋으로 가운데 홈을 살짝 벌려 둬.”

“네!”

민재는 털장갑을 벗고 라텍스 장갑을 꼈다. 작은 손으로 스펀지를 물에 적시고 핀셋으로 꼼꼼하게 다듬었다. 서두르지 않는 침착함이 있었다. 도윤은 곁눈질로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펌프와 연결되는 실리콘 호스를 배관 소켓에 끼웠다.

“이 호스는 어디로 가나요?”

“양액 탱크에서 모터를 거쳐 상부 노즐로 갑니다. 물이 트레이를 타고 흐르며 스펀지에 스며들고 남은 물은 다시 탱크로 순환하는 구조예요.”

도윤은 펌프의 에어 밸브를 열어 배관 안쪽 공기를 뺐다. 공기를 빼두지 않으면 모터가 헛돌아 탈 수 있었다.

“이제 씨앗을 골라야 합니다.”

민재가 품에서 소중하게 간직하던 은박 봉투를 꺼냈다. 봉투를 열자 마른 씨앗들이 보였다.

봉투 안쪽 모서리에 작은 푸른색 잉크로 일련번호가 찍혀 있었다.

K-GEO-S04

도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반 종묘상에서 파는 씨앗 봉투가 아니었다. 규격화된 연구 코드였다. 누나 지연이 쓰던 자재 관리 번호와 형식까지 닮아 있었다.

“민재야, 이 봉투 어디서 났지?”

“할머니 서랍에서요. 도시에 큰 추위가 오면 이 봉투를 챙겨서 지하실이나 온실로 가라고 하셨어요. 싹이 아주 빨리 트는 씨앗들이래요.”

민재가 손바닥 위에 씨앗을 올렸다.

“이 까맣고 둥근 건 래디시예요. 적환무요. 이건 배추랑 비슷한 청경채고요. 둘 다 추위에 강해서 나흘 만에 싹이 트고 열흘이면 새싹으로 먹을 수 있대요.”

도윤은 봉투의 코드를 더 묻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비밀의 출처가 아니라 자라날 식량이었다.

“좋다. 1번 트레이에는 래디시 마흔 개, 청경채 마흔 개만 심는다.”

민재는 핀셋으로 씨앗을 집어 스펀지 홈에 넣었다.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물을 머금을 수 있는 자리였다.

여든 개의 씨앗이 스펀지에 자리를 잡고 트레이 판 위에 일렬로 늘어섰다.

도윤은 식용수 배관에서 끌어온 1차 정화수를 탱크에 채웠다. 영양액 원액을 스포이트로 뽑아 정밀하게 희석했다. 맑은 양액수가 탱크 안에서 찰랑거렸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도윤은 농업 모듈 배전반 앞에 섰다. 서윤과 민재가 숨을 죽이고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전원을 올립니다. 모터 기동 때 전압 강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딸깍.

메인 차단기를 올렸다.

지열 코어 인버터가 묵직한 구동음을 내며 부하를 견뎌냈다.

지잉-

하부 순환 펌프가 돌았다. 배관을 타고 물이 솟구쳐 상부 노즐을 적셨다. 트레이 바닥을 따라 잔잔한 수막이 퍼지며 스펀지 아래로 스며들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곧이어 트레이 상단에 달린 다파장 식물 생장용 LED 바가 켜졌다.

탁!

차가운 어둠 속에서 붉은빛과 푸른빛이 번지며 오묘한 분홍빛 광채가 농업 구역을 가득 밝혔다.

“와…….”

민재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아이의 안경 위로 보랏빛 인공 태양이 어렸다.

바깥은 영하 80도의 혹한이었지만 이 작은 트레이 안에서는 생명이 자라날 빛과 물이 흐르고 있었다.

서윤이 트레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살아 있네요.”

“아직은 물을 먹는 기계일 뿐입니다. 사흘 뒤에 초록색 싹이 올라와야 진짜 산 겁니다.”

도윤은 무덤덤하게 답했지만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계가 계획대로 돌아갈 때 느끼는 익숙한 안도감이었다.

도윤은 장부에 적었다.

‘1번 스마트팜 모듈 가동. 래디시 40구, 청경채 40구 파종. 예상 발아 36시간 후. 전력 소비 안정.’

그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 58분.

조립과 시운전에 세 시간이 걸렸다.

도윤이 서윤을 보았다.

“서윤 씨. 4시입니다.”

서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녀는 손을 털고 거주 구역의 통신 콘솔로 걸어갔다.

도윤과 민재도 통신 콘솔 뒤로 다가섰다.

벽시계 초침이 12를 가리키며 4시 정각이 되었다.

자동 스케줄러가 작동하며 통신 장비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치이익-

헤드셋과 스피커에서 백색 잡음이 흘렀다.

“통신창 개방. 잔여 시간 180초 카운트다운 시작.”

도윤이 타이머를 켰다.

서윤이 다이얼을 채널 3에 맞추고 송신 버튼을 눌렀다.

“여기는 한서윤입니다. 응급 통신 채널 3, 응답 가능한 생존자는 교신 바랍니다. 남은 시간 2분 40초.”

치이이익- 거친 잡음만이 스피커를 긁었다.

1분이 흘렀다. 잔여 시간 85초.

서윤의 손등에 힘줄이 섰다.

“반복합니다. 여기는 한서윤입니다. 아파트 계단실, 들리시면 응답하세요.”

치익, 치직…… 틱.

잡음 사이로 이질적인 신호음이 튀었다.

이어서 얼어붙은 유리창을 긁는 듯한 거친 비명이 스피커를 찢고 터져 나왔다.

  • 치직…… 살려…… 서윤 씨! 듣고 있어요?!

서윤이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듣고 있습니다! 상태를 말해요!”

  • 계단실…… 창문이 깨졌어요! 바람이, 눈보라가 그대로 들이칩니다!

무전 너머로 매서운 바람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여 들렸다.

  • 정 씨 아저씨 다리가 완전히 얼어서 못 움직여요! 배터리도…… 빨간 불입니다! 이제 5분도 못 버텨요! 제발 살려줘요, 서윤 씨!

치지직- 뚝.

신호가 거칠게 끊어지며 타이머의 숫자가 0을 향해 떨어졌다.

통신실 안의 세 사람 위로 지독한 한기가 다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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