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가 오자 내 지하실만 따뜻함

1화 [따뜻한 바닥 위의 72시간]
지하 3층의 온도계는 18.2도를 가리켰다.
윤도윤은 숫자를 두 번 확인한 뒤 손목시계를 봤다. 집 안으로 내려오기 전 현관 센서는 영하 79.6도에서 멈췄다. 온도계가 고장 난 게 아니라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계절이 갈라진 셈이었다.
그는 계단 난간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손바닥에는 아직도 작업용 장갑의 고무 냄새가 남아 있었다. 따뜻하다는 감각이 반가운 만큼 불길했다. 설비는 공짜로 살아 있지 않았다.
지하실 벽면의 검은 패널이 낮게 켜졌다. 원형 그래프 하나와 네 개의 수치가 떴다.
열회수 61퍼센트. 저장수 412리터. 식용수 86리터. 비상 배터리 68퍼센트.
도윤은 공구함에서 종이 장부를 꺼냈다. 센서는 고장 나도 종이는 기록을 남긴다.
“난방 구역 열여덟 도 유지. 농업 모듈은 대기. 통신은 저전력.”
혼잣말을 하며 숫자를 옮기던 순간 패널이 짧게 진동했다.
‘출력 상승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열저장층 압력 변동 감지.’
도윤은 그래프를 확대했다. 지하 깊은 곳의 압력선이 일정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지열 코어는 연료를 먹지 않을 뿐 땅에서 꺼낼 수 있는 열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농업 모듈의 전원 표시를 확인했다. 자동 재배실 안에는 비어 있는 트레이와 말라붙은 양액통이 있었다. 씨앗을 넣는다고 바로 음식이 되지 않는다. 빛과 물과 관리가 필요하다. 지금 가동하면 배터리의 11퍼센트를 쓰고 36시간 뒤 첫 잎을 볼 수 있다는 예상치가 떴다.
도윤은 전원을 올리지 않았다.
냉장 보관 중인 비상식량은 혼자라면 열흘을 버틸 수 있었다. 물은 사흘이었다. 식량보다 물이 먼저 바닥난다. 사람이 늘면 계산은 더 짧아진다.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한 시간 전 도착한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윤아. 코어가 살아 있으면 출력 제한을 풀지 마. 네가 볼 수 있는 경고보다 아래에 있는 게 더 위험해.]
발신자는 누나 지연이었다. 답장은 전송되지 않았다. 그는 메시지를 길게 눌렀지만 삭제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대신 전화를 껐다.
그때 천장 스피커에서 잡음이 흘렀다.
“……응답 가능한 시설은 들으세요. 여기는 외곽 응급 통신 임시 채널입니다.”
도윤의 연필 끝이 멈췄다.
“열원이나 전력원이 있는 곳은 채널 3으로 응답해 주세요. 부상자 구조 요청이 있습니다. 반복합니다. 채널 3으로…….”
그는 무전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처음에는 눈보라 소리뿐이었다. 이어서 가늘게 떨리는 숨이 잡혔다.
“여기는 한서윤. 들리면 이름만 말해 주세요.”
도윤은 마이크를 들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말하면 혼자가 아니게 된다.
“윤도윤입니다. 위치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상태부터 보고하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도윤 씨?”
“상태.”
“성인 한 명, 아동 한 명. 성인은 보행 가능하고 아동은 기침이 있습니다. 동상은 아직 깊지 않습니다. 열배터리 잔량은 열두 분입니다.”
“다른 사람은요?”
“아파트 계단실에 세 명이 남아 있습니다. 한 명은 움직일 수 없어요. 지금 데리고 나가면 네 명 다 죽습니다.”
서윤의 목소리는 빨랐지만 문장 끝이 흐려지지 않았다. 도윤은 장부 한쪽에 숫자를 적었다. 성인 1, 아동 1, 열배터리 12분. 응급 통신이라고 했지만 구조할 차량도 동행할 인력도 없었다.
“왜 제 채널을 잡았습니까?”
“당신 집 지하에 비상 설비가 있다는 걸 봤습니다. 평소에도 배기구 주변 눈이 안 얼었어요.”
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외부에서 이미 열기가 보였다는 뜻이었다.
“문을 열어 달라는 겁니까?”
“아니요. 들어가게 해 달라는 겁니다. 아이부터.”
“아이 이름.”
“민재. 열두 살.”
무전 너머에서 작은 목소리가 섞였다.
“아저씨, 안에 식물이 있어요?”
자동 재배실의 빈 트레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에게는 식물이 없는 방이었고 그에게는 아직 식물이 되지 못한 전력 소비 장치였다.
“현관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눈 때문에 길이 막혔어요. 직선으로 오면 일곱 분. 돌아가면 열다섯 분입니다.”
“직선으로 오세요. 문 앞에서 이름을 말하고 대기합니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문을 열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앞세우세요.”
“알겠습니다.”
무전이 끊겼다. 도윤은 방한복을 꺼냈다. 현관까지 가는 길은 안전하지 않았다. 열배터리는 외부 장비를 살릴 뿐 사람을 지켜 주는 방패가 아니었다. 배터리가 식으면 고글의 결빙 방지선도 끊긴다.
그는 현관 옆 보관함에서 두 벌을 꺼내 하나를 바닥에 펼쳤다. 아이용 장비는 없었다. 성인용 외투 안쪽에 보온 담요를 겹치는 수밖에 없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서 낮은 떨림이 느껴졌다. 난방 배관이 아니라 바람이었다. 집 전체가 얼음 속에 묻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도윤은 현관문을 열기 전 관리자 패널을 확인했다. 거주 구역 열손실 4퍼센트. 외부 출입 시 예상 열손실 9퍼센트. 출입문 개방 제한 42초.
“42초면 충분하다.”
문을 열자 바람이 칼날처럼 밀려들었다. 현관 앞 계단은 눈이 아니라 단단한 흰 벽으로 변해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져 손전등을 비춰도 빛이 열 걸음 앞에서 죽었다.
도윤은 열배터리를 켰다. 허리춤에서 미세한 진동이 올라왔다. 잔량 68퍼센트. 외부 예상 체류 9분.
“윤도윤 씨!”
왼쪽에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흰 소용돌이 속에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아이의 목덜미를 감싸고 몸을 낮춘 채 걸었다. 다른 한 사람은 서윤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아이는 붉은 목도리를 턱까지 올렸고 안경에는 얼음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멈춰요!”
도윤이 소리쳤다. 서윤이 즉시 발을 멈췄다. 아이의 무릎이 휘청했다.
“민재부터.”
“문 열어 주세요.”
“내가 말할 때까지 오지 마요.”
도윤은 세 걸음 앞으로 나갔다. 바람이 옆구리를 때렸다. 고글 안쪽이 뿌옇게 변했다. 그는 아이의 열배터리 연결부를 확인하고 외투 지퍼를 끌어올렸다.
“민재야. 내 뒤만 봐. 뛰지 마.”
“식물 있어요?”
“있을 수도 있어.”
“그럼 씨앗은 살릴 수 있겠네요.”
아이는 품 안의 봉투를 두 손으로 눌렀다. 봉투 가장자리에는 눈이 녹은 물이 얼어붙어 있었다.
도윤은 아이의 팔을 잡고 현관 쪽으로 돌렸다. 서윤이 뒤에서 따라왔다.
“성인 장비는 해체하지 마요. 안쪽 격리 구역까지 그대로 들어갑니다.”
“저는 서윤입니다. 응급구조사예요.”
“여기서는 직업보다 동선이 먼저입니다.”
“그럼 동선을 말해요.”
“아이 먼저. 신발은 현관 매트에서 털고 왼쪽 문으로. 오른쪽은 설비 구역이라 손대면 안 됩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42초가 지나기 전에 안으로 들어왔다. 도윤이 문을 닫자 집 안의 바람이 끊겼다. 따뜻함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빠져나가던 열이 멈춘 느낌이었다.
민재는 격리 구역 의자에 앉자마자 기침했다. 서윤이 장갑을 벗으려 하자 도윤이 손을 들었다.
“먼저 체온과 손가락 상태를 확인하세요. 장비는 벽면 걸이에 걸고 바닥 표시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물부터 주세요.”
“검사 후에.”
서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이가 탈수 상태일 수 있어요.”
“그래서 수질 검사를 먼저 합니다. 식용수 배관은 설비 구역과 분리돼 있습니다. 지금 아무 물이나 주면 제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깁니다.”
서윤은 도윤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민재의 손을 잡았다.
“민재야. 조금만 기다리자.”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봉투는 놓지 않았다.
검사 결과는 다행히 심각하지 않았다. 민재의 체온은 35.8도였고 손가락 끝에 초기 동상 흔적이 있었다. 서윤은 아이의 혈류부터 확인했고 도윤은 온수 사용량을 계산해 작은 컵을 내밀었다.
“한 번에 마시지 마세요. 천천히.”
“당신은 원래 사람을 이렇게 들입니까?”
서윤이 물었다.
“원래 이런 상황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고 장부를 펼쳤다. 식용수 86리터. 두 사람이 추가되면 하루 최소 사용량은 9리터. 정화 필터는 71시간. 비상식량은 8일에서 5일로 줄어든다. 난방과 통신을 유지하면 농업 모듈은 멈춰야 한다.
서윤은 장부를 내려다봤다.
“공개할 생각은 있네요.”
“당장은 당신이 읽을 수 있게 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을 더 데려올 수 있는지 판단하려면 같은 숫자를 모두 봐야 해요.”
“사람을 더 데려오자는 말부터 하지 마세요.”
“계단실에 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이 데려오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서윤의 턱이 굳었다. 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누나는 데려오려고 했어요.”
“민재.”
“그 아저씨가 움직일 수 없어서…….”
서윤은 아이의 말을 막지 않았다. 대신 도윤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 바로 구조하러 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신호를 남기고 위치를 기록하겠습니다. 통신이 살아 있으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어요.”
도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거짓말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통신 패널의 채널 3 수신 강도를 기록하자 신호는 약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도윤은 종이에 72시간 표를 그렸다.
첫째 난방과 공기 순환. 둘째 정화와 식용수. 셋째 저전력 통신. 넷째 농업 모듈.
서윤은 농업 모듈이 마지막이라는 순서를 보고 손가락으로 표를 두드렸다.
“농업을 멈추면 사흘 뒤에도 똑같이 비상식량만 먹습니다.”
“지금 트레이는 비어 있습니다.”
“씨앗은 있습니다.”
민재가 봉투를 들어 보였다. 투명한 안쪽에 작은 글씨가 보였다. 도윤은 그것을 읽으려 했지만 민재가 몸으로 가렸다.
“씨앗 이름이 뭐지?”
“몰라요. 할머니가 살리라고 했어요.”
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봉투에는 농업 구역 보관이라는 표식을 붙였다. 당장 심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양액통을 세척하고 배관을 확인해야 했다.
서윤은 자신의 구급 가방을 정리해 격리 구역 선반에 올렸다.
“당신은 모든 걸 혼자 결정할 생각이죠.”
“결정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둘 있습니다.”
“아이까지 셉니까?”
“민재는 아이지만 관찰은 할 수 있어요. 당신이 사람을 숫자로만 세는 동안 저 아이는 씨앗을 기억합니다.”
도윤은 반박하려다 멈췄다. 장부의 숫자와 봉투 속 씨앗은 서로 다른 종류의 생존이었다. 어느 쪽도 내일을 보장하지 못했다.
그 순간 지하실 벽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똑.
세 사람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뒤 같은 소리가 두 번 더 울렸다.
똑. 똑.
도윤은 관리자 패널로 달려갔다. 열교환 구역의 압력은 정상 범위였다. 출입 센서에도 변화가 없었다. 외부 카메라는 눈보라 때문에 하얀 화면만 내보냈다. 배관 진동 기록에는 방금 전 소리가 남지 않았다.
서윤이 물었다.
“설비 소리예요?”
“모릅니다.”
도윤은 처음으로 그 말을 숨기지 않았다.
민재가 봉투를 품에 안았다.
지하 3층의 온도는 여전히 18.2도였다. 그러나 벽 너머의 세 번의 금속음은 따뜻한 곳이 이미 누군가에게 발견됐다는 신호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