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공의 호위기사로 취직했습니다

7화: 호위 수칙 위반입니다
서재 탁자 위에 펼쳐진 양피지에는 붉은 밀랍 잔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에드윈 드 체스터가 철문 너머로 던지고 간 문서였다. 상단에는 황실 자선회 준비 위원회의 문장이 선명했으나 그 아래에 빼곡하게 적힌 문구들은 결코 자선이나 후원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았다.
“‘보호 대상은 후견인의 지시에 따라 지정 장소로 이동한다’...”
클라라는 손가락 끝으로 그 문장을 짚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무리 읽어보아도 저를 한 사람의 귀족 영애로 대하는 문장이 아니에요. 마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가문의 종속물처럼 취급하고 있어요.”
“그 짐작이 맞습니다.”
로잘린은 양피지 여백을 손톱 끝으로 가볍게 긁어내렸다.
“이건 황실 자선회의 정식 양식이 아닙니다. 과거 제국 남부의 몰락 귀족들이 채무 관계에 얽혔을 때 채권자가 채무자의 가족을 합법적으로 구금하기 위해 쓰던 ‘사설 신탁 서식’의 문장 구조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마르센이 경악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사설 신탁 서식이라니요? 공작 전하께서 어찌 그런 천박한 수법의 양식을 황실 문장 아래에 숨겨 들고 오신단 말입니까?”
“상대의 무지를 이용해 합법의 외피를 씌우려는 겁니다. 영애께서 두려움에 질려 이 문서에 서명하거나 순순히 마차에 오르는 순간 공작은 ‘영애가 자발적으로 보호를 요청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로잘린의 서늘한 눈빛이 문서 하단의 위조된 문구를 꿰뚫어 보았다.
게다가 이 문장 형식은 전생의 기억이 아니라 이 몸의 주인이었던 로잘린 폰 아스타의 기억 속에도 똑똑히 남아 있었다.
과거 아스타 백작가에 가문 몰락의 올가미를 씌울 때 황실 감찰관이 들이밀었던 악의적인 강제 관할권 문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닮아 있었다.
‘에드윈 드 체스터... 네놈이 아스타 가문의 몰락 서류를 손에 쥐고 있거나 그때의 배후 세력과 직접 이어져 있다는 뜻인가.’
로잘린은 코트 안쪽에 숨겨 둔 아스타 백작가의 신분패를 지그시 눌렀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오며 심장을 서늘하게 식혀 주었다.
“우리가 가만히 기다리면 공작은 정식 집행관을 매수해 저 문서를 근거로 들이닥칠 겁니다.”
로잘린이 양피지를 접어 마르센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어젯밤 체포한 정원사 보조 토마스의 자백서 그리고 조금 전 정문을 파손하고 무단 침입을 시도한 기사들의 충돌 기록 장부를 챙기십시오.”
클라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실 법무원에 정식으로 고발장을 제출하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제국 형법 제104조에 따르면 무단으로 사유지를 훼손하고 신체적 자유를 위협한 자는 작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관할 치안대에 입건됩니다. 공작이 손을 쓰기 전에 황실 행정원과 중앙 법무원에 동시 접수해야 합니다.”
클라라는 주먹을 꽉 쥐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직접 가겠어요. 마르센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어요. 피해 당사자인 에린 자작가의 영애로서 제가 직접 법무원 서기관에게 진술하겠습니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영애님.”
“로잘린이 곁에 있잖아요.”
클라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로잘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로잘린이 가르쳐 주었잖아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고요. 문 뒤에 숨어서 결과만 기다리는 주군이 되고 싶지 않아요.”
로잘린은 클라라의 맑고 결연한 녹송석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허리를 숙여 경례했다.
“알겠습니다. 영애의 뜻대로 호위하겠습니다.”
그러나 저택의 문을 나서려던 순간 정원 외곽 망루에서 날카로운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베른이 헐레벌떡 복도를 달려와 서재 문을 거칠게 열었다.
“로잘린! 큰일이다! 공작의 마차가 물러난 게 아니었어!”
“무슨 일입니까?”
“정문에서 돌아선 줄 알았던 마차 네 대가 저택 앞 대로변 교차로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마차를 가로로 늘어세워 바리케이드를 치고 기사들이 길목마다 서서 통행을 차단하고 있어!”
로잘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에린 저택으로 통하는 모든 진출입로를 막았다는 뜻입니까?”
“그렇다! 심지어 식자재를 실은 마차와 우편 배달부까지 전부 공작가 기사들이 가로막고 돌려보내고 있다. 저택을 통째로 고립시키려는 속셈이야!”
에드윈 드 체스터의 오만함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철문 돌파가 실패하자 곧바로 저택 주변을 물리적으로 봉쇄하여 사실상의 감금 상태를 만든 것이었다.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여 법무원 접수를 사전에 차단하고 클라라가 굶주림과 고립감에 굴복해 제 발로 기어 나오게 만들려는 저열한 계략이었다.
“정말 비열해요...”
클라라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남의 집 앞길을 제멋대로 틀어막고 사람들을 굶겨서 굴복시키겠다니... 이것이 제국 대공가 후계자가 할 짓인가요?”
“합법적인 절차로 이길 수 없으니 본성을 드러낸 겁니다.”
로잘린은 허리춤의 검대를 단단히 조여 맸다.
“공작은 영애가 겁을 먹고 스스로 문을 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을 막은 장애물은 치워버리면 그만입니다.”
“어떻게 치울 생각이냐? 저쪽은 무장한 기사 여섯에 거대한 방탄 마차들이다. 힘으로 밀어붙이기엔 우리 쪽 경비 인력이 부족해.”
베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밀어붙일 필요 없습니다.”
로잘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도로를 불법 점거한 적재물은 처리 규정에 따라 현장에서 분쇄하면 됩니다.”
로잘린과 클라라는 마르센과 에린 가의 경비들을 대동하고 저택 정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돌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 나가자 교차로 한가운데에 거대한 흑철 장식이 박힌 체스터 공작가의 대형 마차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양옆으로는 보조 마차 세 대가 도로를 빈틈없이 가로막고 있었고 검은 갑옷을 입은 공작가 기사들이 번뜩이는 눈으로 도로를 감시하고 있었다.
인근을 지나가려던 수도 시민들과 상인들은 기사들의 살벌한 기세에 눌려 멀찍이 물러서서 웅성거릴 뿐이었다.
클라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가장 거대한 대형 마차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마차 안의 붉은 벨벳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에드윈 드 체스터가 우아한 손짓으로 와인잔을 흔들며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셨군요, 클라라.”
에드윈의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여유가 가득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대는 결코 내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고요. 며칠만 지나면 저택 안의 우물과 식량이 바닥날 텐데 고집을 부려보아야 그대만 비참해질 뿐입니다.”
“공작님.”
클라라가 한 걸음 나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제국 수도 관리법 제8조에 따르면 공공 도로를 무단으로 봉쇄하여 시민의 통행을 방해하는 행위는 엄중한 불법입니다! 당장 마차를 치우고 길을 비키십시오!”
에드윈은 낮게 키득거리며 비웃었다.
“불법이라니요. 저는 단지 황실 자선회 준비 위원회의 귀빈을 안전하게 호송하기 위해 잠시 대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가 순순히 이 마차에 오르면 이 번거로운 통제도 즉시 끝날 텐데요.”
그는 마차 문을 툭툭 치며 마부에게 명령했다.
“영애께서 타시기 편하도록 마차를 정문 바로 앞까지 바짝 붙여라. 거절하면 옷자락을 잡아서라도 안으로 모셔라.”
“존명!”
마부가 채찍을 높이 치켜들었다.
히이잉!
거대한 흑마 네 마리가 거친 숨을 내뿜으며 굵은 발굽으로 돌바닥을 내리찍었다.
무거운 강철 차륜이 덜컹거리며 클라라를 향해 위협적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집어삼킬 듯이 돌진해 오는 거대한 마차의 위압감에 에린 가의 경비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물러서십시오!”
마부가 거칠게 소리치며 채찍을 휘둘렀다.
마차의 육중한 차체가 클라라의 코앞까지 들이닥치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번쩍!
허공을 가르는 서늘한 은빛 궤적이 망막을 때렸다.
바람조차 베어버릴 듯한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로잘린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검기가 정확하게 마차의 중심부로 내리꽂혔다.
서걱!
쇠가 잘려 나가는 소리는 둔탁하지 않았다. 마치 잘 익은 과일을 베어내듯 지극히 매끄럽고 날카로운 단절음이 고요한 대로변을 갈랐다.
로잘린의 검날은 말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 마부에게 닿지도 않았다.
오직 마차 본체를 지탱하던 육중한 강철 차축과 전면부의 거대한 우측 바퀴만을 정확하게 두 동강 내버렸다.
콰아아앙!
중심을 잃은 거대한 공작 마차가 비명 같은 굉음을 지르며 오른쪽으로 처참하게 기울어졌다.
부러진 차축에서 불꽃이 튀었고 거대한 차륜이 허공으로 튕겨 나가 돌바닥에 요란하게 나뒹굴었다.
“크악!”
마차 안에 우아하게 앉아 있던 에드윈은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들고 있던 와인잔이 깨지며 붉은 술이 그의 값비싼 비단 옷과 얼굴을 흉측하게 적셨다.
정적.
대로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일시에 멎었다.
웅성거리던 시민들도, 길을 막아서던 공작가 기사들도, 뒤에서 지켜보던 마르센과 베른마저 숨을 멈춘 채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제국 최고 권력가인 체스터 공작가의 상징과도 같던 거대한 마차가 차축이 잘려 나간 채 길바닥에 쓰레기처럼 처박혀 있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잔해 위로 로잘린이 가볍게 착지했다.
그녀는 검신에 묻은 보이지 않는 먼지를 털어내듯 검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부서진 마차 문을 걷어차며 기어 나온 에드윈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붉은 와인으로 뒤범벅이 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로잘린을 노려보았다.
“이... 미친년이...!”
에드윈의 목소리가 극도의 분노와 수치심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감히 대공가의 마차를 베어? 네년이 정녕 제정신이 아니구나! 황실의 후원을 받는 공작의 마차를 파괴한 것은 황실에 대한 반역이자 능멸이다!”
로잘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검끝을 바닥에 똑바로 내리꽂으며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선포했다.
“제국 호위 기사법 제4조 및 도로 보안 수칙 제7조.”
로잘린의 서늘한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에드윈의 일그러진 얼굴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주군의 자유로운 보행을 가로막고 무단으로 위협을 가하는 모든 적재물은 즉시 물리적으로 차단 및 파쇄할 수 있습니다.”
“적재물이라고...?”
“호위 수칙 위반입니다, 공작님.”
로잘린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주군의 허락 없이 굴러가는 바퀴는 도로 위에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 오만하고도 완벽한 논리에 에드윈은 숨이 턱 막힌 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평생을 귀족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해 온 공작에게 이토록 처절한 모욕과 수치를 안겨준 자는 없었다.
가면처럼 두르고 있던 신사의 위선이 산산조각 나며 에드윈의 눈에 살의가 번뜩였다.
“기사단!”
에드윈이 피를 토하듯 비명을 질렀다.
“전원 검을 뽑아라! 저 건방진 천것의 사지를 찢어 길바닥에 던져버려라!”
챙! 챙! 챙!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뒤편에 도열해 있던 여섯 명의 체스터 정예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서늘한 살기와 시퍼런 도검의 번뜩임이 에린 자작가 앞마당을 순식간에 전장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기사들이 살기등등한 기세로 쇄도해 오는 절체절명의 순간, 로잘린은 조금의 당황도 없이 허리춤에서 낡은 단검 하나를 마저 뽑아 들었다.
양손에 검을 쥔 로잘린의 눈빛이 북부의 삭풍보다 차갑게 빛났다.
“1분이면 충분하겠군요.”
그녀의 입가에 피어난 서늘한 미소와 함께 호위기사의 진짜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