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남편을 위한 거짓 세계

5화: 열리지 않는 문
발소리가 문 앞 카펫 위에서 뚝 멎었다.
엘리사는 숨을 죽였다. 손바닥에 묻어 있던 붉은 마력 부스러기가 서늘한 냉기를 뿜으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가슴을 쥐어짜던 기침을 삼키며 가운 자락으로 손을 닦아냈다.
거울 속에 비쳤던 처참한 몰골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뼈마디가 도드라질 만큼 야위고 핏기가 말라붙은 영혼의 얼굴. 시한부 남편을 살리기 위해 마도구를 발동했다는 믿음은 거대한 공포로 뒤흔들리고 있었다.
끼익.
침실 문이 열렸다.
"엘리사."
어둠이 내린 방 안으로 은발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은제 촛대를 든 카시안이었다. 촛불이 그의 붉은 눈동자에 닿아 일렁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 피를 쏟아내던 남자의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단한 기사의 체구와 맑은 혈색에는 생명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불도 켜지 않고 무얼 하고 있었어."
카시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다가왔다. 촛대를 화장대 위에 내려놓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엘리사는 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화장대 거울과 굳어 있는 어깨를 찰나에 훑고 지나가는 것을.
"몸이 조금 으슬으슬해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엘리사는 입술을 떨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카시안의 시선이 메마른 입술 위로 서늘하게 머물렀다.
그는 엘리사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얼어붙은 손을 감싸 쥐었다.
"손이 또 이렇게 차가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밑으로 감출 수 없는 초조함이 번져 나왔다. 카시안은 엘리사의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 입을 맞추며 온기를 불어넣었다.
따뜻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강인한 생명의 열기였다. 하지만 그 온기가 피부에 닿을수록 등줄기에는 얼음장 같은 오한이 돋았다.
‘이 남자는 병자가 아니야.’
거울 속 앙상했던 자신과 눈앞의 건강한 카시안이 잔혹하게 겹쳐졌다. 중심 주체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세계를 유지한다는 양피지의 반전 술식. 그렇다면 이 남자의 온기는 어디서 흘러나온 것이란 말인가.
"약차는 다 마셨어?"
카시안이 빈 잔이 놓인 탁자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네. 남김없이 마셨어요."
"착하지."
카시안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엘리사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영혼을 옭아매는 무거운 마력이 전신을 짓눌렀다.
"이곳에서는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아도 돼. 그러니 엘리사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날 위해서라도 네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아."
다정한 맹세의 형식을 띤 완벽한 명령이었다.
카시안은 엘리사를 안아 침대로 옮기고 이불을 턱 밑까지 덮어 주었다.
"잠시 서재에서 영지 장부를 살펴보고 올게. 푹 자고 있어."
카시안은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돌아섰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까지 엘리사는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덜컥.
자물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엘리사는 그제야 눈을 떴다.
더는 이 침대에 누워 그의 다정한 독을 받아먹을 수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거울 속의 그 유령처럼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소멸할 것이 분명했다.
엘리사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벽을 짚고 버텼다.
‘나가야 해.’
이 가상 세계가 누구의 의지로 유지되고 있든 영지 밖으로 나가는 관문은 존재할 터였다. 현실의 제국과 수도로 이어지는 길을 확인해야 했다. 자신의 진짜 육체가 어디에 누워 있는지 남편이 감추고 있는 현실의 비극이 무엇인지 직접 보아야 했다.
엘리사는 짙은 모직 망토를 걸치고 품속에 양피지 조각을 단단히 찔러 넣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차가운 복도로 나섰다.
깊은 밤의 공작 저택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통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달빛은 푸르스름했으나 그 빛에는 아무런 그림자도 생기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빚어낸 가짜 달빛이었다.
엘리사는 벽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모퉁이를 돌았을 때 기둥 옆에 선 시녀 마리안이 보였다. 촛대를 든 채 똑바로 서 있었지만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리안……?"
엘리사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마리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고 목소리에 반응하지도 않았다. 태엽이 풀려 멈춰 버린 밀랍 인형 같았다.
엘리사는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물러섰다.
낮 동안 정해진 대사를 읊조리던 하인들은 밤이 되자 자의식을 잃고 정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 세계의 주민들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설계한 무대 장치에 불과했다.
엘리사는 1층 서쪽 문을 밀고 정원으로 빠져나왔다.
밤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정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발밑의 잔디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는 영지 외곽으로 이어지는 북쪽 숲길을 향해 서둘렀다.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두통이 머리를 흔들었다.
"큭……."
엘리사는 나무 둥치를 짚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몸 안의 마력을 끌어올려 신체를 가볍게 하려 했으나 심장에 통증이 번지며 손끝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마력을 끌어다 쓸수록 영혼의 붕괴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야 해.’
그때였다.
어두운 밤안개 속에서 서늘한 쇠붙이 소리가 울렸다.
챙.
엘리사는 굳은 채 고개를 들었다.
숲길 입구에 회색 외투를 걸치고 장검을 찬 호위기사 루시안이 서 있었다.
루시안의 눈빛은 낮보다 훨씬 더 깊은 고뇌와 비통함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멈춰 버린 시녀들과 달리 그는 온전한 생명의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님."
루시안이 낮게 불렀다.
엘리사는 망토 자락을 쥐었다.
"루시안 경. 나를 막으러 온 건가요?"
루시안은 검자루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마님이 오실 곳이 아닙니다."
"돌아가지 않아요."
엘리사가 한 걸음 다가섰다. 자수정빛 눈동자에 서늘한 결의가 타올랐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거울 속 내 모습을 직접 보라고. 나는 보았어요. 죽어가고 있는 건 카시안이 아니라 나라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
루시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기사는 차마 엘리사의 핼쑥한 뺨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다면 아셨을 텐데요. 마님의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그래서 나가야 해요."
엘리사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아야겠어요. 카시안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해요. 길을 비켜줘요 루시안."
루시안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돋아 있었다.
"저는 주군께 영혼의 충성을 맹세한 기사입니다. 주군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루시안의 손이 검자루를 쥐었다. 엘리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루시안은 천천히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그는 숲길을 열어젖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맹약에 묶인 저조차 마님을 벨 수는 없습니다. 가십시오. 그러나 마님께서 마주할 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잔혹할 것입니다."
"루시안……."
"관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님이 돌아갈 현실 따위는 애초에 그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루시안의 서글픈 경고를 뒤로한 채 엘리사는 숲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안개를 뚫고 달린 끝에 마침내 영지의 북쪽 경계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국 수도로 통하는 대로와 거대한 철제 정문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그러나 숲길을 빠져나온 엘리사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이게 뭐야?"
엘리사의 목소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흩어졌다.
철제 정문은 존재했다. 장미 덩굴 문양이 세공된 웅장한 아치형 문이었다.
하지만 정문 너머의 풍경은 세상의 끝이었다.
푸른 숲도 흙길도 마차가 오가는 대로도 없었다. 정문의 문턱 바로 아래에서 대지가 칼로 자른 듯 뚝 끊겨 있었다. 그 너머에는 끝없는 허공과 소용돌이치는 칠흑 같은 암흑만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암흑과 정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차원의 장벽.
투명한 유리처럼 보이지만 핏빛에 가까운 진홍색 마력 룬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압도적인 결계였다.
치지직.
벽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파동이 공기를 태우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관문이…… 막혀 있어?"
엘리사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장벽에 새겨진 마법 룬들을 올려다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인위적으로 세워진 차원 결계였다. 수백만 개의 연산식이 맞물려 내부의 존재가 단 한 발자국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영지 전체를 밀폐한 거대한 새장이었다.
그리고 그 룬 중심에 찍힌 지배자의 마력 인장.
‘카시안…….’
틀림없는 카시안의 마력이었다. 제국 최연소 8클래스 대마법사 카시안 데 첼스터만이 구현할 수 있는 절대적인 구속식이었다.
엘리사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자신이 만든 세계라고 믿었다. 카시안을 살리기 위해 소울 스피어를 열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왜 이 세계의 경계선에 카시안의 절대 결계가 세워져 있단 말인가. 왜 그가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이토록 철저하게 찢어발겨 놓았단 말인가.
"거짓말이야……."
엘리사는 이를 악물며 손을 뻗었다.
"열려야 해. 내가 만든 마도구라면 내 마력에 반응해야 해!"
그녀는 로렌 가문의 고대 해제 마법을 끌어올렸다. 손끝에서 맑은 자수정빛 마력이 피어올라 진홍색 차원 벽에 닿았다.
그 찰나였다.
쾅!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차원 벽이 맹렬하게 요동쳤다.
진홍색 룬들이 일제히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침입자의 마력을 튕겨냈다.
파앙!
압도적인 마력 역류가 손끝을 타고 심장으로 들이닥쳤다.
"아악!"
엘리사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 나갔다. 거친 바닥을 구르며 자갈밭에 등을 세게 부딪쳤다.
"쿨럭! 쿨럭……!"
또다시 찢어지는 기침이 터져 나왔다. 입술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붉은 마력 부스러기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전신의 마력 회로가 불타는 듯한 격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차원 벽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채 여전히 오만한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열리지 않는다.
이 문은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결코 열릴 수 없도록 설계된 절대의 감옥이었다.
엘리사는 바닥을 짚으며 피눈물을 삼켰다.
그때였다.
스스스.
짙은 밤안개 속에서 차분하고 서늘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흙을 밟는 일정한 리듬.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주변 공기가 얼어붙듯 가라앉았다.
엘리사는 고개를 들었다.
붉은 차원 벽의 안광을 등지고 서 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카시안이었다.
검은 벨벳 코트를 걸친 그는 은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서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늘 엘리사 앞에서 짓던 병약하고 유순한 미소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서늘하고 잔혹한 지배자의 얼굴만이 존재했다.
"엘리사."
카시안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다정하게 속삭이던 음성은 지독할 만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했을 텐데."
카시안이 천천히 다가왔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대지가 미세하게 울리며 그의 절대적인 권능을 증명했다.
"이 야심한 밤에 어디를 가려던 거야."
엘리사는 차가운 흙바닥을 짚으며 물러섰다.
하지만 등 뒤에는 거대한 차원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카시안은 엘리사의 앞에 멈추어 섰다. 붉은 마력 가루가 흩날리는 그녀의 손과 피폐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광기 어린 비통함이 스쳤다.
"너는…… 누구야?"
엘리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내 남편은 어디로 가고 왜 당신이 이런 결계를 세워 나를 가둔 거지? 이 세계는 대체 뭐야, 카시안!"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쓰러진 엘리사를 단숨에 끌어안아 올렸다.
"아……!"
엘리사가 버둥거리려 했으나 카시안의 단단한 팔은 강철 족쇄처럼 허리와 등을 결박했다. 카시안은 두터운 코트로 엘리사의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춥잖아."
카시안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숨결은 지독하게 다정했으나 뼈마디를 시리게 만들었다.
"바깥은 위험해, 엘리사. 저 너머에는 널 해치려는 잔인한 고통뿐이야. 너를 찢어발기려는 지옥밖에 없어."
"거짓말하지 마! 날 밖으로 보내줘!"
엘리사가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나 카시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부서질 듯 강하게 끌어안았다.
"돌아갈 곳 따위는 없어. 넌 오직 내 곁에만 있어야 해."
카시안의 붉은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엘리사의 차가운 뺨을 적셨다.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러나 그 눈물과 함께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비틀린 집착이었다.
"영원히 이곳에서 나와 함께 살아야 해. 내가 널 그렇게 둘 거야."
카시안은 엘리사를 품에 안은 채 뒤로 돌아섰다.
등 뒤에서 진홍색 차원 벽이 기괴한 빛을 내뿜으며 닫힌 세계의 절망을 선언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카시안의 품에 안겨 저택으로 끌려가며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물리적인 관문으로는 나갈 수 없다.
이 감옥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카시안의 비밀 서재 깊은 곳에 숨겨진 소울 스피어의 핵심 서식을 파헤쳐 세계의 제어권을 빼앗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