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남편을 위한 거짓 세계

6화: 비밀 서재
카시안은 침실에 들어와서도 엘리사를 내려놓지 않았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고 은색 열쇠가 침대 옆 탁자에 놓였다. 엘리사는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손을 좀 놓아 주세요."
카시안의 턱이 굳었다.
"옷을 벗어야 하잖아요. 흙이 묻었어요."
한참 뒤에야 그녀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카시안은 망토를 벗겨 의자 등받이에 걸고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치맛자락에 붙은 자갈 하나가 떨어져 카펫 위를 굴렀다.
그는 그 자갈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다시는 그런 데 가지 마."
엘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릎 위의 손을 그가 가져가 젖은 수건으로 닦았다. 자갈밭을 짚었던 손바닥이 쓰라렸다. 다정한 손길을 뿌리치려 하자 힘없는 손목부터 떨렸다.
"아프면 내게 말해야지."
"말하면 달라지나요?"
수건이 멎었다. 카시안은 그녀의 손바닥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달라지게 할게. 네가 아프지 않도록."
그의 은발 사이로 드러난 귀가 희었다. 엘리사는 자신을 감싸 안고 흘리던 눈물의 온도를 기억했다. 저 두려움까지 꾸며 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믿어야 할지 더 알 수 없었다.
카시안이 탁자의 물잔을 집어 들었다.
"마셔. 목이 말랐을 거야."
엘리사는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약차의 달고 쓴 향은 없었다. 잔을 내려놓은 뒤에도 그의 손은 그녀의 손목을 따라왔다.
"지금은 곁에 있어 주세요."
그녀의 말을 듣자 카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
그는 의자를 끌어 침대 곁에 앉았다. 엘리사는 이불 속에서 눈을 감았다. 북쪽 관문으로 달려갈 때 품에 넣었던 양피지 조각은 망토 안섶에 있었다. 카시안이 흙을 털어 걸어 둔 망토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의 손이 느슨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두 번이나 엘리사는 눈꺼풀을 조금 들었다가 다시 감았다. 카시안은 고개가 기울어질 때마다 몸을 바로 세웠다. 세 번째에는 의자에 기대어 고른 숨을 내쉬었다.
눈꺼풀 아래 붉은 눈은 보이지 않았다. 잡혀 있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엘리사는 그의 숨이 같은 간격으로 돌아오는 것을 한동안 더 들었다.
얼마나 깊이 잠든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엘리사는 손가락 하나씩 그의 손에서 뺐다. 마지막에 엄지가 빠져나올 때 그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그대로 멈추었다.
그의 눈꺼풀은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사는 손을 뺀 자리에 이불 끝을 밀어 넣었다. 천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그 손 안에 다시 머물면 따뜻할 것이었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으면 더는 차가운 벽을 볼 필요도 없었다.
엘리사는 손을 거두었다.
자신이 어디서부터 닳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안겨 있을 수는 없었다.
망토에서 파편을 꺼내 소매에 넣었다. 탁자의 열쇠로 잠금을 풀고 다시 같은 자리에 내려놓았다. 문을 좁게 열어 몸을 빼내는 동안 손목의 온기가 빠르게 식었다.
서쪽 복도에는 마리안이 서 있었다.
촛대를 든 팔도 초점 없는 눈동자도 그대로였다. 엘리사는 시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발밑의 카펫이 끝나는 자리부터 벽을 짚으며 걸었다.
무릎이 굽혀질 때마다 자갈밭에 부딪친 등이 당겼다. 몸을 가볍게 하는 마법을 떠올리자 손끝에 푸른빛이 맺혔다. 그녀는 곧바로 마력을 가라앉혔다.
복도 끝은 매끈한 벽이었다.
엘리사는 손을 대기 전에 양피지 파편부터 꺼냈다. 찢어진 가장자리를 따라 은빛 선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 서재에 들어갔을 때 문틈에서 흘러나오던 냉기를 기억했다. 벽 아래쪽에 손등을 가까이 대자 가느다란 찬 기류가 느껴졌다.
엘리사는 무릎을 굽혔다. 대리석의 무늬라고 생각했던 세로선이 아주 약하게 은빛을 띠고 있었다. 파편의 선과 같은 색이었다.
선 아래쪽에 세 번 감긴 작은 매듭이 보였다. 로렌의 기초 접속식이었다. 그 매듭은 마력을 밀어 넣는 쪽이 아니라 손바닥을 대어 결을 확인하는 쪽으로 열려 있었다.
해제식을 짜려던 손을 멈추었다.
관문의 붉은 결계는 그녀의 마력을 튕겨 냈다. 그런데 이 선은 파편을 가까이 가져갈 때마다 조금씩 밝아졌다. 억지로 뜯을 필요가 없는 틈인지도 몰랐다.
종이를 소매에 넣고 손바닥을 벽에 대었다.
손금 사이로 차가운 마력이 스며들었다. 엘리사는 힘을 보태지 않고 그 흐름을 기다렸다. 손목이 저려 왔다. 참지 못하고 손을 떼려는 순간 은빛 선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너비였다.
문은 그녀를 들여보냈다. 그러나 그 안의 것을 고칠 권한까지 내주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엘리사는 두 어깨를 좁혀 틈을 통과했다.
서재 바닥의 마법진은 여전히 맥동하고 있었다.
푸른 은빛이 높은 서가 밑까지 밀려갔다가 돌아왔다. 엘리사는 바닥을 밟을 때마다 신발 끝이 어느 선 위에 놓이는지 살폈다. 중앙으로 뻗은 굵은 선은 피했다.
책상 위에는 양피지가 쌓여 있었다. 그녀가 뜯었던 종이는 맨 아래에 끼어 있었다. 오른쪽 모서리에 난 불규칙한 자국을 찾아 파편을 가져다 댔다.
찢어진 두 면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끊겼던 은빛 선이 이어졌다. 엘리사는 그 선을 끝까지 좇았다. 가운데의 반전 룬을 지난 선이 종이 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생명력을 끌어당기는 경로였다.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파편을 내려놓았다.
종이가 말리면서 선이 어두워졌다. 다시 손가락으로 누르자 밝아졌다. 엘리사의 손끝에서 따끔한 감각이 일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뺐다.
무엇을 공급하는 선인지는 이미 알았다. 이제 그것을 누가 움직이는지 읽어야 했다.
책상 위에 작은 은추가 달린 책갈피가 있었다. 엘리사는 그것으로 말린 모서리를 눌렀다. 끊긴 선이 이어져도 손목이 저리지는 않았다. 다만 종이가 납작해져 바닥에서 올라오는 빛에 기호들이 또렷해졌다.
그녀는 책상 옆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었다.
종이의 흡인 룬과 같은 모양이 마법진 외곽에도 있었다. 그 선은 중앙으로 들어갔다. 바로 옆에 가느다란 선 하나가 더 있었다. 한 줄이라고 생각했던 두 획 사이에는 머리카락만 한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엘리사는 눈높이를 낮췄다.
마법진이 밝아지자 굵은 선은 안쪽으로 빛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가느다란 선의 빛은 반대쪽으로 흘렀다. 중앙에서 나와 외곽의 네 갈래 고리를 차례대로 지나갔다.
흡인식에 딸린 안정화 선이라면 마지막 고리가 안쪽을 향해야 했다. 이 선의 끝은 바깥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녀는 다음 맥동을 기다렸다. 첫 고리의 빛이 두 번째로 넘어가고 세 번째를 지나 마지막 고리에 닿았다. 그 뒤에야 서가 밑으로 은빛이 퍼졌다.
엘리사는 한 번 더 순서를 확인했다. 바닥의 빛을 켜는 것은 안으로 흘러드는 굵은 선이 아니었다. 가는 선의 끝에서 먼저 반응이 일어났다.
"같은 선이 아니었어……."
엘리사는 숨에 묻힐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마력을 내는 자가 곧 세계를 움직이는 자라고 믿었다. 자신이 소울 스피어를 열었고 자신의 힘으로 카시안이 쉴 영지를 만들었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생명력이 빠져나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조차 자신이 무리해서 그를 지탱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력을 받아들이는 길과 명령을 내보내는 길은 달랐다.
마력을 내준다는 이유로 이곳을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소울 스피어에는 그 두 역할이 갈라져 있지 않았다. 누가 어느 지점에서 갈라 놓았을까.
엘리사는 책상 위의 흑연 필기봉을 집어 들었다. 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양피지 옆에 폈다. 흔들리는 손으로 먼저 반전 룬을 그린 뒤 나란히 달리는 두 선과 네 개의 고리를 옮겼다.
필기봉 끝이 천의 올에 걸려 부러졌다.
엘리사는 부러진 끝을 주워 더 짧게 쥐었다. 처음 그린 선이 번졌다. 그녀는 손수건을 뒤집어 고리의 방향만 다시 그렸다.
중앙의 봉인 아래에서는 두 길이 어디로 이어질까.
바닥 한가운데는 붉은 문양으로 덮여 있었다. 관문에서 본 인장과 닮은 굽은 획이 겹겹이 포개졌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선은 보였지만 선이 만나는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양피지도 바로 그 부분에서 겹쳐 접혀 있었다. 접힌 가장자리에 은빛 고정선이 걸려 책상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의 붉은 봉인과 닿는 선이었다.
엘리사는 은추를 옆으로 옮겼다. 종이를 손톱 끝으로 아주 조금 밀었다. 접힌 자리 아래의 기호 하나가 드러나려 했다.
탁.
바닥의 붉은 획 하나가 소리를 냈다.
은빛이 꺼졌다. 대신 붉은빛이 외곽으로 달려가 문틈 아래까지 번졌다. 엘리사는 즉시 양피지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가슴이 조여 들었다. 삼키려던 기침이 목 안을 긁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려다 도면을 보고 손등으로 입을 눌렀다.
차가운 붉은 부스러기가 손등에 묻었다.
엘리사가 읽은 것은 중앙에 연결된 외곽의 선들뿐이었다. 두 길이 만나는 곳도 명령선이 누구의 마력에 응답하는지도 봉인에 가려져 있었다.
카시안의 인장은 알아보았다. 그렇다고 그가 어느 자리를 차지한 것인지까지 읽어 낸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결계를 깨려면 바로 그 차이를 알아야 했다.
그녀가 가진 것은 두 갈래 길의 그림뿐이었다.
엘리사는 손수건을 접었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선이 접힌 천 안으로 숨었다.
책갈피를 원래 놓였던 책 위에 올려놓았다.
부러진 흑연 끝을 필기봉 옆에 두었다. 손이 떨려 책갈피의 추를 두 번이나 놓쳤다. 처음에는 기억했던 각도대로 놓으려 애썼지만 복도에서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대로 물러났다.
붉은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닥에서 다시 은빛이 퍼지고 있었다.
엘리사는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뜯어 온 파편과 손수건을 소매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바닥의 굵은 선을 돌아 문으로 향했다. 무릎이 한 번 꺾였지만 책상 끝을 붙들고 소리를 삼켰다.
벽의 틈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엘리사는 그 틈으로 몸을 빼냈다. 빠져나온 뒤 은빛 가장자리에 다시 손바닥을 댔다. 테두리가 가늘어지는 것을 보고 손을 떼자 틈은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돌아갔다.
복도에는 어둠과 정지한 촛불만 있었다.
침실까지 가면 카시안의 손을 다시 잡아야 했다. 손등에 남은 붉은 가루를 지우고 잠든 얼굴을 해야 했다. 그것이 얼마나 더 가능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종이를 보지 않고도 두 선을 그릴 수 있었다.
내어 주는 힘과 돌려받는 명령.
둘을 같은 것으로 믿게 만든 지점부터 살펴야 했다. 카시안이 부술 수 없는 문을 세웠다면 그녀는 문을 움직이는 선을 찾아야 했다.
엘리사가 모퉁이를 돌았다.
회색 외투를 입은 기사가 앞을 막았다.
루시안이었다. 뽑지 않은 검의 금속 장식이 촛불을 받아 번쩍였다. 그가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엘리사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소매 안쪽에서 접힌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천에 묻은 흑연이 땀에 젖은 손가락으로 번졌다. 소매를 더 내려 그 손을 가렸다.
루시안의 시선이 바로 그 손에 닿았다.
"마님."
그는 경례하지 않았다. 길을 비켜 주지도 않았다.
"손을 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