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남편을 위한 거짓 세계

4화: 시들어가는 아내
침실 문이 닫히자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온기가 일순간에 빠져나갔다.
엘리사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조금 전까지 카시안이 감싸 쥐고 있던 손등에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정원에서 돌아오는 내내 남편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깃털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억센 그 손길은 지극한 애정처럼 보였지만 도망치지 못하게 옭아매는 족쇄에 가까웠다.
‘서재에 들러 잠시 확인할 것이 있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누워 쉬고 있어.’
이마에 닿았던 그의 다정한 입맞춤이 아직도 피부에 남아 있었다.
엘리사는 떨리는 숨을 들이쉬며 옷소매 안섶을 더듬었다. 손끝에 거친 종이의 감촉이 닿았다. 어젯밤 비밀 서재의 중심 마법진 옆에서 뜯어낸 양피지 조각이었다.
그녀는 문 쪽의 기척을 살핀 뒤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날카롭고 유려하게 뻗은 서체. 의심할 여지 없는 카시안의 필적이었다. 엘리사는 손가락으로 양피지에 새겨진 은빛 기호들을 하나씩 짚어 내려갔다.
그녀는 고대 마법 명문 로렌 가문의 직계였다. 아무리 복잡한 서식이라도 근본적인 술식의 지향점만큼은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이건…… 치유와 보호의 마법이 아니야.’
엘리사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소울 스피어의 핵심은 시한부 환자의 지친 영혼을 감싸 안는 결계였다. 술자의 마력으로 평온한 공간을 구현하고 환자의 정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돕는 자비의 마도구였다.
하지만 카시안의 필체로 적힌 공식은 전혀 다른 법칙을 가리키고 있었다.
공식 중심에는 거대한 반전 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외부의 마력으로 내부의 영혼을 구원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공간 중심에 자리한 핵심 주체의 생명력을 강제로 끌어당겨 세계 전체의 동력원으로 삼는 흡인 술식이었다.
‘핵심 주체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세계를 유지한다고?’
엘리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생명력을 내주고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당연히 이 세계를 연 자신이어야 했다. 자신이 술자이고 카시안은 보호받아야 할 환자였으니까.
그런데 왜 이 끔찍한 구속식을 설계한 장본인이 카시안이란 말인가.
‘내가 이 마도구를 어디서 어떻게 완성했더라……?’
엘리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황궁의 시의관들이 카시안의 시한부를 선고하던 날. 피를 토하며 쓰러진 남편의 차가운 손. 그를 살리기 위해 가문의 지하 금고에서 고대 마도구 소울 스피어를 찾아내던 순간.
거기까지는 선명했다.
하지만 그 뒤의 기억들이 기괴할 만큼 흐릿했다.
소울 스피어의 마법진을 어디서 그렸는지 누구와 대화했는지 수도를 떠나 이곳으로 들어오기 직전 보름간의 시간들이 마치 짙은 안갯속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기억나지 않는 거지?’
엘리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억지로 기억의 장막을 들추려 하자 머릿속 깊은 곳에서 쇠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두통이 터져 나왔다.
"큭……!"
시야가 순식간에 하얗게 탈색되었다.
엘리사는 비틀거리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손끝이 얼어붙듯 차가워지더니 손가락 마디마디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손에 쥐고 있던 양피지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찰나의 순간 손가락 끝이 푸르스름하게 투명해졌다가 돌아오는 기괴한 광경이 보였다. 정원에서 발밑 그림자에 일렁이던 그 푸른 균열의 빛이었다.
덜컥.
그때 침실 문이 열렸다.
엘리사는 서둘러 바닥의 종이 조각을 카펫 아래로 밀어 넣었다. 가까스로 소파에 단정히 앉았을 때 은쟁반을 든 카시안이 들어섰다.
"엘리사?"
카시안의 시선이 닿자마자 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일렁였다.
그는 은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단숨에 다가와 엘리사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커다란 손이 엘리사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손은 또 왜 이리 차갑고."
카시안의 목소리는 염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섬뜩할 정도의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그의 손바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강인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피를 토해내며 손가락 하나 가누지 못하던 남자의 온기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맥박은 힘차게 뛰고 있었고 피부에는 건강한 핏기가 돌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엘리사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카시안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옷소매를 걷어 맥박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살결을 파고들 듯 강하게 눌렀다.
"맥이 너무 가늘어. 식은땀도 흘리고 있고."
카시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억눌린 불안이 번뜩였다.
"내가 쉬고 있으라고 했잖아. 왜 내 말을 듣지 않고 무리하는 거야?"
"카시안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이에요."
"거짓말."
낮게 으르렁거리는 음성이었다.
카시안은 탁자 위의 은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잔에서는 검붉은 약차가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쌉싸름하면서도 달큼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이걸 마셔. 기력을 북돋워 줄 약이야."
카시안이 직접 찻잔을 그녀의 입술에 대어 주었다.
엘리사는 그 찻잔을 바라보았다. 향은 그윽했지만 목구멍 뒤편을 마비시키는 기이한 잔향이 숨어 있었다. 이 차를 마실 때마다 머릿속의 안개는 더 짙어졌고 몸은 나른하게 가라앉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었다.
"제가 마실게요."
"내가 먹여 줄게. 흘리면 안 되니까."
카시안은 찻잔을 기울였다. 엘리사는 거부하지 못하고 따뜻한 액체를 삼켰다. 쓰고 단 약물이 넘어가자 카시안은 그녀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삼키는지 확인하려는 집요한 시선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워내자 카시안의 굳었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착하지 내 사랑."
카시안이 엄지손가락으로 엘리사의 입술 끝을 닦아냈다. 그 다정한 손길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엘리사는 차오르는 나른함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시안."
"응 엘리사."
"우리…… 수도를 떠나기 전 일 기억나요? 황궁의 시의관들이 당신의 병세를 두고 뭐라고 했었는지…… 이상하게 그 무렵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카시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붉은 눈동자 위로 서늘한 장막이 드리워졌다. 그는 순식간에 다정한 가면을 고쳐 쓰며 엘리사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런 끔찍한 기억은 떠올릴 필요 없어. 황궁의 의원들은 무능한 작자들이었어. 그자들의 말은 네가 기억할 가치조차 없어. 넌 그저 이곳에서 내 곁에 머물며 평온하기만 하면 돼. 아무것도 기억하지 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카시안은 엘리사를 품에 안았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등을 강하게 감싸 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조여오는 포옹 속에서 남편의 심장 소리가 울렸다.
쿵 쿵 쿵.
너무나 건강하고 웅장한 박동이었다. 시한부 환자의 심장 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강건한 박동 소리를 듣는 동안 엘리사 자신의 가슴속 생명력이 조금씩 갉아 먹히는 듯한 오한이 들었다.
"잠시 눈을 붙여. 약기운이 돌면 편안해질 거야."
카시안이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는 엘리사가 눈을 감을 때까지 곁을 지키다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엘리사는 번쩍 눈을 떴다.
약차가 신경을 마비시키려 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잠들어 버리면 영영 진실을 깨닫지 못할 것 같았다.
엘리사는 입술을 깨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딛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그녀는 숨겨둔 양피지 조각을 다시 주워 품속에 넣었다. 차가운 바람을 쐬지 않으면 질식할 것만 같았다.
엘리사는 문을 열고 조용히 복도로 나섰다.
해질녘의 에델바이스 저택은 붉은 노을빛에 흠뻑 젖어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하늘은 지나치게 선명한 주홍빛이었다. 복도를 오가는 하인들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기계적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누구도 엘리사를 제지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텅 빈 눈동자는 인형 같았다.
엘리사는 그들을 피해 저택 서쪽의 돌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 난간 너머로 서늘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오자 약기운으로 몽롱하던 정신이 간신히 깨어났다.
"……마님."
등 뒤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색 머리의 호위기사 루시안이었다. 허리에 검을 찬 채 서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복도의 하인들과 명백히 달랐다. 깊은 고뇌와 흔들림 그리고 감출 수 없는 죄책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엘리사는 난간을 짚으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 경."
"바람이 찹니다.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루시안의 어조는 단정했으나 시선은 엘리사의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손가락을 피하지 못했다.
엘리사는 한 걸음 다가섰다.
"기사님. 당신은 저 하인들과 다르군요. 마리안도 정원사도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똑같은 대답만 반복해요. 하지만 당신은 어젯밤 시간의 초침이 거꾸로 흐를 때도 두려워했고 내게 경고했죠. 살아 있는 사람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어요."
루시안은 검자루를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저는 주군께 맹세를 바친 기사입니다."
"그 주군이 누구인가요?"
엘리사가 되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카시안은 지혜롭고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이상해요.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사람이 며칠 만에 완벽하게 건강해지고 정작 그를 간호하던 나는 매일 밤 두통에 시달리며 손이 떨리고 있어요. 이게 정상인가요?"
루시안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보이지 않는 맹약의 사슬이 목을 짓누르는 듯했다.
"마님……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마십시오. 공작 전하께서는 마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자신의 영혼도 전부요."
루시안의 목소리가 짓눌린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남편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니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왜 내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나요?"
루시안은 차마 엘리사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마님…… 전하의 안색만 살피지 마십시오. 방으로 돌아가시거든 직접 거울 속 마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루시안은 허리를 숙여 경례를 올린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침실로 돌아온 엘리사는 촛대에 불을 켰다.
흔들리는 불꽃이 방 안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루시안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직접 거울 속 마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엘리사는 이끌리듯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
전신 거울 속에는 촛불을 등진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단정한 흑발에 맑은 자수정색 눈동자. 늘 보아왔던 젊고 기품 있는 로렌 가문의 여주인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잖아.’
엘리사는 안도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촛불이 기이하게 흔들리며 불꽃의 색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치익.
공간이 일그러지는 마력 파동과 함께 거울 표면에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상이 무섭게 뒤틀렸다.
"……아."
엘리사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숨을 들이켰다.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은 건강한 엘리사가 아니었다.
볼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야위어 있었고 윤기 흐르던 흑발은 푸석하게 바스러져 있었다. 자수정빛 눈동자는 핏발이 서 퀭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입술은 피를 모두 쏟아낸 사람처럼 메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당장 내일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불치병 환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
"이게…… 뭐야……."
엘리사가 뒷걸음질을 쳤다. 거울 속의 유령 같은 형상 역시 똑같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환각이 아니었다. 가상 세계의 화려한 껍데기 아래 감춰져 있던 자신의 진짜 영혼의 형상이었다.
쿵.
심장이 거칠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동시에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쿨럭! 쿨럭……!"
엘리사는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가슴이 찢겨 나갈 것 같은 격렬한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을 떼어냈을 때 피부 위에는 피 대신 붉은빛을 띤 마력의 부스러기가 서늘한 냉기를 뿜으며 흩어지고 있었다. 영혼의 생명력이 닳아 없어질 때 나타나는 마력 붕괴의 잔흔이었다.
죽어가는 것은 카시안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원인 모를 쇠약에 무너져 내리는 것은 오직 엘리사 자신이었다.
‘어째서…… 내가……?’
자신이 카시안을 살리기 위해 마도구를 발동시켰다는 믿음 자체가 거대한 모순의 벽에 부딪혔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규칙적이고 다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카시안의 발걸음이었다.
엘리사는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문을 바라보았다. 다정한 가면을 쓰고 자신을 지키겠다던 남편의 발소리가 이제는 완벽한 포식자의 발걸음처럼 방 안을 서늘하게 짓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