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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남편을 위한 거짓 세계3화

시한부 남편을 위한 거짓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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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가짜 햇살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어둠은 유난히 짙고 차가웠다.

엘리사는 소파에 기댄 채 잠든 카시안의 숨소리를 가만히 귀담아들었다. 고른 숨결이 규칙적으로 방 안을 울렸다. 낮 동안 그의 흰 손목을 집어삼킬 듯 번지던 푸른 균열은 장갑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녀의 손바닥에 남은 은빛 마력의 잔향은 아직도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발걸음을 뗐다. 침실 바닥에 깔린 두터운 카펫조차 그녀의 조심스러운 무게를 완전히 삼켰다.

복도는 낮과 전혀 다른 낯선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촛대의 불꽃 하나 흔들리지 않는 대리석 통로 끝에 낮에는 분명 매끄럽고 단단한 벽면이었던 공간이 벌어져 있었다. 은은한 어둠 사이로 가느다란 틈이 벌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 차가운 밤공기가 흘러나왔다.

‘소유자 확인.’

손바닥에 떠올랐던 은빛 글귀가 이끈 곳이었다.

호위기사 루시안은 낯선 소리가 들리거나 문이 열려도 혼자 따라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카시안 역시 그녀의 손을 쥐며 결코 방 밖으로 혼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남편이 고통을 속으로 삼키며 홀로 무너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가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엘리사는 숨을 죽인 채 벌어진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방 안은 서늘한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까지 닿은 높은 서가와 바닥에 흩어진 수많은 양피지들이 푸르스름한 은빛을 띠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완벽한 밀실이었지만 바닥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은은하게 맥동하며 빛을 뿜어냈다.

엘리사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마법진 외곽의 룬을 매만졌다.

"이건……."

손끝에 닿는 마력의 결이 몹시 생소했다.

그녀가 로렌 가문의 비전서에서 외워 소울 스피어에 새겨 넣었던 치유와 안식의 공식이 아니었다. 외곽의 기본 골조는 비슷했지만 중심부로 향할수록 마력선이 겹겹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것은 대상의 영혼을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결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부의 의식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옭아매는 구속 서식에 가까웠다.

엘리사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양피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날카롭고 유려한 필체로 적힌 마법식들이 빼곡했다.

그 필체는 엘리사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손길이었다. 첼스터 공작가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결재할 때마다 수없이 보았던 카시안의 서체였다.

‘어째서 카시안의 필체가 이곳에 있는 거지?’

자신이 소울 스피어를 기동해 창조한 세계였다. 카시안은 그저 자신이 만든 낙원에서 아픔 없이 쉬어가기만 하면 되는 환자였다. 그런데 왜 이 세계의 중심 서식에 그의 손길이 이토록 깊숙이 닿아 있는 것일까.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규칙적인 쇠붙이 소리가 울렸다. 순찰을 도는 기사의 갑주 소리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리사는 황급히 양피지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으려다 모서리에 적힌 작은 공식 파편 하나를 조심스럽게 찢어 품에 숨겼다. 그리고 문틈을 빠져나와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췄다.

침실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는 순간까지도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소파 위의 카시안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엘리사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의 양피지 조각을 쥐었다.

무언가 돌이킬 수 없이 어긋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에델바이스 저택은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한 햇살 속에 잠겨 있었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티끌 하나 없이 맑고 투명했다. 정원의 풀잎마다 맺힌 이슬이 보석처럼 반짝였고 저 멀리 완만한 언덕 위로는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시녀 마리안이 은쟁반을 들고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입가에는 어제 아침과 완전히 똑같은 각도의 완벽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엘리사는 침대에 걸터앉아 마리안의 얼굴을 유심히 응시했다.

"마리안."

"예 마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젯밤 복도 끝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니?"

마리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이곳은 영주님과 마님을 위한 평화로운 에델바이스 영지입니다. 밤에는 어떤 소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너무나 유창해서 마치 오랫동안 연습한 연극 대사를 읊는 것 같았다.

엘리사는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

"그럼 저택 서쪽 복도 끝에 있는 방은 무슨 방이지?"

마리안의 미소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곳은 영주님과 마님을 위한 평화로운 에델바이스 영지입니다. 마님께서 불편하신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첫 번째 대답과 음정 하나 억양 하나 다르지 않은 목소리였다.

엘리사는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서늘한 소름을 느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손을 뻗어 마리안이 테이블에 내려놓으려던 은제 찻잔의 모서리를 툭 쳤다.

잔이 크게 기울며 뜨거운 홍차가 쏟아지려는 찰나였다.

마리안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손가락의 각도와 팔의 움직임에는 사람 특유의 당황이나 반사적인 움찔거림이 전혀 없었다. 마치 미리 정해진 궤적을 따라 기계가 작동하듯 찻잔은 단 한 방울의 차도 흘리지 않고 완벽하게 수평을 되찾았다.

"마님 차가 식기 전에 드십시오. 영주님과 마님을 위한 에델바이스의 특산 홍차입니다."

마리안은 다시 인형처럼 완벽하게 미소 지었다.

엘리사는 건네받은 찻잔을 내려다보았지만 도저히 입을 댈 수 없었다. 이 하인은 사람의 감정과 자의식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정해진 역할과 대사만을 수행하도록 정밀하게 깎아 만든 인형에 불과했다.

저택의 모든 고용인들이 그러했다.

복도를 오가는 하인들도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도 모두 똑같은 미소와 똑같은 인사를 건넸다. 그 누구도 슬퍼하거나 피로해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정해진 범위를 벗어난 말을 하지 않았다.

"엘리사."

침실 문이 열리며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시안이었다. 그는 단정한 감청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젯밤 손목을 부여잡고 고통에 짓눌려 신음하던 창백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안색이 맑고 건강해 보였다.

"일어났어?"

카시안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엘리사의 뺨을 감쌌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더없이 다정하고 따스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의 손목을 무의식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제복 소매 끝은 빈틈없이 단단히 여며져 있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네 덕분에 아주 좋아. 기침도 전혀 나지 않고."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엘리사의 손을 겹쳐 쥐었다.

"날이 참 좋아. 오늘은 약속대로 정원을 걷자."

카시안의 미소는 너무나 애틋하고 눈부셔서 엘리사는 순간 자신이 어젯밤 서재에서 본 것들이 모두 헛된 망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에 빠질 뻔했다.

하지만 그녀의 품 안에는 어젯밤 몰래 뜯어낸 양피지 조각이 날카롭게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정원은 눈이 시릴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순백의 에델바이스 꽃이 만발한 산책로를 따라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카시안은 엘리사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자신의 어깨로 바람을 막아 주었다.

"마음에 들어?"

카시안이 다정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 정말 아름다워요."

엘리사는 그렇게 답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 그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부신 햇살.

그런데 이상했다.

햇빛이 이토록 강렬하게 쏟아져 내리는데도 피부에 닿는 감각에는 실제 태양 특유의 나른하고 깊은 열기가 없었다. 마치 정교하게 조율된 온열 마법 결계를 쬐고 있는 것처럼 일정한 미온만이 피부 표면을 맴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원 한구석의 분수대 위로 날아오른 세 마리의 노란 나비. 나비들은 분수대 주위를 시계 방향으로 정확히 두 바퀴 선회한 뒤 에델바이스 꽃덤불 위로 내려앉았다.

잠시 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들이 일제히 서걱거리며 오른쪽으로 세 번 흔들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날아오른 노란 나비 세 마리는 방금 전과 완전히 똑같은 궤적을 그리며 분수대 주위를 두 바퀴 돌았다.

반복.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주기.

이곳의 자연은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계산하고 통제해 구축해 놓은 거대한 태엽 장치였다.

‘내가 만든 세계가 아니야.’

엘리사는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이 로렌 가문의 지식과 기억 속에서 길어 올려 짜 넣었던 에델바이스는 이렇게 기괴할 정도로 완벽하지 않았다. 흙냄새는 조금 더 짙었고 바람은 제멋대로 불었으며 풀잎의 흔들림은 불규칙하고 자유로웠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관자놀이를 강하게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두통이 스쳐 지나갔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흐려지며 숨이 턱 막혔다.

"엘리사?"

카시안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붉은 눈동자에 짙은 염려와 초조함이 번졌다.

"손이 차가워. 어디 불편한 거야?"

그는 엘리사의 두 손을 감싸 쥐며 자신의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맥박을 짚는 그의 손가락은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고 떨리고 있었다.

그 눈빛은 너무나 진실하고 절박해서 결코 거짓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카시안은 진심으로 엘리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를 대하듯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맹목적인 다정함이 이제는 서늘한 공포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죽어가던 사람은 분명 카시안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피를 토하며 꺼져가는 숨을 몰아쉬던 사람도 그였다.

그런데 어째서 카시안은 날이 갈수록 생기를 되찾고 강건해지는데 정작 자신은 원인 모를 두통과 손떨림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에요.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그래요."

엘리사는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서 쉴까?"

"아니에요. 조금만 더 걷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요."

카시안의 눈가가 안도감으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가 엘리사를 품에 안듯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정원 저편 저택 입구의 그늘 아래에 호위기사 루시안이 서 있었다. 그는 카시안의 등 뒤에서 엘리사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굳은 눈빛은 어젯밤 서재를 찾았던 엘리사의 발걸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 완벽한 빛의 장막 아래에서 엘리사의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만이 미세하게 떨리며 어두운 균열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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